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2. 진짜를 보여주지 (1)
정오 무렵, 강남 S 커피숍.
한 사내가 구석에 혼자 앉아 있었다. 마스크와 뿔테 안경으로 얼굴을 가린 혜성이었다. 그는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검색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 이혜성, 강지영과 공개 연애 선언
- 세기의 커플. 국민 영웅과 국민 여배우의 만남
반나절이 지났는데도 실시간 검색어의 1위부터 10위까지 전부 그와 강지영의 기사였다. 성급한 일부 매체는 둘의 얼굴을 합성해서 가상의 2세를 만들기도 했다.
김유진이 즉시 오해라는 반박 기사를 냈지만, 혜성이 본인의 입으로 직접 고백한 영상 때문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태호와 연우 씨가 잘 풀려서 좋긴 한데. 내가 왜 거기서 그런 말을 해서……”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쉴 때였다.
“진심이 아니었어요? 좀 실망인데요?”
머리맡에서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가린 강지영이었다.
“아, 오셨습니까?”
혜성은 엉거주춤 일어나 어색하게 인사했다. 마스크 때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갰다.
“이건 오해입니다. 제 친구 태호 아시죠? 그 녀석이 막내의……”
혜성은 더듬거리며 미리 준비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시트콤의 한 장면도 아니고. 자신이 말하면서도 기가 막혔다.
“괜찮아요. 사실 여기저기서 치근덕대는 놈들이 많아서 귀찮았거든요. 재벌 2세니, 정치인이니 하면서 거들먹거리는 놈들 말이에요. 국민 영웅과 스캔들이 나니까 다들 깔끔하게 포기하던데요?”
강지영은 웃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 말투를 들어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
혜성도 찌라시에서 그녀의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유명인 중에 강지영에게 들이댔다가 차인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 그럼 다행이네요.”
그제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바쁜 사람이었다. 강지영은 백팩에서 작은 서류철을 꺼내 건넸다.
“LK 로직스는 아직 조사 중이에요. 표면적으로는 한, 중, 일을 주 무대로 하는 건실한 중견 물류 업체죠.”
“대표가 누구입니까?”
혜성은 서류를 넘기며 물었다. LK로직스의 기업 구조와 재무에 관한 자료였다. 기업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다른 기업들과 비슷한 것 같았다.
“우민창이라고, 대통령 표창까지 받은 청년 사업가예요. 아직까진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지 않았고요.”
“우민창?”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혜성은 고개를 갸웃하며 서류를 넘겼다.
서류 중간쯤에 우민창의 사진과 프로필이 있었다. 포마드 머리로 상징되는 깔끔한 외모. TV에 나오는 건실한 청년 사업가의 이미지였다. 다만 특이하게도 두 눈동자의 색깔이 달랐다. 왼쪽 눈동자는 외국인처럼 옅은 파란색이었지만, 오른쪽 눈동자는 짙은 갈색이었다.
“NSA의 상황은 어때요? 사라진 만병귀 때문에 난리가 났을 텐데요. 비록 시체였지만, 만병귀는 인간과 몬스터의 융합체라는 희귀한 연구 대상이잖아요.”
강지영이 아메리카노로 입을 축이고 물었다.
“그게 좀 이상합니다. 국장님과 간부들이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랄까요? 물밑에서 뭔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혜성은 쓰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물론 국장의 입장도 이해는 됐다. 최근 연이은 실책과 내부 정보의 유출 등으로 NSA의 명예가 실추된 상태였다. 일부에서는 NSA와 CIC의 통합까지 거론되고 있는 터. 국장이 이를 갈며 비밀 작전을 준비하는 게 당연했다.
“참. LK 건 말고 따로 부탁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강지영이 화제를 돌려 물었다.
혜성은 서류철을 돌려주고 머뭇거리며 운을 뗐다.
“사실 오늘 지영 씨를 만나자고 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유수혁, 만병귀와 연이어 싸우면서 생각한 게 있거든요.”
“그게 뭔데요?”
강지영은 혜성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흥미를 보였다.
“유수혁과 무형검의 관계를 예로 들어보죠. 유수혁이 없으면 무형검은 그저 보이지 않는 단검일 뿐이죠. 위협적이긴 해도 AA급 이상은 금방 그 존재를 알아챌 겁니다. 반대로 무형검이 없는 유수혁은 레벨이 높긴 하지만, 염동력 계통의 한계에 머물 수밖에 없을 테고요.”
유수혁과 무형검. 둘은 단순히 사람과 도구의 관계가 아니었다.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만드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였다.
만병귀도 마찬가지였다. 놈은 변형되는 무기를 손에 들었을 때 비로소 모든 병기에 능통한 장기를 발휘할 수 있었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들더군요. 지금 나는 내 아이템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가령 대수영만 해도 적의 공격을 예측하는 지능형 아이템일 뿐일까? 혹시 나도 모르는 다른 힘이 있지 않을까? 이런 거 말입니다.”
혜성은 대수영과 암흑의 수호자, 카피캣이 만든 시너지를 떠올렸다. 만병귀와 똑같은 변형 무기로의 진화. 어쩌면 셋의 시너지는 변형 무기 외에 더 있을지도 몰랐다.
“송도 연구소에 문의하는 건 어때요? 이름이 뭐였더라? 두꺼비 닮은 연구원이 꽤 유능한 것 같던데.”
“안 그래도 그쪽에 문의해 봤습니다. 하지만 유니크 아이템은 만든 이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아서 명확한 답변을 주기 어렵다더군요. 시간을 갖고 계속 고민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흠. 아이템 간의 시너지라. 참 어려운 명제네요.”
강지영도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혜성은 커피를 홀짝이며 기다렸다. 그도 어려운 부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부탁했을 뿐. 강지영이 해결하지 못하면 다른 방법을 찾을 계획이었다.
“아. 전문가 한 명을 알고 있어요. 그 사람이라면 혜성 씨가 원하는 답을 줄 수도 있을 거예요.”
딱, 강지영은 엄지와 중지를 튕기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누굽니까?”
혜성도 얼굴이 밝아져 대답을 재촉했다.
“코드명 ‘닥터 J’. 게이트 시대 초기에 활약했던 아이템의 장인이에요. 다만 문제가 좀 있어요. 그는 지금……”
강지영은 커피로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
국장실.
한진영은 장진우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 놓인 커피는 다 식은 상태였다. 둘의 관심은 커피가 아니라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온 63스퀘어의 보고서들에 쏠려 있었다.
“그날 혜성 씨를 도와줬던 여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장진우가 CCTV 분석 자료를 넘기며 물었다.
만병귀가 거미 여왕의 힘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CCTV들이 부서졌다. 정체불명의 여자들이 싸우는 사진은 전투의 중간까지만 있었다.
“나도 모르겠어. 윗선에선 더 파지 말고 이쯤에서 묻으라더군.”
한진영은 장진우가 들고 있는 사진을 힐끔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상당히 자존심이 상한 눈치였다.
“윗선? 국장님보다 윗선이면 총리님입니까?”
장진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최소. 어쩌면 VIP의 직속일 수도.”
“판이 커졌군요. 혜성 씨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름 없는 보조 요원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들과 같이 일했을 리는 없고. 역시 그 소문이 사실일까요?”
장진우는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췄다.
와 CIC는 너무 비대하고 외부에 노출된 상태. 게이트와 던전에는 잘 대응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블랙처럼 보이지 않는 적들과의 싸움이었다. 이에 푸른 기와집에 계시는 VIP가 민간 회사로 위장한 특수 기관을 창설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내 생각도 그래. 혜성 씨가 블랙의 표적이 된 건 유명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들은 혜성 씨를 주시하며 뒤에서 일을 꾸미는 것 같아.”
한진영은 쓴웃음을 지은 뒤 테이블에서 다른 서류를 집었다.
“특수 기관 얘기는 나중에 하지. 중요한 건 만병귀의 시체와 그의 시그니처 아이템을 가져간 놈들이니까. 미친 새끼들. 대범하게 보조 요원으로 위장해서 빼돌리다니. NSA가 정말 물로 보이나 보군.”
그는 서류를 펼쳐 장진우에게 건넸다.
만병귀가 죽은 다음부터 놈의 시체가 사라질 때까지의 기록이었다. 그날 현장에 있던 차량에는 몰래 위치추적기를 부착했는데, 그 차량 중 한 대가 다른 곳에서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
“LK 로직스?”
장진우는 서류를 넘기며 미간을 좁혔다. 어디선가 한두 번 들어본 것 같은데, 딱히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그래. 아무래도 놈들이 만병귀와 아이템을 빼돌린 것 같아.”
“혹시 블랙의 위장 회사일까요?”
“어쩌면. 자네가 직접 놈들을 파 봐야겠어.”
한진영은 목소리를 낮춰 뭔가를 길게 설명했다.
“알겠습니다. NSA도 자존심이 있지요. 덫을 놓고 놈들을 한 번에 잡겠습니다.”
잠시 후, 장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경기도 외곽, 희망 정신병원.
야트막한 언덕 위에는 하얀색 건물이 웅크리고 있었다. 정신병원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정말 언덕 위의 하얀 집이었다.
잠시 후, 흙먼지를 일으키며 SUV 한 대가 나타나 공터에 멈췄다.
“이건 뭐야? 희망 정신병원?”
막내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운전석에서 내렸다.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서 도착한 곳이 겨우 정신병원이라니. 무작정 혜성을 따라오긴 했지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공기는 좋습니다.”
뒷좌석에서 한수호가 기지개를 켜며 내렸다.
“너흰 왜 따라온 거야? 그냥 나 혼자 와도 된다니까.”
마지막으로 혜성이 쓰게 웃으며 내렸다.
“형은 툭하면 사건을 부르잖아요. 이번엔 또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요?”
“좌 막내, 우 수호. 이건 이제 공식 아닙니까? 개별 행동은 괜찮지만, 대신 저희 둘을 항상 데려가라는 국장님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막내와 한수호는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한마디씩 했다.
“이 새끼들이 나를 뭐로 보고.”
혜성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는 곳마다 풍파가 분다. 이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엄연히 NSA 소속. 근무 시간에 사적으로 나온 것만으로도 특혜였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 온 거예요? 정신과 의사한테 상담이라도 받으려고요?”
막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잘 가꿔진 숲, 그늘진 오솔길, 작게 지저귀는 이름 모를 산새들까지. 잠깐 걷는 것만으로도 정서적으로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아니. 의사가 아니라 환자를 만나러 온 건데.”
“엥? 닥터라고 하셨잖습니까? 닥터가 왜 환자입니까?”
이번엔 한수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내가 오면서 한 말은 어디에 흘린 거냐? 정말 닥터가 아니라 아이템의 닥터라는 뜻이라고.”
혜성은 한숨을 내쉰 뒤 병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형이 누구한테 소개를 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어째 실수한 거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옛날에야 제법 잘나갔는지 몰라도 지금은 약에 찌든 폐인이 아닐까요?”
막내와 한수호는 불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다가 허겁지겁 혜성을 따라갔다.
***
같은 시각, 병원 반대편 숲속.
복면을 쓴 남자 열 명이 나무 사이에 숨어 있었다. 그늘 속에서 그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저긴가? 그 닥터 J가 있는 곳이?”
중앙의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평범한 정신병원이었다. 환자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출입구와 창문이 이중으로 돼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종잇장보다 약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놈이 정말 그렇게 대단할까요?”
옆에 있던 부하가 갑옷과 장검 등을 점검하며 물었다.
“난들 아나? 우린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중앙의 사내는 어깨를 으쓱한 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문제는 이혜성이란 놈이야. 듣자 하니, 우리가 뭔가를 할 때마다 사사건건 마주친다더군. 차성진 때부터 뭔가 얽힌 것 같아.”
“에이. 설마 여기서 또 만나겠습니까?”
처음의 부하는 웃으며 되물었다.
“맞습니다. 놈이 이런 산중 정신병원에 왜 오겠습니까?”
“놈이 나타나면 제 손에 장을 지지겠습니다.”
다른 녀석들도 키득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도 방심하지 마라.”
중앙의 사내는 차갑게 말하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1시 50분.
작전 개시까지 이제 1시간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