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0. 아마 사랑인가 봐 (2)
11시 무렵, 장안동 주택가.
태호와 김연우는 인적이 끊긴 골목을 나란히 걷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근사한 바에서 칵테일도 한 잔씩 했다. 예정보다 조금 늦게 집에 도착했다.
“너무 늦었나요? 사람이 한 명도 없네요.”
태호는 김연우의 손을 슬쩍 잡으려다가 멈칫했다. 그녀가 핸드백을 고쳐 메는 척하며 손을 뺀 것이다. 막내에게 들킨 이후 계속 이런 식이었다. 오늘도 몇 시간 동안 같이 있었지만, 대화가 계속 겉도는 느낌이었다.
태호는 김연우를 곁눈질하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가로등 때문인지 그녀의 빨간 입술이 유달리 예뻐 보였다. 그녀의 집까지는 이제 200m밖에 남지 않았다. 그 전까지 재킷 안주머니에 있는 목걸이를 꺼내 결판을 내야 했다.
그가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은 순간이었다.
“태호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는……”
김연우가 한숨을 내쉬며 먼저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이 네 글자가 마음에 걸렸다. 태호는 대번 표정이 굳어졌다. 그때였다.
“여어. 그림 좋은데?”
“이 늦은 밤에 어딜 가시나?”
골목 모퉁이에서 휘파람이 길게 울렸다.
오른쪽 그늘에서 건장한 사내 다섯 명이 나타났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가죽 재킷과 선글라스, 거기에 징이 박힌 부츠까지. 90년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동네 불량배들이었다.
녀석들은 침을 뱉고 건들거리며 둘에게 다가왔다.
“뭐 하는 놈들이냐?”
태호는 팔을 뻗어 김연우를 자신의 뒤로 하고 놈들을 막아섰다.
‘능력자들인가? 최소 B급 이상.’
말이나 행동은 불량배치고 어설펐지만, 걸음걸이가 예사롭지 않았다. 가벼우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보법. 게다가 언제부턴가 주위의 공기에서도 위화감이 느껴졌다. 주택가인데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소리를 차단하는 결계라도 펼친 모양이었다.
‘혹시 날 노린 건가?’
태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은 막내, 한수호 등과 함께 이혜성 군단으로 유명했다. 혜성을 노리는 악당이 불량배로 가장해서 자신을 먼저 습격한 것 같았다.
“제가 소리치면 곧장 큰길까지 도망치십시오.”
태호는 김연우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그럼 태호 씨는……”
“전 괜찮습니다!”
태호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녀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그때였다.
“아이고, 이 밤에 데이트……”
“씨발. 여자친구 없는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뒤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리다가 멈칫했다.
“어?”
앞뒤의 놈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이건 계획에 없던 건데? 너희가 여기 왜 있어?’라는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당황은 잠깐. 이유야 어찌 됐건 그들은 시킨 대로만 하면 그만이었다.
“저런 씹다 만 오징어처럼 생긴 놈이 뭐가 좋아?”
“맞아. 오빠들하고 같이 놀자고.”
열 명의 어설픈 불량배들이 골목 앞뒤에서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 왔다.
‘역시 한패인가?’
자신을 노린 거라는 태호의 의심도 확신으로 변했다.
B급 능력자 열 명.
다섯 명이라면 어떻게 해보겠지만, 열 명이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다구리에는 장사 없다는 만고불변의 진리. 태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더 짙어졌다.
***
3분 무적.
태호는 성난 늑대처럼 불량배들 틈을 누볐다. 주황색 가로등 아래, 거친 싸움을 벌이는 사내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의 추측이 맞는 것 같았다. 놈들은 김연우를 무시하고 집요하게 그만 노렸다.
‘젠장!’
그는 골목 어귀를 힐끔 쳐다봤다. 김연우는 싸움의 중간에 껴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연우 씨 빨리……”
그가 뭐라고 외치려는 찰나, 한눈판 틈을 노리고 불량배의 주먹이 그의 턱을 강타했다.
쾅, 태호는 일순 정신이 아득해져서 휘청거렸다. 복장이나 말은 어설펐지만, 싸움은 어설픈 연기가 아니었다. 놈들의 공격은 진짜였다. 정신없는 와중에 김연우의 비명이 환청으로 들렸다.
시간도 3분이 훌쩍 지났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진 지 오래. 태호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렸다. 그사이에도 놈들의 공격은 더욱 강해졌다. 태호의 주먹에 동료가 쓰러지자 진짜로 화가 난 것 같았다.
“죽여!”
놈들의 공격이 더욱 거칠어지려는 찰나였다.
“이 새끼들, 뭐야?”
뒤에서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혜성이었다. 태호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어 막내의 집에 가던 도중에 뜻밖의 상황을 목격한 것이다.
그는 달려가던 탄력을 이용해 높이 뛰어올라 두 놈을 걷어찼다.
콰쾅, 기습을 받은 둘은 비명도 못 지르고 골목의 벽에 처박혔다.
“이게 뭐야?”
혜성은 태호를 벽에 기대 앉히고 낯선 사내들을 둘러봤다. 그도 상대가 능력자들임을 직감했다. 태호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아직 세 놈이 남아 있었다.
“나도 몰라. 아무래도 날 노린 것 같아.”
태호는 김연우를 먼저 살피며 대답했다. 다행히 그녀는 조금 놀랐을 뿐, 다친 곳은 없었다.
“블랙? 아니면 지하 마켓인가?”
혜성은 눈에 불을 켜고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숱한 실전을 겪은 A급 능력자였다. 어설픈 B급 몇 명이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퍼퍼퍽. 시원한 매타작이 있은 뒤, 놈들은 부상자들을 부축해 절뚝거리며 물러났다.
“두고 보자, 이 새끼들!”
물론 도망치는 와중에도 불량배다운 마무리는 잊지 않았다. 혜성은 놈들을 쫓으려다가 멈췄다. 놈들의 유인일 수도 있었다. 태호와 김연우를 보호하는 게 먼저였다.
“야, 이게 뭐야? 계획하고 다르잖아?”
혜성은 태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물론 여기서 그가 말한 ‘계획’은 고백이었다.
“괜찮으십니까?”
혜성은 김연우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다친 곳은 없었지만, 그녀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계획?”
그녀는 혜성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표정이 굳어졌다.
“이 시간에 막내를 만나러 올 리는 없고. 혹시 절 몰래 따라다닌 건가요?”
그녀는 혜성과 태호를 교대로 바라보며 물었다. 말투가 차가웠다. 혜성이 말한 ‘계획’을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연약한 여주인공이 불량배들한테 둘러싸인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 왕자님처럼 남자 주인공이 짠하고 나타나서 여주인공을 구한다. 물론 여기서 여주인공은 김연우, 왕자님은 혜성, 태호는 위험을 강조하기 위한 조연이었다.
아침 드라마에서 지겹도록 써먹은 레퍼토리였다.
“네?”
혜성은 할 말을 잊고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맞죠? 제게 이상한 마음을 품은 거죠?”
그녀는 혜성의 반응을 보고 자신의 추측을 확신했다.
“이상한 마음이라뇨?”
혜성은 황당하며 되물었다.
- 우리 누나는 정말 주책이에요. 특히 이상한 소설이나 드라마를 진짜라고 생각한다니까요. 대체 언제 철이 들려는지. 쯧쯧.
그는 언젠가 들었던 막내의 푸념을 떠올렸다. 이대로라면 김연우의 오해는 더 깊어질 터. 일이 커지기 전에 싹을 잘라야 했다.
“저 만나는 여자 있습니다.”
혜성은 얼떨결에 큰 소리로 외쳤다. 물론 되는 대로 지껄인 거짓말이었다.
“거짓말. 만나는 여자 없는 거 알아요.”
“정말입니다.”
“그게 누군데요?”
김연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혜성을 째려봤다. 어느새 다가온 태호도 놀란 표정으로 혜성을 바라봤다.
“그건…… 강지영. 강지영 씨를 사랑합니다!”
혜성은 최근 만난 여자 중에서 모두가 아는 이름을 대답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태호는 눈만 끔뻑거렸고, 김연우는 눈물을 글썽이며 혜성을 쳐다봤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서 방영되는 아침 드라마에는 느닷없이 반전이 나오고 있었다.
두 명의 사랑을 받는 여주인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국민 영웅과 순정파의 가면을 쓴 두 사내가 그녀를 갖고 노는 이야기였다.
“나쁜 놈!”
김연우는 따귀라도 때리려는지 손을 들었다가 멈칫했다. 차마 혜성의 얼굴에 손을 댈 수 없었다.
“연우 씨. 지금 뭔가 큰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태호가 뒤늦게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변명은 집어치워요!”
짝, 그녀는 태호의 뺨을 때리고 골목 안으로 뛰어갔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혜성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연우 씨.”
태호는 부어오른 뺨을 쓰다듬으며 그녀가 뛰어간 곳을 쳐다봤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인 걸까? 드라마라고 하기엔 웃기고, 시트콤이라고 하기엔 심각한 분위기였다.
***
5분 전.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동네 두 바퀴, 오늘은 장안동 주택가를……”
중년의 BJ는 핸드폰으로 주위를 비추며 차분한 목소리로 멘트를 날렸다.
사람들이 흔히 지나치기 쉬운 동네의 구석구석을 소개하는 일상물이었다. 늦은 시각. 20명의 시청자도 꾸벅꾸벅 졸다가 가끔 성의 없는 채팅을 올렸다.
그가 놀이터를 지나 으슥한 골목을 지날 때였다.
“여어. 그림 좋은데?”
어디선가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한둘이 아니었다.
“뭘까요? 범죄의 현장일까요?”
BJ의 호흡이 가빠졌다.
- 뭐 해? 빨리 가 봐.
- 가서 중계하면 오만 원 쏜다.
졸던 시청자들도 정신이 번쩍 들어 채팅창에 글을 올렸다.
“여러분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BJ는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속삭인 뒤 뒤꿈치를 들고 소리가 난 곳으로 걸어갔다. 물론 검지를 입술에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골목에서는 무섭게 생긴 사내 열 명이 한 쌍의 남녀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는 포위당한 남자를 클로즈업했다.
‘누구였더라? 어디서 많이 봤는데?’
아, BJ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이름이 태호였던가? 이혜성 군단의 일원. 안경의 성자라 불리는 치료사였다.
장르가 바뀌었다. 소소한 일상물에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액션 활극으로.
몇 마디 고성이 오간 뒤, 태호와 불량배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역시 이혜성의 오른팔. 태호는 호리호리한 체격과 달리 싸움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수십 초 만에 불량배 다섯이 쓰러졌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연우 씨 빨리……”
태호가 여자에게 잠깐 한눈판 순간, 불량배들의 주먹이 쏟아졌다. 그는 무방비로 얻어맞고 비틀거렸다.
‘신고해야 하나?’
BJ가 다른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던 때였다.
“이 새끼들, 뭐야?”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어두운 조명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체형과 목소리는 무척 익숙했다. 국민 영웅, 이혜성이었다.
- 야, 정말 이혜성이 뜬 거야?
- 채널 고정! 찍새야, 더 가까이 가 봐!
채팅창에 난리가 났다. 시청자들끼리 좌표를 공유하고 있는지, 시청자가 순식간에 천 명이 됐다.
BJ는 그들에게 좀 더 다가갔다. 그들은 심각한 대화에 빠져 그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다. 혜성은 여자의 앞에서 쩔쩔매다가 크게 외쳤다.
“강지영. 강지영 씨를 사랑합니다!”
혜성의 공개 선언.
채팅창이 일순 조용해졌다. 그러나 몇 초 후, 수백 개의 채팅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시청자 수도 단숨에 만 명을 돌파. 기하급수적으로 계속 늘어났다.
‘이혜성과 강지영이 사귄다고?’
BJ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소리 죽여 환호했다. 대박 중의 대박. 벌써 돈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