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78화 (78/150)

# 078. 만병귀 (3)

“으으.”

막내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물에 젖은 솜처럼 사지가 무거웠다. 여기가 어딘지, 자신이 왜 힘이 없는 건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서히 의식이 또렷해졌다. 누군가 깊은 수렁에서 자신을 꺼내주는 것 같았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로비 근처 비상구.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등에 손바닥을 붙이고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었다.

‘혜성이 형!’

어느 순간, 그의 머릿속은 형광등이 켜진 것처럼 환해졌다.

혜성 대 만병귀.

로비 중앙에서는 둘의 대결이 한창이었다.

파팟, 둘은 잔상을 만들며 빠르게 교차를 반복했다.

- 끄아아아!

둘의 옆에는 거대한 거미 여왕이 서 있었다. 다만 산란 직전인 탓인지 독액 외에는 별로 힘을 못 쓰고 있었다. 하긴, 인간으로 치면 만삭에 애가 나오기 직전인 셈이었다.

‘젠장. 뭐가 저렇게 빨라?’

막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둘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둘 다 장단점이 극명했다.

만병귀는 두 개의 무기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뛰어난 체술이 장기였다. 반면 혜성은 변형 무기가 하나뿐이었지만, 2차 각성을 통해 상대보다 스피드와 민첩성 등의 기본 능력이 뛰어났다. 막상막하. 어느 쪽이든 쉽게 우세를 점할 수 없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가 막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였다.

“움직이지 마세요. 이제부턴 우리가 나설 테니까.”

뒤에서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여자의 목소리. 하지만 어디서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우리?’

막내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의문은 곧 풀렸다.

탕탕, 연달아 총성이 들린 뒤 비상구 쪽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로비로 튀어 나갔다. 검과 총을 하나씩 든 여자들. 강지영과 한수은이었다.

물론 막내는 둘이 누군지 몰랐다. 혜성을 뒤에서 돕는 조직이 있다는 것만 막연히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 조직의 일원으로 추측할 뿐이었다.

삐빅, 손목의 스마트 워치가 숨 가쁘게 울어댔다. 남은 시간은 3분 남짓. 가까운 공군기지에서 폭격기가 출발했다는 신호였다.

“선배님.”

옆에서 한수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녀석도 곧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벽에 기대서서 로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로비에서는 네 명의 그림자가 빠르게 교차하고 있었다. 벼락같은 총성, 연검의 서늘한 기운, 대검의 묵직한 기운이 멀리 떨어진 비상구까지 전해졌다.

“이 년들이!”

만병귀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없……”

막내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급하게 외치려는 순간이었다.

파팟, 좌우에서 강지영과 한수은이 동시에 만병귀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무리 만병귀라도 숫자로 밀어붙이는 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놈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때 혜성이 만병귀를 지나쳐 거미 여왕의 아래로 슬라이딩하듯 미끄러졌다. 새끼 거미들로 꿈틀거리는 놈의 거대한 아랫배가 보였다. 그는 아랫배에 대검을 박아 넣고 그대로 배를 갈랐다.

파앗, 독성이 담긴 녹색 피가 분수처럼 터졌다. 암흑의 수호자가 즉시 혜성의 얼굴을 비롯해 상체의 맨살을 보호하는 형태로 변했다.

- 끼에에엑!

거미 여왕의 고통에 찬 울음이 길게 울려 퍼졌다.

“됐다!”

막내는 주먹을 움켜쥐고 환호했다. 갑자기 소리를 지른 탓에 일시적인 어지럼증이 왔다.

“제길.”

그는 벽을 짚고 서서 스마트 워치로 본부에 무전을 보냈다.

“여기는 아기 양. 여왕을 죽였다. 다시 한번 말한다. 여왕을……”

***

통제 본부.

요원들 대부분이 철수한 상태라 휑했다. 한진영과 김준수를 비롯한 몇 명만 남아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폭탄이 터지면 여기까지 충격파가 올 겁니다.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

요원 하나가 재촉했지만, 한진영은 못내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그때였다.

“그렇지!”

본부 전체가 떠나갈 듯 큰 함성이 터졌다. 여자 둘이 만병귀를 묶어둔 사이, 혜성이 단숨에 거미 여왕의 배를 가른 것이다. 이제 남은 건 3 : 1로 만병귀를 잡는 것뿐.

- ……여왕이 죽었다. 다시 한번……

막내의 환호에 찬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한진영은 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위기 상황 해제! 어미 독수리는 철수, 철수하라! 반복한…… 뭐야?”

그는 무전을 보내다가 멈칫했다. 통제실도 돌연 시간이 멈춘 것처럼 조용해졌다.

만병귀는 검을 크게 휘둘러 혜성을 거미 여왕에게서 떨어뜨려 놓았다. 그다음.

놈은 비틀거리는 거미 여왕에게 다가가 돌연 거미 여왕의 심장에 대검을 박아 넣었다. 그리곤 거미 여왕의 보라색 핵을 꺼내 그대로 삼켰다.

“저, 저 미친 새끼?”

“지금 뭘 먹은 거야?”

김준수를 비롯한 다른 요원들도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 크아아!

모니터 속의 만병귀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포효했다.

퍼펑, CCTV가 놈의 기운에 휘말렸는지 폭발했다.

삐-익, 모니터의 화면이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한진영은 멍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렸다.

***

63스퀘어 로비 중앙.

혜성과 강지영, 한수은은 만병귀를 중심으로 삼각형 대형을 만들었다.

“끄아아아!”

만병귀는 눈에 흰자위를 드러내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포효했다. 사람이 아닌 몬스터의 울음이었다. 놈의 아래에는 거미 여왕이 가슴에서 피를 콸콸 쏟아내며 서서히 재가 되어 바스러지고 있었다.

“뭘 가만히 보고 있어요?”

강지영이 한 박자 늦게 놈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쾅, 에너지를 잔뜩 주입한 탓에 대포처럼 묵직한 탄환이 나갔다.

“젠장!”

혜성과 한수은도 동시에 큰 동작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만병귀의 주위에 서린 보라색 빛이 강해졌다.

부웅, 둘의 공격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보라색 빛에 흡수됐다.

“에너지 무효화?”

혜성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그 이름처럼 일시적으로 상대의 공격을 무효화하는 거미 여왕의 스킬이었다. 다만 거미 여왕은 산란을 앞두고 있어 스킬 사용에 제약이 많았는데, 산란이 필요 없는 만병귀는 에너지 무효화를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에너지 계통의 원거리 공격은 안 통할 거예요.”

“물리나 속성을 이용해 놈의 몸에 직접 타격을 줘야 해요.”

강지영과 한수은이 동시에 외쳤다.

몇 초 후, 놈의 포효가 멈췄다.

“이 짓까진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만병귀는 정면의 혜성을 노려보며 피식 웃었다. 보라색 눈동자,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몬스터의 기운. 형태는 다르지만 사령이나 총괄 매니저와 유사한 분위기였다.

놈이 자세를 갖추기 전, 혜성은 정면에서 높이 뛰어올라 대검을 수직으로 휘둘렀다. 놈의 정수리를 반으로 쪼갤 듯한 기세였다. 동시에 강지영과 한수은도 대각선 좌우에서 달려들며 공격을 재개했다.

“흥!”

놈은 코웃음 치며 제자리에서 발을 살짝 굴렀다.

바닥이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짐과 동시에, 갈라진 틈에서 하얀빛이 뿜어졌다. 강지영과 한수은의 움직임이 슬로 모션처럼 느려졌다. 마치 진짜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이어서 놈은 양손의 무기를 평범한 검으로 바꿔 십자로 교차했다.

챙, 혜성의 대검은 놈의 첫 번째 검기에 막혀 튕겨 나갔다. 곧바로 놈의 두 번째 검기가 혜성의 얼굴을 덮쳤다.

“제길.”

혜성은 대검을 거두고 공중에서 몸을 옆으로 비틀어 물러났다.

타탕, 금속성이 들렸다. 강지영과 한수은의 검이 동시에 놈의 정수리를 강타한 것이다. 하지만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야? 이 정도였어?”

만병귀는 간지럽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까닥였다.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체술에 스피드 디버프의 거미줄, 그리고 엄청난 체력까지.

“이제 4라운드인가?”

놈은 혜성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

혜성은 유수혁을 떠올렸다. 짧은 시간에 몬스터의 힘을 흡수한 데 따른 부작용, 폭주가 생각났다. 결론은 속전속결.

“두 사람. 저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혜성은 손가락을 몇 번 접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신호를 보냈다. NSA의 특수팀에서 사용하는 암호였다.

“지금 뭘 하는 거냐?”

당연히 만병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강지영과 한수은은 곧 반응했다. 둘은 검지로 관자놀이를 두 번 툭툭 쳤다. 정말이냐고 되묻는 신호였다. 혜성은 굳은 표정으로 만병귀를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군요.”

“완전히 미쳤군요.”

강지영과 한수은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혜성의 고집은 둘도 잘 알고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혜성은 손을 들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작전 개시.

먼저 한수은이 좌우로 놈을 현혹하며 빠르게 움직였다. 만병귀는 당연히 오른발을 굴러 바닥에 거미줄을 깔았다.

그사이 강지영이 혜성을 향해 수인을 맺고 버프를 걸었다.

“간닷!”

혜성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차분한 느낌의 3차 각성이었다. 암흑의 수호자는 목과 머리 등 즉사 위험이 있는 부위를 보호하는 형태로 변형됐다.

“흥! 겨우 생각한 게 3차 각성이냐?”

만병귀는 차갑게 비웃었다.

지금 혜성은 유수혁에게 3차 각성을 썼을 때보다 누적 데미지가 부족했다. 그리고 만병귀의 방어력은 유수혁의 갑옷보다 한 수 위였다. 이래선 반사를 한다고 해도 만병귀의 강철 같은 방어력에 막힐 게 뻔했다.

혜성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만병귀를 향해 돌진했다. 그는 만병귀의 스피드를 증폭해서 카피한 상태. 거기에 강지영의 버프까지 받으니, 거미줄을 뚫고 단숨에 만병귀에게 접근했다.

“같이 죽자!”

혜성은 돌연 놈을 세게 끌어안았다. 놈의 역한 체취가 느껴졌다.

“이 미친놈!”

만병귀는 무기를 단검의 형태로 바꿔 혜성의 목 좌우에 갖다 댔다. 혜성에게 추가 데미지를 주지 않고 단숨에 목을 자르려는 의도였다.

암흑의 수호자도 놈의 공격에 반응해 변형됐다. 목과 머리 등의 주요 급소를 이중으로 보호하는 형태였다.

끼끼끽!

막으려는 수호자와 자르려는 단검 사이에서 검은 불꽃이 튀었다.

암흑의 수호자도 유니크 등급이지만, 놈의 무기도 이에 못지않은 특수 아이템이었다. 게다가 만병귀의 무기는 두 개. 점점 암흑의 수호자가 만든 보호막이 약해졌다.

고오오, 거미줄 밖에서 강력한 기공이 느껴졌다. 강지영과 한수은이었다. 둘은 권총에 대포알처럼 큰 강기를 맺었다.

“데미지 반사에 둘의 공격까지 더하려는 건가? 에너지 계통의 공격은 소용없다고 했을 텐데?”

만병귀는 둘을 힐끔 쳐다보며 비웃었다.

그때였다.

“왜 자꾸 헛다리만 짚어? 몬스터를 흡수하더니 대가리도 몬스터가 됐냐?”

혜성이 고개를 들고 씨익 웃었다.

“뭐?”

만병귀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강지영과 한수은이 회심의 일격을 발사했다.

쾅, 대기의 진동이 총구를 중심으로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만병귀가 아니었다. 둘의 타깃은 혜성. 동시에 혜성은 등 쪽의 갑옷을 약화시켰다.

콰쾅, 둘의 공격은 그대로 혜성의 등을 강타했다.

“크헉!”

혜성은 피를 토하며 크게 휘청거렸다. 척추가 뽑히는 줄 알았다.

“이 미친 새끼!”

그제야 만병귀는 깨달았다. 왜 같은 편인 강지영과 한수은마저 고개를 저었는지.

혜성은 유수혁과 싸울 때보다 훨씬 성장한 상태. 따라서 체력과 누적 데미지의 한계치도 전에 비할 바가 못 됐다. 거기에 강지영의 버프까지 한몫 거들고 있었다.

“반사.”

혜성의 손바닥에서 지금까지보다 훨씬 밝은 빛이 뿜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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