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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순직이 힘들다-77화 (77/150)

# 077. 만병귀 (2)

- 세상에 완벽한 병기는 없다.

혜성이 아카데미에서 체술을 배울 때 교관이 강조했던 말이었다. 가령 보편적으로 쓰이는 검도 사용자나 상황에 따라 종류가 천차만별. 중요한 건 어떤 병기를 사용하는가가 아닌,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는가이다.

‘젠장. 최악의 상성이다.’

혜성은 난감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만병귀가 수치로 정의할 수 없는 강함을 지닌 것도 그 때문이었다.

쇄액, 좌측에서 채찍이 바람을 가르며 휘어져 날아왔다. 혜성이 흘리기 위해 상체를 숙인 순간, 채찍은 기다란 봉이 돼 그의 등을 후려쳤다.

“큭!”

혜성은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한편, 놈의 추가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강기를 마구 발사했다.

물론 그런 눈먼 공격에 맞을 리가 없었다. 놈은 뒤로 살짝 움직여 고개를 갸웃하는 것만으로 강기를 가볍게 흘렸다.

‘무기가 될 게 없을까?’

혜성은 빠르게 주위를 훑어봤다.

강기의 발사는 에너지의 소모도 많을뿐더러 연속 사용에 제약이 있었다. 하다못해 단검이라도 한 자루 들고 싶었다.

“어딜 보는 거냐?”

만병귀는 코웃음 치며 다시 그를 밀어붙였다. 이번엔 변화무쌍의 극치라는 삼절곤. 맨손의 혜성에게는 최악의 상대였다.

‘놈의 예상 경로는?’

혜성이 속으로 다급하게 물었지만, 대수영은 아까부터 감감무소식이었다. 결국 그는 암흑의 수호자에게만 의지해 에너지를 양팔에 집중시키고 가드를 올렸다.

빠악!

“크윽!”

팔뚝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혜성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겨우 막긴 했지만,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만병귀가 그의 팔뚝 위로 타격을 쏟아내려는 찰나였다.

탕탕!

뒤에서 돌연 총성 두 방이 길게 울렸다.

“웬 놈이냐?”

만병귀는 삼절곤으로 총알을 튕겨내고 물러났다.

‘누구지?’

혜성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늘씬한 체형의 여자 둘이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특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혜성은 대번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강지영과 한수은이었다. 오른손엔 흐느적거리는 검을, 왼손엔 특수 권총을 들고 있었다. 한 사람에게 배웠는지 기본자세도 똑같았다.

“밤안개의 제자들인가?”

만병귀는 둘의 무기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기세등등했던 조금 전과 달리 잔뜩 경계하는 눈치였다.

“조심하십시오. 놈은 무기를 자유자재로 변환하는 능력잡니다. 그 이름처럼 모든 무기에 능통한 것 같습니다.”

혜성은 막내와 한수호 쪽으로 슬쩍 움직이며 말했다. 둘은 하얗게 질려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출혈 때문에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태. 당장 치료가 필요했다.

“일단 놈은 제가 어떻게든 막아 보겠습니다. 막내와 수호를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알겠어요.”

강지영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보다 동료를 더 우선시하는 스타일. 혜성의 고집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빨리, 위급한 상태만 넘길게요. 2분만 버텨요.”

한수은도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날 상대하겠다고?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되나?”

만병귀는 셋을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삼절곤은 처음의 장검 형태로 돌아가 양어깨에 걸쳐진 상태였다.

삐익, 놈은 입술을 오므리고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처음엔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런데 강지영이 막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로비가 흔들렸다. 혜성은 비틀거리다가 겨우 중심을 잡았다.

쿠쿠쿠, 아래쪽에서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콘크리트 벽 같은 게 무너지는 소리였다.

콰쾅, 곧 만병귀의 뒤쪽 바닥이 내려앉았다.

“뭐야?”

혜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놈의 뒤쪽을 응시했다.

자욱한 먼지 사이, 바닥에서 거대한 뭔가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하체는 알록달록한 거미였지만, 상반신은 강지영 못지않게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이었다. 높이는 약 4m, 무게는 수백 킬로그램이 넘어 보였다. 로비의 높은 천장도 놈에게는 낮게 느껴졌다.

“거미 여왕?”

혜성은 신음처럼 중얼거리며 놈의 아랫배를 주목했다. 산란 직전인지 아랫배가 볼록했다.

“이래도 너 혼자 버틸 수 있겠어?”

만병귀는 거미 여왕을 돌아보며 재차 히죽 웃었다. 슬쩍 손목을 떨자 수중의 장검이 조금 짧고 가벼운 형태로 변했다. 장검이라기엔 짧고 일반 검이라기엔 긴, 애매한 사이즈였다.

- 끄아악.

거미 여왕이 놈의 웃음에 호응하듯 높고 길게 울어댔다.

혜성은 문득 사령을 떠올렸다. 사령도 던전에서 뱀 인간들을 부하처럼 부렸던 터. 만병귀도 사령처럼 몬스터와 감응하는 능력을 패시브로 지닌 것 같았다.

“새 선수들도 왔고. 2라운드를 시작해볼까?”

만병귀는 검 끝으로 정면의 혜성을 겨누며 자세를 취했다.

***

전투 개시.

양쪽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로비 중앙으로 돌진했다.

퍼엉, 혜성이 놈의 품을 파고들며 강기를 퍼부었다. 일단 강지영과 한수은이 동료들을 치료할 때까지 버티는 게 목적. 그는 기회를 엿보며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하하하핫!”

만병귀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격전이 오히려 재미있는 눈치였다.

놈은 거미 여왕을 잘 활용했다. 놈이 정면에서 혜성과 겨루고, 거미 여왕은 조금 뒤에 서서 입으로 독액과 거미줄을 번갈아 뱉는 패턴이었다. 간혹 혜성이 위험을 무릅쓰고 반격해 밀어붙이면, 놈은 거미 여왕의 크고 육중한 발을 기둥으로 삼아 피했다.

‘야, 인마!’

혜성은 속으로 계속 대수영을 불렀다.

대수영은 아까부터 계속 반응이 없었다. 수다스러운 목소리도 사라진 상태. 대신 내면에서 윙윙거리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뭔가 빠르게 돌아가며 변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암흑의 수호자도 다른 데 정신이 팔린 것처럼 변형이 반 박자씩 늦었다.

‘대수영은 이런 적이 없었는데?’

혜성은 불안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태호가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가 대수영을 얻고 처음으로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후였다.

“아이템이 적의 공격을 예측했다고 했지? 아이템의 기능은 그것만이 아닐 거다. 네가 경험을 쌓고 강해질수록 아이템도 계속 새로운 능력을 보여주겠지.”

아이템의 진화.

그가 막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이었다.

만병귀가 무기를 대도로 바꿔 혜성의 머리를 수직으로 쪼개왔다. 대수영이 없다 보니 피하는 게 더 어려웠다. 혜성은 옆으로 살짝 몸을 틀면서 양손에 에너지를 집중해 머리 위로 올렸다.

‘나도 대검이 있었다면……’

그때였다. 그의 손바닥에서 섬광이 번쩍했다.

챙! 놈의 대도는 쇳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뭐야?”

만병귀의 깜짝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혜성 씨?”

비상구에서 동료들을 치료하던 강지영과 한수은도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제일 많이 놀란 건 당사자인 혜성이었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을 내려다봤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대검이 들려있었다.

- 오래 기다렸지?

대수영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이게 뭐냐?’

- 그동안 강해진 게 너뿐이라고 생각한 거냐?

녀석은 웃음을 참는 듯한 짓궂은 어조로 말했다. 손에 들린 대검도 웃는 것처럼 가볍게 진동했다.

- 내 자의식. 암흑의 수호자의 변환 능력. 그리고 카피캣의 복제 능력. 우리 셋이 하나로 뭉치면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거지. 크크크.

혜성은 만병귀의 손에 들린 대도를 떠올렸다. 대검 형태의 그림자가 슬그머니 대도로 변했다. 외형뿐만 아니라 무게도 달라졌다.

“이거였나?”

그제야 혜성의 입가에도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1 + 1 + 1’을 4나 5로 만드는 것. 능력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을 찾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 자식. 이젠 내 무기도 카피한 거냐?”

정면에서 만병귀의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혜성은 대검의 형태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대검이 제일 손에 익었다.

“자, 3라운드를 시작해볼까?”

그는 대검의 끝으로 만병귀를 겨누며, 조금 전 놈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

63스퀘어 밖, 임시 본부.

“늦어서 죄송합니다. 테러 때문에 일대의 교통이 완전히 마비됐습니다.”

갑옷과 검 등으로 중무장한 능력자들이 들이닥쳤다. 김준수와 백호 길드의 지원군이었다.

“내부 상황은 어떻습니까?”

한진영 등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김준수가 중앙의 모니터를 바라보며 물었다. 모니터에는 CCTV를 통해 혜성과 만병귀, 거미 여왕의 일 대 이 전투가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거미 여왕을 제외하고 다들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에 모니터로는 형체만 흐릿하게 보였다.

“지금 막 이혜성이 이상한 무기를 꺼내 들었네. 시그니처 아이템들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서 하나로 뭉친 것 같아.”

한진영은 혜성의 손에 들린 대검을 주목했다.

“그런데 이 여자들은 누구입니까? 총과 검을 동시에 사용하는 건 분명 밤안개의 스타일인데. 그는 몇 년 전에 죽지 않았습니까?”

김준수는 비상구 쪽의 강지영과 한수은을 눈여겨보며 물었다. 둘의 옆에는 총과 검이 놓여 있었다.

“우리도 몰라. DB에도 없으니까.”

한진영은 자조적인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진입해서 혜성 씨를 돕겠습니다.”

“그건 어렵네. 만병귀라는 놈이 특수 결계를 친 것 같아. 우리 쪽 전문가가 전부 달라붙었지만, 뚫는 데는 10분 이상 걸린다더군.”

“10분이나요?”

김준수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오는 동안 상황을 들어 알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5분 남짓. 거미 여왕이 첫 산란을 시작하면, 그 후에는 새끼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대책은 없습니까?”

“얼마 전에 대 몬스터용으로 개발된 IBX 300이 준비됐네. 전화 한 통이면 성남 공군기지에서 언제든 출격할 거야.”

“IBX 300이요? 그거 이제 갓 배치된 프로토타입 아닙니까?”

김준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IBX 300.

일명 제우스의 뇌전이라 불리는 거대 몬스터용 특수 폭탄이었다. 본래는 시 서펀트처럼 거대한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문제는 그 위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점이었다.

“그거면 몬스터뿐만 아니라 63스퀘어 전체가 초토화될 거야.”

한진영은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가 계속 망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나마 인질들이 대부분 대피한 게 다행이었다.

“남은 시간은 5분 남짓.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옆에 있던 요원 하나가 대답을 재촉했다.

그동안 혜성이 숱한 기적을 보여줬지만, 언제까지 기적에 의지할 수는 없었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서 대비하는 게 한진영의 역할이었다.

김준수도 난감한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할 수 없지.”

잠시 후, 한진영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었다. 통신 요원이 특수 핸드폰을 건넸다. 그는 한 차례 심호흡하고 단축 번호를 눌렀다.

“NSA의 한진영입니다. VIP의 재가는 진즉에 났습니다. 어미 독수리를 보내주십시오.”

폭격기 출격 요청.

김준수를 포함해 주위에 있던 모든 이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잠시 후, 인근의 요원들에게 철수 명령이 하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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