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1. 아마 사랑인가 봐 (3)
막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택가로 들어섰다. 발걸음이 나는 듯이 가벼웠다.
“지금쯤이면 이벤트도 잘 끝났겠지? 하여튼 태호 형도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간다니까. 할 수 없지. 미래의 매형이니까.”
녀석은 혼자 히죽거리며 골목 어귀의 상황을 상상했다.
무서워 벌벌 떠는 김연우. 그런 그녀를 안고 달래는 태호.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키스.
“애들이 고생을 많이 했겠네. 나중에 근사하게 저녁이라도 사야……”
그가 혼잣말하며 골목으로 들어선 다음이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중학생이 콧노래를 부르며 마주 오고 있었다. 한수호였다.
“어? 네가 여기 웬일이냐? 혜성이 형하고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막내는 걸음을 멈추고 녀석을 불렀다.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인데요. 형이 여기 웬일입니까?”
한수호도 그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나는 집이 여기잖아.”
“저는 태호 형하고 볼일이 있어서 왔는데요.”
“그래? 이상하네. 나도 태호 형하고 볼일이 있는데. 너 설마…… ‘헌터는 결혼이 어렵다’를 본 건 아니겠지?”
막내는 순간 정체 모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요즘 유행하는 로맨스 소설의 하나였다. 무능한 능력자가 결혼해서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계속 결혼에 실패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에피소드 중의 하나가 바로 가짜 불량배 사건.
“그걸 왜 안 봐요? 유치하면서도 은근히 재미있는데.”
한수호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씨발!”
둘은 잠깐 시선을 교환한 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막내의 집 쪽으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예상대로였다. 막내의 집 근처 골목. 혜성이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연우 씨.”
태호는 부어오른 뺨을 어루만지며 연우의 이름을 되뇌었다.
“어? 너희가 여기 웬일이냐?”
혜성은 고개를 갸웃하며 둘을 바라봤다. 아직 사태 파악이 안 되는 눈치였다.
“형. 미안해.”
“선배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막내와 한수호는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숙였다.
“뭐가?”
그제야 태호도 의아한 표정으로 둘을 쳐다봤다.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지?’
막내는 당황해서 한수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 그러십니까? 이런 건 연장자가 먼저 하셔야 합니다.”
한수호도 옆구리를 찌르며 떠넘겼다.
“대체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설마 둘이 무슨 사고라도 친 거냐?”
혜성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막내가 태호의 눈치를 보며 말을 더듬는 도중이었다.
삐-익!
스마트 워치와 핸드폰에서 일제히 높고 긴 알람 소리가 울렸다. C급 게이트가 생성됐다는 재난 문자였다.
***
30분 뒤, 장한평역 근처.
피처럼 붉은 아지랑이 형태의 게이트가 하늘에 떠 있었다. 규모나 징후를 봤을 때 잡몬스터 몇 마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이고. 또 이혜성이야?”
NSA 출신의 낯익은 팀장이 웃으며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비번이라도 인접한 지역에서 사건이 발생하면 출동하는 게 NSA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오늘은 정말 우연입니다.”
“하긴. 요즘은 게이트가 워낙 많아졌으니까.”
“그런데 어떤 몬스터입니까?”
혜성은 보조 요원에게서 장비를 받아들며 물었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 또한 이런 전투 요원들을 부럽게 바라보던 보조 요원이었다. 갑옷을 입고 대검을 들자 느낌이 묘했다.
막내와 한수호도 장비를 챙기고 준비했다.
“토끼 다람쥐야.”
팀장은 보조요원에게서 태블릿을 건네받아 혜성에게 보여줬다.
그 이름처럼 토끼의 얼굴과 다람쥐의 몸통을 지닌 하급 몬스터였다. 건장한 체격의 성인 남성이라면 몽둥이로 쉽게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작고 재빠른 탓에 숫자가 많아지면 조금 까다로웠다.
도심 한복판이었기 때문에 통제 구역이 넓었다. 태호도 기본적인 장비를 지급받고 통제선 밖에서 힐러들과 대기했다.
“괜찮겠냐? 3분 넘었잖아. 어지간하면 그냥 빠지는 게 어때?”
혜성이 태호에게 슬쩍 다가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나도 국민 영웅의 전담 치료사로 유명하니까. 기껏해야 토끼 다람쥐라 별문제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잖아.”
태호는 다른 치료사들을 곁눈질하며 웃었다.
“알았다. 대신 절대 무리하지 말고 자리만 지켜. 괜히 전투에 휘말리지 말고.”
혜성은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통제구역 중앙으로 뛰어갔다.
“온다!”
팀장의 지휘 아래 그들은 게이트 아래를 원형으로 포위했다.
작전은 간단했다. 놈들이 밀집 대형으로 지상에 떨어진 직후, 막내 등의 원거리 딜러가 강한 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한다. 그다음 혜성 등의 근거리 딜러들이 놈들의 중앙으로 난입, 놈들이 달아날 틈을 주지 않고 단숨에 끝낸다.
콰쾅!
작전대로 원거리 딜러가 중앙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 끼에에엑!
괴상한 비명과 함께 고기 타는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5분쯤 지나자, 하늘 높이 솟았던 불길이 서서히 약해졌다.
“좋았어. 다음……”
팀장이 근거리 딜러들의 돌진을 명령하려는 찰나였다.
몬스터들도 인간과의 전투에 익숙해진 걸까? 놈들은 외곽에 약한 놈들을 배치해서 공격을 버텨냈다. 동료를 방패로 쓴 것이다. 그리곤 인간들이 다음 작전을 위해 잠깐 공격을 멈춘 순간, 놈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막아!”
팀장이 뒤늦게 대형 유지를 명했지만, 근거리 딜러들은 이미 대형을 흐트러뜨린 상태였다.
혜성도 욕설을 퍼부으며 주위를 빠르게 둘러봤다.
“젠장!”
그는 대번 얼굴이 창백해졌다.
7시 방향.
토끼 다람쥐 두 마리가 통제선을 넘어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태호가 대기하고 있는 지점이었다. 워낙 재빨라서 치료사들이 미처 도망칠 틈도 없었다.
“안 돼!”
혜성은 고함을 지르며 태호를 향해 달려갔다.
***
“젠장!”
태호는 주위를 둘러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3분 무적은 진즉에 끝난 상태. 다른 치료사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고 없었다. 그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아까 불량배들하고 싸울 때 무리해서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혜성이가 이런 기분이었나?’
그는 문득 혜성의 DDP 사건을 떠올렸다.
의외로 두렵지 않았다. 다만 김연우에게 진심을 전하지 못한 게 아쉬울 뿐. 문득 피식 쓴웃음이 나왔다.
“아디오스!”
그는 혜성의 명대사로 유명한 마지막 인사를 외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퍽, 두개골이 깨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태호의 두개골이 아니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그는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았다. 대신 익숙한 향수 냄새가 났다.
‘뭐지?’
태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땀에 흠뻑 젖은 날씬한 여자. 김연우가 그를 막고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피 묻은 야구 배트가 들려 있었고, 발밑에는 머리가 깨진 토끼 다람쥐 두 마리가 널브러져 있었다. 싸움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연우 씨?”
태호는 그녀를 감싸며 손에서 배트를 뺏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가 감동에 젖은 얼굴로 물었다.
“저기요.”
김연우는 우측 대로변을 눈짓했다. 중년의 BJ가 숨어 있었다. 그는 시선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카메라를 돌렸다.
“저를 위해서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그럼 누굴 위해서 왔겠어요?”
“연우 씨.”
태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사랑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태호 씨가 죽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김연우는 태호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아마 사랑인가 봐.”
그녀는 태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달싹거리듯 말했다. 이어진 태호의 과감한 키스. 그녀는 수줍게 눈을 감았다. 잔잔한 음악만 깔리면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그때 통제선 중앙.
전투는 순식간에 끝난 상태였다. 통제선을 벗어날 것처럼 보이던 몬스터들은 주위에 매설된 지뢰형 아이템에 폭사했다. NSA의 팀장이 혹시 몰라 설치해 둔 덫이었다.
“지금 둘이 뭐 하는 거야?”
혜성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팔을 보니 두드러기가 난 것처럼 닭살이 잔뜩 돋아있었다.
“영화 찍네요. 뭐? 아마 사랑인가 봐? 미쳤군요.”
어느새 다가온 막내도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NSA의 다른 요원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겨우 토끼 다람쥐 두 마리를 쓰러뜨리고 로맨스 영화를 찍는 거야?”
“아마 지랄인가 봐. 대체 평소에 뭘 본 거지?”
키스하는 건 태호와 김연우였지만, 손발이 오글거려 숨고 싶은 건 그들이었다.
“누나야 그렇다고 쳐도, 태호 형님이 원래 저런 사람이었습니까?”
한수호는 차마 둘을 보지 못하고 혜성만 쳐다보며 물었다.
“나도 몰라. 원래 저런 놈은 아니었는데. 사랑에 눈이 멀면 상대를 닮는다더니. 아무래도 연우 씨한테 옮은 것 같아.”
혜성은 원망의 표정으로 막내를 노려봤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 아니냐?’라고 말하는 표정이었다.
“미안해요. 내가 누나 대신 사과할게요.”
결국 막내는 홍당무가 돼 다른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
고딕풍의 가구가 인상적인 사무실.
한 사내가 태블릿으로 영상을 보고 있었다. 장안구에 열린 게이트의 중계였다.
“뭐? 아마 사랑인가 봐? 미쳤군.”
사내는 욕을 중얼거리며 태블릿을 껐다. 하마터면 태블릿을 집어 던질 뻔했다.
“저런 얼빠진 놈이 이혜성의 오른팔이라니.”
맞은편에 서 있던 부하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병쌍수는 어떻게 됐지?”
사내는 책상에 놓인 보고서를 훑어보며 물었다.
보고서에는 죽은 만병귀의 사진들이 있었다. 사실 죽은 만병귀에는 볼일이 없었다. 중요한 건 그의 시그니처 아이템, 일명 ‘만병쌍수’라는 변형 무기였다.
“현재 저희의 기술로는 재동기화가 어렵습니다. 마스터께 가져가거나 다른 전문가를 섭외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안 돼. 마스터는 만병쌍수를 돌려주지 않을 거야. 아마 자기가 취하겠지.”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니크 아이템은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혜성의 대수영이나 암흑의 수호자, 카피캣처럼 사용자와 고난도의 동기화를 거쳐야 했다. 따라서 사내가 만병귀의 아이템을 취하려면, 일단 만병귀와 아이템의 동기화를 해제하고 그와 재동기화해야 했다.
“정부 소속 연구소는 안 되고. 지하 마켓도 당분간은 손절하는 게 좋을 거 같고.”
사내는 검지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아마 지금쯤 마스터도 만병귀의 소식을 접했을 터. 마스터가 아이템을 찾기 전에 그가 먼저 동기화해야 했다. 일단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아무리 마스터라도 아이템을 요구하기 애매할 테니까.
“안 그래도 은퇴한 장인 하나를 찾았습니다. 한때 ‘닥터 J’라는 코드명으로 불린 자입니다. 그라면 아마 아이템의 동기화 해제 및 재동기화가 가능할 겁니다. 다만 문제가 좀……”
부하는 사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문제?”
“닥터 J가 현재 있는 곳입니다.”
부하는 난감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내는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으로 듣기만 했다.
“할 수 없지. 당장 팀을 꾸려. 이번엔 나도 직접 가지.”
이윽고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위, 검은색 명패가 보였다.
[LK 로직스 대표이사 우민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