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6. 만병귀 (1)
63스퀘어 동편 출입구.
“들었어? 또 이혜성이라면서?”
검은 옷을 입은 요원이 전망대 쪽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혼자서 거미 여왕을 막겠다니. 미쳤군.”
“그래도 지금은 이혜성밖에 없잖아. 믿어 봐야지.”
다른 둘도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한마디씩 했다.
그들은 갑옷 대신 평범한 전투복을 입은 2급 비전투 요원이었다. 내부에 침입한 전투 요원들을 밖에서 보조하는 한편, 특종에 눈먼 기자나 BJ가 내부에 잠입하는 걸 막는 역할을 했다.
그때였다. 어둠 저편에서 뭔가가 바스락거렸다. 누군가의 발소리였다.
“누구냐?”
그들은 소리가 난 쪽으로 총구를 돌렸다.
골프백을 멘 사내였다. 문제는 그의 손에 들린 시퍼런 장검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경찰이 몇 겹으로 지키고 있는 상황. 그런데 경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거기에 장검까지 들고 있으니 수상한 게 당연했다.
“더 다가오면……”
가운데 선 요원이 말했지만, 그의 말은 여기까지였다.
번쩍, 사내의 손이 움직였다고 느낀 순간, 섬광과 함께 그들의 시간이 멈췄다.
잠시 후, 그들의 목은 툭 하고 동시에 앞으로 떨어졌다.
“멍청한 놈들. 바로 방아쇠를 당겨도 시원찮을 판에 뭘 물어?”
사내는 죽은 자들의 몸에 가래침을 뱉고 지나쳤다.
삐빅. 죽은 자의 손목시계에서 작게 알람이 울렸다. 9시 정각을 알리는 신호였다.
- 끄아아아!
아쿠아리움 쪽에서 몬스터의 울음이 들렸다.
“이 기운. 거미 여왕이군.”
그는 잠깐 걸음을 멈췄다.
블랙의 핵심은 몬스터의 힘을 이용해 능력을 강화하는 것. 그렇기에 같은 몬스터의 힘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혜성은 당연히 위험을 찾아갈 테지.”
그는 히죽 웃으며 지하의 아쿠아리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3분 뒤, 서편 출입구.
퍼퍽, 출입구를 지키던 요원들이 허수아비처럼 쓰러졌다. 이어서 어둠 속에서 트레이닝복을 입은 여자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특수 마스크로 코 아래를 가린 한수은과 강지영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같이 움직이는 게 얼마 만이지?”
강지영은 주위를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요원들은 목덜미 쪽을 강하게 얻어맞고 모두 기절해 있었다.
“옛날 생각나네.”
한수은도 모처럼 웃음기를 머금고 대답했다.
“혜성 씨는 지금 어디 있는지 볼까?”
강지영은 핸드폰을 꺼내 NSA의 내부 네트워크에 접속했다. 이혜성은 비상계단을 통해 지하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가자. 만병귀란 놈은 분명 혜성 씨를 노리고 올 테니까.”
둘은 바람이 스며드는 것처럼 63스퀘어 안으로 사라졌다.
***
“다 왔다!”
혜성은 숨을 몰아쉬며 동편 비상구를 거칠게 열었다.
로비의 천장에서 조명이 위태롭게 깜빡이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첫 폭발이 있자마자 밖으로 대피한 상태였다. 하지만 부서져 흩어진 기물들, 여기저기 널린 핏방울이 폭발 당시의 참상을 대변해 주었다.
[아쿠아리움]
혜성은 표지판을 따라가려다가 멈칫하고 오른쪽을 노려봤다.
“누구냐?”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처음엔 대피하지 못한 시민인가 했지만, 움직임을 보니 아닌 것 같았다. 여유가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시커먼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그는 다짜고짜 왼 주먹을 뻗어 강기를 발사했다.
파팟, 어둠 속에서 빛이 번쩍였다. 동시에 그의 강기는 흔적도 없이 허무하게 소멸했다.
“밖에 있는 멍청이들보다 낫군. 좋은 기습이었어.”
그림자는 손뼉을 치며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골프백을 멘 훤칠한 사내였다.
“만병귀?”
젠장. 혜성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몇 걸음 물러섰다.
상대가 두려운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지하에 거미 여왕이 있는 터. 폭격까지 남은 시간은 8분 남짓이었다.
만병귀의 시선이 문득 혜성의 가슴으로 향했다. 단추가 풀어진 셔츠 사이로 탄탄한 가슴이 보였다.
놈의 신형이 돌연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깨에 메고 있던 골프백만 바닥에 남긴 채.
혜성은 반사적으로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파앗, 그의 가슴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그는 옆으로 몇 바퀴를 구른 뒤 기둥에 부딪혔다.
“오? 그걸 피했어? 2차 각성도 안 하고 말이야. EF를 호신강기처럼 사용한 건가?”
만병귀는 조금 전 그의 위치에 서서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제길.”
혜성은 기둥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정말 빠르다.’
혜성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만약 그동안의 전투로 강해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영문도 모르고 죽었을 것이다.
파팟, 다시 놈의 신형이 사라졌다. 혜성은 급히 상체를 숙였다.
파앗, 왼쪽 어깨에서 피가 뿜어졌다.
“크윽.”
혜성은 볼썽사납게 몸을 날렸다. 생각도 하지 않고 움직인 것이었지만, 허벅지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강하다!’
혜성은 놈의 실력을 직감했다.
최소 AAA급. 한 방의 위력은 없었지만, 스피드만큼은 유수혁을 능가하는 것 같았다.
‘목!’
혜성은 서늘한 기운이 정면에서 찔러오는 걸 느꼈다. 물론 놈의 움직임은 아직 흐릿한 잔상으로만 보였다. 그는 상체를 뒤로 젖혀 놈의 장검을 흘렸다.
속임수였다.
쾅, 혜성은 놈에게 걷어차여 10여 미터를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자세를 바로잡을 틈도 없이 놈의 공격이 머리 위에서 느껴졌다.
‘젠장!’
혜성은 양손에 강기를 집중해 방패처럼 넓게 만들었다.
콰콰쾅, 놈은 힘으로 찍어 누르려는 듯 방패 위로 검기를 쏟아냈다.
“컥!”
혜성은 핏물을 한 모금 토해냈다. 방패 때문에 치명상은 면했지만, 검에 실린 힘은 고스란히 그에게 전달됐다.
놈이 장검을 머리 높이 치켜들고 일격을 날리려던 찰나였다. 혜성의 머릿속에서 뭔가 툭 하고 끊어졌다.
“드디어 나왔군.”
돌연 놈은 장검을 어깨에 걸치고 히죽 웃었다.
“이 새끼가.”
혜성은 놈을 노려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2차 각성의 흥분이 전율처럼 퍼지는 가운데, 암흑의 수호자가 일렁이며 온몸을 감쌌다.
“거미 여왕을 위해 아껴두고 싶었는데.”
그는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놈에게 다가갔다.
“나를 상대로 힘을 아끼겠다고?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만병귀는 고개를 저으며 골프백에서 다른 장검을 꺼냈다.
일본 스타일의 이도류. 다만 보통의 이도류가 긴 검과 짧은 검을 하나씩 쓰거나 두 자루 모두 짧은 검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놈은 날이 1.5m가 넘는 장검 두 자루를 사용했다.
시간이 없었다. 남은 건 7분 남짓.
혜성은 놈을 향해 벼락처럼 달려들었다. 이제 보였다. 놈은 좌우의 검을 교차하며 자신을 향해 마주 달려왔다.
- 왼쪽!
대수영이 놈의 공격을 미리 보여줬다. 오른쪽에서 찔러오는 건 페이크였다. 진짜는 그의 왼쪽 겨드랑이를 노리고 대각선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혜성은 몸을 비틀어 왼쪽의 검을 피하며 놈의 품을 파고들려 했다.
“큭!”
페이크라고 여겼던 오른쪽 어깨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암흑의 수호자가 반응할 틈도 없었다. 혜성은 급히 주먹을 거두고 뒷걸음질 쳤다.
파팟, 놈이 기세를 몰아 따라오며 검을 휘둘렀다. 이번엔 왼쪽이 페이크, 오른쪽에서 찔러오는 게 진짜였다. 하지만 왼쪽으로 움직여 피했다고 느낀 순간, 혜성은 왼쪽 어깨에서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역시 암흑의 수호자는 반응하지 못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혜성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에너지를 무리하게 운용해 강기를 마구 발사한 후, 놈을 물러나게 하는 게 고작이었다.
- 이게 뭐지? 이럴 리가 없는데?
대수영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대수영이 헷갈리니 암흑의 수호자도 같이 흔들렸다.
“왜? 예측이 통하지 않아서 놀랐나 보지?”
놈이 장검을 양어깨에 걸치고 비아냥거렸다.
혜성은 박무영은 떠올렸다. SJ에서 처음 만났을 때, 박무영은 번개와 물이라는 상극의 속성을 이용해 그를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놈도 비슷했다. 진짜와 가짜를 오가는 변화무쌍한 체술은 능력치라는 숫자를 뛰어넘은 것이었다.
‘대수영의 예측 범위를 벗어난 실력이라니. 대체 블랙에는 강한 놈들이 얼마나 많은 거지?’
혜성은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간닷!”
만병귀는 제자리에서 폴짝 뛴 후 혜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놈의 장검은 좌우에서 춤을 추며 그를 압박했다.
‘좌? 우?’
혜성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막막했다.
***
만병귀가 양손의 검을 빙빙 돌리며 발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쾅, 비상문이 거칠게 열렸다. 혜성과 만병귀는 동시에 소리가 난 곳을 돌아봤다.
“형!”
“선배님!”
막내와 한수호였다.
2차 각성한 혜성과 장검을 들고 있는 만병귀. 대번 상황 파악이 됐다. 둘은 시선을 교환한 뒤 놈을 향해 몸을 날렸다. ‘놈의 무기는 장검. 그러니 근접전으로 승부를 본다.’라는 계산이었다.
부웅, 예상대로 만병귀의 장검이 수평으로 날아왔다. 막내와 한수호는 상체를 숙여 장검을 흘리고, 각각 좌우에서 만병귀의 품을 파고들었다.
“멈춰!”
혜성이 다급하게 외쳤다.
계속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분명 놈의 별명은 만병귀인 터. 하지만 지금까지 놈이 보여준 건 검술 하나였다. 만약 놈의 특기가 검술 하나라면 만병귀가 아니라 그냥 검귀가 맞지 않을까?
이미 늦었다. 막내와 한수호는 놈의 옆구리를 공격하려던 자세로 우뚝 멈췄다.
“뭐, 뭐야?”
막내는 말을 더듬으며 자신의 가슴을 바라봤다. 명치 바로 아래, 손잡이만 남긴 채 가슴 깊이 박힌 단검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위로 들었다. 단검을 든 만병귀가 하얀 이를 드러낸 채 웃고 있었다.
“언제?”
반대쪽의 한수호도 단검을 내려다보며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안 돼!”
혜성이 비명처럼 크게 외치며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양 주먹에 글러브처럼 큰 강기가 맺혔다.
퍼엉, 강기는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만병귀의 정면을 덮쳤다.
“흥!”
만병귀는 단검을 뽑고 뒤로 슬쩍 물러났다.
그제야 혜성은 알게 됐다. 왜 놈의 별명이 만병귀인지.
놈은 양손의 단검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다음 순간, 두 자루의 단검은 하나로 합쳐져 긴 봉이 됐다. 놈은 계속 물러서는 한편, 봉을 돌려 방패처럼 정면을 보호했다.
퍼퍼펑, 혜성의 공격은 놈의 방어막에 막혀 폭발을 일으켰다.
“괜찮냐?”
혜성은 놈을 쫓지 않고 막내와 한수호를 먼저 살폈다.
둘 다 마지막 순간에 몸을 비틀어 즉사만 면한 상태였다. 출혈이 심한 듯 안색이 창백했다. 둘은 몇 걸음 비틀거리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슨 짓을 한 거냐?”
혜성은 둘의 앞을 막아선 채로 만병귀를 노려보며 물었다.
“급소는 용케 피했군. 그것만으로도 칭찬해주지.”
만병귀는 장난치듯 봉을 빙빙 돌렸다. 봉에서 장창으로, 장창에서 다시 쌍검으로. 놈의 무기는 마술을 부리는 것처럼 시시각각 변했다.
잠시 후, 놈은 길고 짧은 검 두 자루로 무기를 바꿔 검 끝으로 혜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시 인사하지. 나는 코드명 만병귀. 보는 바와 같이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무기를 변형해 싸우는 능력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