# 083. 진짜를 보여주지 (2)
희망 정신병원.
“어째 영화에서 보던 것하고 다른데?”
혜성은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신병원이라고 해서 영화에 나오는 음습하고 무서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밝은 실내장식, 높은 천장, 그리고 은은하게 흐르는 클래식 음악까지. 환자들만 아니었으면 미술관이라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그는 이곳에 오는 동안 전화로 면회를 예약한 상태였다. 처음에는 가족 등의 일부만 면회할 수 있다고 했지만, 국민 영웅 이혜성임을 밝히자 예약확인부터 안내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영화에 나오는 정신병은 좀 과장된 측면이 많죠. 스트레스, 조현병, 각종 공황장애 등. 사실 현대인의 대부분은 크건 작건 정신치료가 필요합니다.”
안내를 맡은 남자 간호사가 시설을 하나씩 소개해주며 말했다.
환자복을 입은 젊은 남자 한 명이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복도 반대편에서 걸어왔다. 약에 취한 듯 조금 멍해 보였는데, 약간 마르긴 했지만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였다.
“저 사람은 어디가 아픈 겁니까?”
뒤따르던 막내가 남자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신이에요.”
“네? 하늘에 사는 그 신?”
“네. 과대망상증 환자인데, 연고가 없는 거 같아요.”
“신이 이런 누추한 하계에 왜 내려오셨대?”
막내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혜성도 조금 신기하다는 눈으로 자칭 ‘신’을 살펴봤다. 잠시 후, 그는 복도 중앙에서 신과 마주쳤다. 무심코 지나치려는 찰나, 신은 돌연 걸음을 멈추고 혜성을 빤히 쳐다봤다.
“손님한테 이러시면 안 됩니다.”
동행하던 간호사가 당황해서 잡아끌었지만, 신은 의외로 힘이 센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혜성은 뭔가에 홀린 듯 신을 응시하며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당신……”
신이 혜성의 귀에 대고 뭐라고 작게 속삭였다. 혜성은 놀라 눈을 부릅떴다.
잠시 후, 신은 히죽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혜성은 멍하니 서서 신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왜요? 저 미친놈이 뭐라고 했어요?”
막내가 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혜성의 어깨를 툭 쳤다. 한수호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혜성을 바라봤다.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환자들의 말을 마음에 담아둘 필요는 없습니다.”
안내하던 간호사도 신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덤덤했다.
“네…….”
그제야 혜성은 퍼뜩 깨어난 것처럼 몸을 돌렸다.
“왜요? 뭐라고 했는데요?”
막내가 대답을 재촉했다.
“별거 아냐. 신경 쓰지 마.”
혜성은 웃으며 대충 얼버무리고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남자가 속삭인 말은 환청처럼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조금 전, 자칭 신이라는 남자는 혜성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벌써 죽기엔 참 좋은 세상 아닌가요?”
그는 마치 혜성의 속내를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
1층 식당.
환자들이 띄엄띄엄 앉아 식사 중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몇몇은 간호사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저기, 말씀하신 닥터 J가 계십니다.”
간호사는 창가에 앉은 더벅머리 영감을 가리켰다.
반쯤 감긴 눈. 음식을 먹는 건지 보는 건지 알 수 없는 느린 움직임. 헤 벌어진 입과 산발한 머리. 언뜻 봐도 상태가 좋진 않았다.
“저런 사람이 정말 아이템의 박사일까요?”
“그냥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막내와 한수호는 미심쩍은 반응을 보였다.
“약 때문에 그럴 수도 있잖아. 여기까지 왔으니 일단 대화는 해 보자.”
혜성은 닥터의 맞은편에 앉았다. 막내와 한수호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한 뒤, 혜성을 따라가 뒤에 섰다.
식당은 조용했다. 음식을 씹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흠!”
혜성이 몇 번 헛기침했다.
닥터는 고개를 들지 않고 밥알만 깨작거렸다.
“아이고, 무슨 일로 오셨대요? 우리 닥터 양반은 누가 밥 먹을 때 방해하는 걸 제일 싫어하거든.”
닥터의 대각선 맞은편에 앉은 중년 사내가 물었다. 좀 꼬질꼬질했지만, 말을 들어보니 그나마 정상인 것 같았다.
“저희는 정부 요원입니다.”
막내가 대신 대답했다.
“아. 공직에 계시는 분이구나. 이런 데서 만나니 반갑네요.”
“뭐 하시는 분입니까?”
“저요? 저는 왕이었죠.”
“왕이요? 왕이 왜 여기에 계세요?”
“부하들이 배신을 때리는 바람에.”
자칭 왕은 나직이 욕설을 퍼부었다.
‘그럼 그렇지. 역시 정상이 아니네.’
막내는 대번 미간을 찌푸렸다.
왕은 오랜만에 낯선 이를 만나 신이 난 모양이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다른 이들을 가리키며 하나씩 소개해줬다. 먼저 닥터의 왼쪽에는 손가락을 빨고 있는 건장한 사내가 있었다.
“뀨?”
그는 손을 물고 아이처럼 옹알거리며 천진난만하게 혜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쟤는 드래곤이에요.”
“드래곤? 하늘을 나는 그 드래곤? 드래곤이 어떻게 사람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이번엔 한수호가 손으로 날갯짓하는 시늉을 하며 되물었다.
“폴리모프했다던데요.”
“그럼 손가락은 왜 빨고 있어요?”
“아직 해츨링이라.”
한수호도 대번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음엔 닥터의 오른쪽에 앉은 장발 사내였다.
“웅웅웅.”
“웅웅.”
왕은 장발 사내와 한참 동안 ‘웅웅’거렸다. 장난 같아도 둘은 제법 진지했다.
“또 뭡니까?”
다시 막내가 혹시나 하며 물었다.
“만나서 반갑다네요. 그리고 당신들한테 몇 가지 축복을 걸어줬어요.”
“네? 그냥 웅만 몇 번 한 거 아니에요?”
“마법어입니다. 우리가 듣기엔 같은 소리지만, 성조가 30개가 넘어요.”
다음은 닥터의 대각선 맞은편에 앉은 대머리 사내였다. 인상이 상당히 험상궂었는데, 아까부터 여자처럼 수줍게 혜성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절세 미녀입니다. 강지영도 우리 미녀에 비하면 한 수 아래죠.”
“미녀요? 미남이라고 해도 시원찮을 판에?”
막내는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물었다.
“마법사 친구의 저주에 걸렸거든요.”
“저주를 풀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게 좀 곤란해요. 마법사가 지팡이를 잃어버렸어요.”
“씨발.”
막내는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진지하게 들었던 자기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 나가자. 여기 있으니까 나까지 미칠 것 같아.”
“맞습니다. 이따 식사 끝나고 오시죠.”
막내와 한수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혜성을 바라봤다.
‘뭐야? 이 사람들?’
혜성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닥터의 식사는 2시간이 넘게 걸립니다. 휴게실에서 쉬었다가 오시죠.”
안내했던 간호사도 웃으며 거들었다.
“알겠습니다.”
혜성은 닥터를 바라보다가 쓰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왕을 비롯한 환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닥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뭐야?”
혜성은 문가를 돌아봤다. 한 환자가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식당에 들어서고 있었다.
왕보다 한 끗발 위. 세상의 절대자. 자칭 신이라는 환자였다.
***
4층 휴게실.
막내는 자판기에서 시원한 캔 커피를 꺼내 혜성에게 건넸다.
왕, 드래곤, 마법사, 절세미녀, 거기에 신까지. 조합만 보면 판타지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파티였다. 혜성의 일행은 그들과 대화 몇 마디 한 것만으로 진이 다 빠졌다.
“처음 오신 분은 적응하기 힘들 거예요. 여긴 환우 중에서도 좀 특이 케이스만 모아둔 곳이거든요.”
간호사가 웃으며 그들에게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닥터는 어떤 사람입니까?”
혜성이 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일종의 대인기피증이에요. 뭔가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사람과의 관계를 잊어버렸다고 할까요?”
간호사는 혜성의 맞은편에 앉아 닥터에 대해 설명했다. 어려운 용어가 잔뜩 나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닥터가 마음의 문을 닫은 탓에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혹시 아이템에 너무 몰두한 게 아닐까요? 그런 천재들 있잖아요. 하나에만 몰두한 나머지 다른 것에는 바보 같은 사람들.”
혜성은 강지영의 말을 떠올렸다. 닥터는 게이트 시대 초기부터 활약했던 아이템의 장인이라고 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닥터가 가끔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때가 있거든요. 뭔가 번뜩인다고 해야 하나? 아이템의 전문가라고 했으니까……”
간호사가 한창 웃으며 맞장구치는 도중이었다.
위-잉!
붉은 조명이 깜빡이며 경보기가 요란하게 울어댔다. 이어서 쾅하고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뭐야?”
혜성은 반사적으로 일어나 식당으로 뛰어갔다. 막내와 한수호도 다급하게 뒤따랐다.
병원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는 환자들과 그런 환자들을 뒤쫓는 간호사들로 정신이 없었다. 혜성은 사람들에게 막혀 경보가 울리고 한참 후에야 식당에 도착했다.
“여기는 김성후. 인식 번호……”
막내가 핸드폰을 들고 NSA에 연락했지만, 사람들의 고함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쾅, 혜성은 문을 발로 차고 식당에 진입했다.
식당은 창가 쪽 벽이 반쯤 무너져 있었다. 타는 냄새가 없는 것으로 보아 폭탄 등에 의한 건 아니었다. 능력자가 특수 스킬로 뚫은 것 같았다.
‘닥터는?’
혜성은 식당을 둘러보다가 멈칫했다.
닥터가 사라진 건 둘째 문제. 뭔가 이상했다. 식당 여기저기에 복면을 쓴 괴한들이 쓰러져 있었다. 저마다 A급 무기를 손에 든 채로. 반면 왕을 비롯한 얼간이 사인방은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며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놈들을 누가 죽인 겁니까?”
혜성은 자칭 왕에게 달려가 물었다.
“누구긴요. 신이시지.”
왕은 히죽 웃으며 옆을 돌아봤다. 자칭 신이라는 환자가 느릿하게 수저를 움직이고 있었다.
“닥터는? 왜 닥터를 안 쫓아갔습니까?”
혜성은 신을 바라보며 화를 내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제야 신은 고개를 들고 흐리멍덩한 눈으로 혜성을 쳐다봤다.
“그 사람들은 닥터를 해칠 마음이 없었거든. 그리고 배가 고파서 힘도 없었고.”
“아, 씨발. 장난해?”
뒤에서 버럭 욕설이 터졌다. 막내였다.
혜성도 소리를 지르려다가 화를 삭였다. 일단은 닥터를 추격하는 게 먼저. 잘잘못을 따지는 건 그다음 일이었다.
“가자!”
혜성은 신을 잠깐 노려보다가 차를 세워둔 반대편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잠시 후 그들이 사라진 뒤.
“자, 우리도 슬슬 가 볼까요?”
신은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너진 벽 밖으로 화창한 세상이 보였다. 왕과 드래곤, 마법사, 미녀 등이 웃으며 그를 따라갔다.
***
부아앙, 검은색 대형 승합차 한 대가 굉음을 내며 비포장길을 내려갔다.
“씨발, 어떻게 된 거야?”
운전석의 사내가 백미러로 뒤를 보며 물었다.
닥터가 제일 먼저 보였다. 눈을 가리고 팔을 뒤로 묶은 상태였다. 그 옆에는 괴한들이 앉아 복면을 벗고 있었다. 돌아온 건 세 명뿐. 일곱 명은 차가운 시체가 돼 병원에 남았다. 그나마 돌아온 놈들도 뭔가에 놀라 얼이 빠져 있었다.
“환자 중에 이상한 놈이 있었다.”
“우리의 공격을 그대로 돌려주는 스킬이라니.”
“그런 놈이 있다는 말은 없었잖아?”
셋은 음료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전직 헌터들이 모여 있는 병원이라더니.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운전석의 사내는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때였다. 사이드미러로 SUV 한 대가 빠르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꼬리가 붙은 건가?”
그들은 반사 스킬을 사용한 놈을 떠올렸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놈이 반사 스킬을 사용한 건 그들이 먼저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놈은 자신과 관련된 것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사장님께 연락해. 예상에 없던 꼬리가 붙었으니 플랜 B로 가겠다고.”
운전석의 사내는 대포폰을 꺼내 뒤로 던졌다. 그리곤 이를 악물고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설마 이혜성은 아니겠지?”
이제는 전설이 된 자동차 추격전, 혜성이 벌인 광란의 질주가 문득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