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5. 63스퀘어 (4)
63스퀘어 40층.
이곳은 본래 사무 공간으로 쓰이던 곳이었다. 라운지를 겸한 중앙의 엘리베이터 앞 쉼터를 중심으로 좌우로 사무실들이 길게 늘어선 구조였다. 라운지 좌우에는 비상계단과 연결된 철문이 하나씩 있었고, 정면에는 대형 유리창을 통해 탁 트인 한강이 보였다.
보라색 수정, 핵은 라운지 중앙에 둥실 떠 있었다. 최초의 폭발이 있은 전망대에서는 조금 떨어진 위치. 충격의 여파로 주변이 난장판이 되긴 했지만, 위쪽보다는 그나마 온전했다.
“이혜성. 그 미친놈은 반드시 온다.”
총괄 매니저는 핵 옆에 서서 좌우의 비상구를 번갈아 바라봤다.
부하들과 몬스터들은 그를 중심으로 물결처럼 원을 만들며 퍼져 있었다. 통제실 등 주요 거점을 지킬 인력을 제외하고 남은 부하는 이삼십 명 정도. 골렘이 열 마리였다.
다만 섀도 댄서는 피아를 가리지 않고 EF에 반응하는 몬스터였다. 부하들은 섀도 댄서가 잠복한 지점에서 조금 떨어져서 대기했다.
“혹시 이놈이 작전을 바꿔서……”
매니저 하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뭐라고 말하는 도중이었다.
우측 복도 끝.
쾅, 천장의 타일을 걷어차고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혜성이었다.
“놈이다!”
총괄 매니저의 고함과 함께 부하들은 혜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흥!”
혜성은 제자리에서 가볍게 한 번 폴짝 뛴 뒤 부하들을 향해 마주 달렸다.
그는 좌우로 몸을 흔들며 빠르게 상대의 품을 파고들었다.
퍼퍽, 그의 주먹이 명치를 강타할 때마다 테러범들은 입에 게거품을 물고 허리를 새우처럼 굽혔다.
혜성은 비틀거리는 테러범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던져 버렸다. 테러범들이 이가 빠진 것처럼 듬성듬성 서 있는 지점을 향해. 바닥에서 검은 손들이 솟아 나와 혜성이 던진 테러범들을 경쟁적으로 붙잡았다.
역시 B급 테러범들로는 혜성을 당해낼 수 없었다. 사나운 늑대가 순한 양들 사이에서 날뛰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테러범 다섯이 비명도 못 지르고 재가 됐다.
“영악한 놈. 놈을 포위해라!”
총괄 매니저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외쳤다.
혜성의 뒤쪽,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고 다른 테러범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동시에 반대편의 사무실에서도 숨어 있던 테러범들이 혜성을 향해 달려 나왔다.
“이 새끼들. 함정을 판 건가?”
혜성은 주먹을 멈추고 잠시 호흡을 골랐다.
중과부적.
인제 보니 그를 기다리고 있던 테러범은 서른 가까이 됐다. 게다가 느리지만 막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골렘도 열 마리나 나타나 놈들 사이에 합류했다.
“네가 자랑하는 2차 각성은 아직이냐?”
총괄 매니저는 이죽거리며 혜성의 정면으로 다가왔다. 좌우는 사무실로 막혔고, 앞뒤는 부하들이 포위한 상황이었다. 그의 입가에 절로 득의의 미소가 걸렸다.
혜성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걸 기다렸던 눈치였다.
“다들 뭔가 잊고 있는 거 같은데. 나한테는 2차 각성만 있는 게 아니거든.”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셔츠를 풀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의 가슴과 허리가 유독 볼록했다. 마치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씨발!”
“저, 저 미친 새끼.”
총괄 매니저와 부하들의 얼굴이 일제히 굳어졌다.
혜성의 심장에는 그들이 사용했던 폭탄이 특수 케이블로 연결돼 있었다. 이미 활성화된 상태. 그가 사전에 세팅한 시간이 되거나 그의 심장 박동이 멈추면 폭발하는 구조였다.
동생과 가족이라는 마음의 짐도 던 상태. 그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이거 뭔지 알지? 죽여 봐! 어디 죽여 봐, 이 새끼들아!”
혜성은 가슴을 내밀고 테러범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단숨에 상황이 역전됐다. 테러범들이 오히려 겁에 질려 슬금슬금 물러났다.
***
63 스퀘어, 좌측 비상계단.
막내와 한수호는 나는 듯이 계단을 내려갔다. 한 번에 대여섯 계단씩. 마음이 급했다. 다행히 우려와 달리 적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혜성이 형에게 붙은 건가?”
막내는 고개를 갸웃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혜성이 날뛴 덕분에 양동작전이 된 셈이었다.
“선배님 스타일 아시잖습니까? 무조건 직진.”
한수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40층을 알리는 푯말이 보였다.
“저기다!”
한수호가 먼저 거칠게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막내는 뒤에서 화염의 장막을 쳐 적의 습격에 대비했다.
적의 반응은 없었다. 둘은 반사적으로 라운지 중앙으로 몸을 돌렸다. 중앙의 핵이 제일 먼저 보였다. 혜성이 있는 곳은 반대편. 적에게 앞뒤로 포위당한 상태였다.
“어라?”
막내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셔츠의 단추를 푼 혜성은 죽여보라며 전진하고 있었고, 테러범들은 어쩔 줄 모르며 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혜성이 악당이고, 테러범들이 경찰처럼 좋은 편인 것 같았다.
“또 뭐야?”
총괄 매니저와 테러범들도 반 박자 늦게 놀라며 둘에게 고개를 돌렸다.
“막아!”
부하 몇 명이 뒤늦게 둘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늦었다.
“내 특기가 뭔지 모르나?”
막내는 씨익 웃으며 검지를 들었다. 그의 특기는 원거리 공격.
퍼펑, 그의 검지에서 거대한 화염구가 뻗어 나와 핵을 덮쳤다.
***
“젠장. 쟤들이 여기 왜 나타난 거야?”
혜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핵을 부순 건 좋았지만, 문제는 이미 활성화가 끝난 폭탄이었다. 남은 시간은 약 일 분 남짓. 해제하는 건 불가능했다.
“도망쳐!”
그는 악을 쓰듯 외치며 총괄 매니저를 향해 돌진했다.
혼자 죽을 수는 없다. 총괄 매니저를 끌어안고 그대로 산화하려는 생각이었다.
“형!”
“선배님!”
이맘때면 늘 들리는 외침. 막내와 한수호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렸다.
혜성은 둘을 향해 엄지를 척 올렸다. 문득 피식 웃었다. 뇌전의 광견을 상대했을 때가 떠오른 것이다. 그때도 막내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애타게 불렀다.
‘블랙을 더 데려가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가 회한과 만족이 교차하는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였다.
와장창!
로프에 매달린 검은 복면인들이 창문을 부수고 등장했다. 옥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NSA의 특수팀이었다. 숫자는 12. 혜성을 비롯한 모두는 정지된 것처럼 움찔했다.
과연 특수팀은 달랐다. 그들은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뇌전의 원거리 공격을 감행했다.
“끄아악!”
창가에 있던 테러범들은 곧 바닥을 나뒹굴며 꿈틀거렸다.
“또 시작인가?”
특수팀 중 하나가 오른손을 앞으로 하고 혜성에게 달려왔다. 복면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히죽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부웅, 혜성의 가슴과 연결된 폭탄이 부르르 떨렸다.
‘공간 이동술?’
혜성은 상대가 누군지 직감했다. 아공간으로 폭탄을 날려 보내는 스킬. 공간의 마법사라 불리는 장진우의 특기였다.
‘이것까지 뇌전의 광견 때와 똑같다니.’
혜성은 내심 눈물이 흘렀다.
혜성이 미끼가 돼 적을 한곳에 모은 셈이었다. 특수팀은 바람처럼 테러범들을 제압했다. 남은 건 총괄 매니저 하나.
“배후를 알아야 한다. 생포하라.”
“수고했다. 이제부턴 우리가 맡겠다.”
특수팀은 앞뒤에서 놈을 포위했다. 혜성은 장진우와 시선을 교환한 뒤 우측 비상구 쪽으로 물러섰다.
“다 죽여버리겠어!”
총괄 매니저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혜성과 막내, 한수호, 특수팀을 차례로 돌아봤다.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냥 공격해!”
특수팀원 중 누군가가 뇌전을 쏘려는 찰나였다.
파앗, 놈의 주위에서 눈부신 섬광이 뿜어졌다.
파지직, 한발 늦게 터진 뇌전은 놈의 빛에 먹히듯 사그라들었다.
어디선가 접한 적이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사령?”
혜성은 안색이 창백해져 주춤 물러섰다.
빛 중앙에서 놈의 몸이 점점 커졌다. 거대한 전갈의 하체와 근육질 인간의 상체를 지닌 끔찍한 혼종. 인간과 몬스터의 융합체였다.
“AA급 이상으로 추정된다. 전 대원은 주의하라.”
장진우는 오른손을 활짝 펼쳐 보이며 대원들에게 신호했다. 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놈을 이중으로 포위하는 포메이션을 구축했다.
***
63스퀘어 밖, NSA 임시 본부.
대형 모니터에는 드론을 통해 40층의 상황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장진우의 특수팀과 전갈 인간과의 전투가 막 시작된 참이었다. 혜성은 환풍구로 기어 다니며 적을 상대하느라 기력이 다한 상태. 비상구 쪽에 서서 초조하게 전투를 보고 있었다.
“위쪽은?”
한진영이 영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인질들의 안전은 확보했습니다. 곧 게이트 루프를 열어 대피시키겠습니다.”
“적의 잔당들이 63스퀘어 통제실을 중심으로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습니다. 놈들을 완전히 제압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모니터 아래에 앉아 있는 요원들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보고했다.
“인간과 몬스터의 융합이라니. 미쳤군.”
한진영은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물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때였다.
- 끄아아아!
동시에 어디선가 괴성이 길게 울렸다. 테러가 발생한 직후부터 간헐적으로 들리던 포효였다. 소리의 진원지는 63스퀘어 아래쪽. 다만 시간이 갈수록 울음이 크고 강해졌다.
“분석은 아직인가?”
한진영은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가 움찔하며 요원들을 바라봤다.
“거의 끝났습니다.”
요원 하나가 키보드를 급하게 두드렸다.
모니터에 63스퀘어의 3D 도면이 나타났다. 요원은 지하 쪽을 확대하고 파장의 분석 결과를 모니터 왼쪽에 띄웠다.
“씨발.”
한진영과 모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코드명 ‘헬 게이트’.
거미 여왕이라 불리는 AAA급 몬스터의 파장이었다. 무게가 2톤이 넘고, 강철처럼 단단한 껍질과 맹독을 자랑하는 놈이었다. 놈 자체로도 위험했지만, 특히 왕성한 번식력이 문제였다. 놈은 자가수정하며 끊임없이 번식. 새끼들의 숫자는 5분 단위로 약 3배씩 증가했다.
“개새끼들.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시간을 끈 건가?”
한진영은 그제야 테러범들을 둘러싼 의문이 풀렸다.
테러범들이 특별한 요구를 하지 않은 것. 소극적으로 웅크린 건 다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다.
누군가가 앞으로의 상황을 시뮬레이션해서 모니터에 띄웠다. 거미 여왕과 그 새끼들은 물과 습한 곳을 좋아하는 특성이 있었다. 그리고 63스퀘어는 한강 바로 옆에 있었다. 붉은 점으로 표시된 거미 여왕의 새끼들이 한강을 타고 서울 전역으로 퍼졌다.
“다른 요원들은?”
“현재 전부 인질 구출에 투입된 상태입니다.”
전갈 인간도 필사적이었다. 장진우를 중심으로 한 특수팀이 사방에서 공격을 퍼부었지만, 놈도 압도적인 체력을 바탕으로 버텼다. 적의 잔당도 통제실을 중심으로 단단한 방어라인을 구축, 위로 잠입한 특수팀을 막았다.
“거미 여왕을 막는 게 우선이다. 당장 전 요원들에게 자료 뿌려.”
한진영은 신경질적으로 외치며 다른 요원에게서 핸드폰을 뺏듯이 받아들었다. 그가 막 장진우에게 연락하려는 찰나였다.
- 제가 가겠습니다.
핸드폰이 한 차례 진동하더니 예상과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혜성이었다.
“뭐?”
한진영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 장 팀장님은 적의 두목에게 붙들린 상황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거미 여왕을 상대하겠습니다.
혜성의 음성 너머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이미 지하로 출발한 모양이었다.
“자네 혼자서는 무리야.”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혜성이 목소리를 높여 되물었다.
“그건 그렇지만……”
한진영은 난감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다른 요원들은 적에게 붙들린 상황. 혜성의 말대로 시간이 부족했다.
“이건 시간과의 싸움이야. 자신 있나?”
대답이 없었다. 잠시 후.
- 앞으로 딱 10분. 10분이면 인질들과 다른 요원들이 빠져나가기 충분할 겁니다. 만약 제가 그때까지 거미 여왕을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특수 폭탄이나 미사일을 동원해서라도 지하를 쓸어버려 주십시오.
다시 핸드폰 너머에서 혜성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죽음을 불사하는 결연한 어조였다.
“미쳤어? 63스퀘어를 완전히 무너뜨리라고? 그럼 자네도 같이……”
-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
“뭐? 야, 인마! 이혜성!”
혜성은 NSA의 구호를 외치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 미친놈. 정말 혼자 거미 여왕을 막겠다는 건가?”
한진영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모니터를 주시했다. 혜성의 위치를 알려주는 파란 점이 빠르게 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몰랐다. 마지막으로 NSA의 구호를 외칠 때, 혜성의 눈이 전의로 불타오르고 있는 것을.
‘지하 마켓 새끼들. 블랙과 손을 잡았다고 했지? 블랙과 관계된 놈들은 누구든 가만두지 않겠다!’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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