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9. 아마 사랑인가 봐 (1)
63스퀘어 로비 중앙.
‘어떻게 됐지?’
막내를 비롯한 모두는 조마조마하게 빛을 바라봤다.
“성공인가?”
막내는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급히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끝이다.’, ‘잘 가라’ 등의 대사를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적이 되살아나는 클리셰가 떠오른 것이다.
쿵, 잠시 후 누군가가 썩은 나무처럼 뒤로 넘어갔다. 시체처럼 안색이 창백한 만병귀였다.
순간적으로 강한 충격파를 받은 탓에 전신의 혈관이 지렁이처럼 돋아 있었다. 즉사. 가루가 되진 않았지만, 그의 가슴은 더 이상 위아래로 움직이지 않았다.
“형!”
“선배님!”
막내와 한수호는 혜성을 향해 걸어갔다. 힘이 없어 비틀거렸지만,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혜성도 상태는 좋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휘청거리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각성의 징후는 시나브로 옅어졌고, 암흑의 수호자도 본래의 정장 형태로 돌아갔다.
“아이고, 죽겠다.”
이젠 손가락 하나 까딱일 힘도 없었다. 마지막에 강지영과 한수은이 전력을 다한 공격을 온몸으로 받은 터. 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만약 일 대 일 싸움이라면 널 꺾지 못했겠지. 하지만 이건 비무가 아니라 목숨을 건 전투잖아? 3:1이든 뭐든 이기는 놈이 장땡이지.”
혜성은 쓰러진 만병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홀가분했다. 언리미티드 때부터 이어진 악연을 끊은 느낌이었다.
잠시 후, 결계가 풀어지고 다른 요원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놈이 쓰러지자 결계도 자연스럽게 풀린 모양이었다.
“고맙습……”
혜성은 강지영과 한수은을 돌아보려다가 멈칫했다. 둘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에 실려 홀연히 사라진 것처럼.
“뭐야? 귀신인가?”
“어디로 간 겁니까?”
막내와 한수호도 홀린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렸다.
둘도 혜성에게 잠깐 정신을 판 순간, 강지영과 한수은을 놓친 것이다. 전에 언리미티드에서 한수은이 혜성을 구출했을 때와 상황이 비슷했다.
- 다시 연락 드리죠.
혜성의 귓가에 강지영의 목소리만 환청처럼 들렸다.
“저기 있다!”
입구 쪽에서 한진영의 고함이 들렸다. 갑옷을 입은 능력자들, 가운을 입은 힐러들, 그리고 큰 카메라를 멘 기자들까지. 한꺼번에 몰려오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 어떻게 63스퀘어에서……
- 이번에는 거미 여왕을 쓰러뜨린……
- 첫 폭발이 있었을 때……
기자들은 혜성을 에워싸고 질문을 쏟아냈다.
“일단 부상자 치료가 우선입니다.”
요원들이 악을 쓰며 기자들을 떼어놓았다.
“실례하겠습니다.”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전투 보조요원들이 들것을 갖고 들어왔다. 그리곤 만병귀를 들것에 싣고 하얀 천으로 몸을 덮었다. 놈의 손에 들린 단검 두 자루도 같이 실렸다.
이윽고 그들이 다시 들것을 들고 일어난 순간, 우연히 천이 살짝 흘러내려 들것에 찍힌 마크가 보였다.
[LK 로직스]
보조요원들은 천으로 마크를 가리고 유유히 로비를 빠져나갔다.
부상자 치료, 빌딩 수색 등. 다들 테러 직후의 수습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의례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보조요원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혜성마저도 보조요원들을 힐끔 쳐다보곤 관심을 거뒀다.
단 한 명. 국장인 한진영을 제외하고.
‘저 새끼들인가?’
한진영은 보조요원들을 힐끔 돌아본 뒤, 어금니를 깨물며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관리했다.
***
다음 날, 병원 진료실.
“반사의 위력을 증폭하기 위해 일부러 데미지를 받다니…… 정말 막 나가는구나.”
태호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혜성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만신창이가 돼 병원에 실려 왔다. 그는 이제 욕도 나오지 않았다.
“네가 치료해 줄 거라고 믿었으니까.”
혜성은 침대에 누운 채 엄지를 척 올렸다.
63스퀘어에서 실려 온 지 정확히 20시간 뒤. 눈에 띄는 외상은 대부분 치료된 상태였다. 혈색도 정상이었고, 겉으로 드러난 수치도 모두 정상이었다.
“아무튼 한층 더 성장했네. 뭐, 자세한 결과는 조금 기다려봐야겠지만.”
태호는 혜성의 능력치 검사 결과를 간단히 설명했다.
EF 3,000. 특히 EF의 사용에 관한 항목은 A 등급이었다. 이 정도면 전에 만났던 해골 병사의 공격에는 2차 각성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수혁하고 만병귀한테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나?”
혜성은 태호의 말을 곱씹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의 목표였던 순직이 점점 산으로 가는 느낌이었다.
“근데 넌 안 가냐?”
태호가 구석으로 시선을 돌려 물었다.
문가에는 한수호가 작은 간이 의자에 불편하게 앉아 있었다.
“한 국장님 특별 지시입니다. 오늘부터 막내 선배님과 저, 최소한 둘 중 하나는 혜성 선배님과 꼭 붙어 있어야 합니다. ‘이혜성은 사건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으니, 잠시도 틈을 주면 안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녀석이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국장의 묵직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
“잠깐 밖에 좀 나가 있을래? 태호하고 사적으로 할 말이 있어서.”
혜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한수호에게 말했다.
“하지만 국장님 지시사항이라……”
“잠깐이면 돼. 밖에서 기다리면 되잖아.”
“알겠습니다.”
한수호는 혜성과 태호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민하다가 진료실에서 나갔다.
“어떻게 할 거냐?”
녀석이 문을 나서자마자, 혜성은 태호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뭘?”
태호는 안경을 벗어 가운으로 닦으며 의뭉스럽게 되물었다.
“뭐긴. 연우 씨하고 관계 말이지.”
“사실 나도 그날 막내의 생각은 대충 짐작했다. 나와 연우 씨의 관계, 그리고 내가 연우 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었겠지. 늘 티격태격해도 남매니까.”
“잘 아네.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친구도 아니고. 애들처럼 썸이냐? 그래서 결론이 뭐야?”
혜성은 웃음을 거두고 태호를 쳐다봤다.
“나, 진지해. 연우 씨하고 계속 잘 만나고 싶어. 다만……”
태호는 한숨을 내쉬며 말끝을 흐렸다.
“사내자식이 뭘 망설여? 남자는 화끈하게 직진이지. 연우 씨도 너 마음에 들어 하잖아?”
혜성은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혜성도 그렇지만, 태호도 답답한 숙맥이었다. 첫 연애인데 하필이면 그 상대가 지인의 누나. 데이트할 때 말 하나에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동생한테 들킨 게 마음에 걸리나 봐.”
“으이구. 언제 다시 만나냐?”
“안 그래도 오늘 저녁에 잠깐 만나기로 했거든. 그때 진지하게 말해볼 생각이야.”
태호는 머뭇거리다가 계획을 털어놓았다.
먼저 근사한 곳에서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기 전, 미리 준비한 작은 목걸이를 주며 고백한다. 우리도 다른 연인처럼 진지하게 만나 보자고. 반지는 괜히 부담스러워할까 봐 목걸이를 선택했다는 것도 덧붙였다.
“흠. 괜찮긴 한데. 너무 무난한데. 임팩트가 없어, 임팩트가.”
“맞아. 내 생각도 그래. 뭔가 특별한 게 없을까?”
둘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태호는 혜성이 제일 믿고 의지하는 친구였다. 죽기 전에 녀석의 결혼식은 꼭 가고 싶었다.
하지만 혜성도 마지막 연애가 언젠지 가물가물했다. 딱히 좋은 아이디어가 없었다.
그때, 병실 밖.
‘아이고 답답해. 싸울 때는 그렇게 무식하게 직진하더니, 연애는 왜 그 모양이야?’
한수호는 귀를 쫑긋 세우고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체구는 중학생처럼 작았지만, 녀석도 알 건 다 아는 나이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내가 두 분을 도와드려야지.”
녀석은 병원 복도를 서성이며 턱을 쓰다듬고 생각했다.
불현듯 뭔가가 떠올랐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태호가 김연우를 데려다줄 때, 깡패들이 건들거리며 등장한다. 그럼 태호가 김연우를 보호하며 멋지게 깡패들을 물리치고, 김연우는 이에 감동해서 태호의 품에 안긴다. 그리고 러브.
“오늘 만난다고 했지?”
한수호는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어설픈 깡패는 안 됐다. 일단 신촌에서 봤듯이 태호도 싸움에 능숙했고, 김연우도 능력자 동생을 둔 덕분에 싸움을 보는 눈이 있었다.
치열하게 싸운 끝에 태호가 간신히 이길 정도로 밸런스를 맞춰야 했다. 싸우는 과정에서 태호가 입술이 터지거나 코피라도 흘리면, 김연우의 감동은 배가 될 것 같았다.
“그래. 이왕 할 거면 어지간한 깡패들로는 안 되지.”
녀석은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검색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카데미에서 친하게 지내던 선배였다. 선배는 NSA에서 의무 복무를 한 뒤, 지금은 작은 길드의 부팀장으로 있었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저 한수호입니다. 잘 지내시죠? …… 네, 네. 다름이 아니라, 부탁 좀 드리려고요. 선배님 길드에 싸움 좀 하는 사람들 있습니까? B급 정도로요. 한 5명? 인상이 험악하면 더 좋고요. 참, 이건 비밀인 거 아시죠?”
한수호는 목소리를 낮춰 뭔가를 길게 설명했다.
“오케이. 완벽해. 오늘은 태호 형을 주연으로 영화 한 편 찍어볼까?”
녀석은 진료실을 바라보며 히죽거렸다.
***
NSA 본부 사무실.
막내는 안경을 쓴 채 컴퓨터와 씨름하고 있었다. 63스퀘어 사건의 보고서를 쓰는 중이었다.
혜성은 사건이 끝나면 언제나 만신창이가 돼 병원에 실려 갔다. 그래서 골치 아픈 뒤처리나 서류 작업은 항상 그의 몫이었다. 물론 그도 혜성의 격전을 바로 옆에서 봤기 때문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아, 머리 아파.”
녀석은 타자를 멈추고 짜증을 부렸다.
보고서가 잔뜩 밀려 있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누나와 태호였다.
“태호 형이야 나도 대환영인데. 문제는 누나란 말이지. 지금이야 호감을 느끼고 있지만, 그 변덕쟁이가 또 언제 돌아설지 모르잖아. 그동안 매형 될 사람이라고 데려온 남자가 한둘도 아니고.”
막내는 등을 뒤로 젖히며 곰곰이 생각했다.
인물도 그 정도면 나쁘진 않고. 성실하고 직업도 좋고. 그가 생각하기에 태호는 일등 신랑감이었다. 누나가 변덕을 부리기 전에 확실히 매듭을 지어주고 싶었다.
“잠깐? 누나가 오늘 친구하고 저녁 먹는다고 했지? 혹시 그거 태호 형 아냐?”
막내는 아침에 누나와 엄마의 대화를 떠올렸다. 대충 얼버무렸지만, 누나는 분명 태호를 만나는 눈치였다.
“그래. 그거야!”
딱, 그는 엄지와 중지를 튕기며 히죽 웃었다.
좋은 계획이 생각났다. 깡패, 남자친구의 분투, 여자의 감동으로 마무리되는 고전적인 레퍼토리였다. 좀 유치하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원래 연애란 유치해야 제맛이었다.
“태호 형도 보통은 아니니까 확실히 해야겠지?”
막내는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NSA에서 복무하다가 사설 길드로 빠진 후배 녀석이었다. 지금은 부팀장으로 밑에 있는 애들도 많다고 했다.
“야, 밑에 있는 애 중에 인상 더럽고 좀 놀던 애들 있지? 오늘 네 애들 좀 빌릴 수 있냐? …… 어, 그래. B급으로 5명 정도면 될 거야. 위치하고 시간은 내가 이따 메신저로 찍어줄게. 아, 그리고 이거 비밀인 거 알지?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말하지 마라.”
그는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신신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
“누나 시집 보내는 것도 더럽게 힘드네.”
막내는 히죽 웃으며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고민을 해결한 덕분일까? 갑자기 보고서가 술술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