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2. 63스퀘어 (1)
그날 저녁, 63스퀘어 전망대 커피숍.
“그래,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냐?”
태호는 아메리카노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반은 자포자기한 눈치였다. 옆에 나란히 앉은 김연우도 매섭게 막내를 노려볼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뭐긴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풀 스토리를 듣고 싶은 거지.”
막내는 둘을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물었다. 잔뜩 조바심이 난 눈치였다.
태호는 막내의 옆을 힐끔 바라봤다. 혜성과 한수호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혜성이 그를 향해 놀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까지 피할 거냐? 그냥 사실대로 다 말해라.’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태호는 머뭇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씹다 만 오징어로 시작된 악연.
물론 처음에는 서로에게 호감이 없었다. 반전은 어리바리하게만 보였던 태호가 가짜 혜성과 싸우던 모습을 본 다음.
김연우가 병원에 몇 번 가면서 태호와 인사했고,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발전했다는 내용이었다.
막내는 조금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가 듣고 싶은 건 그런 시시한 내용이 아닌, 태호의 진심이었다. 그는 테이블 아래에서 혜성의 허벅지를 슬쩍 찔렀다.
“좋아. 태호의 첫 여자친구니까 오늘 저녁은 내가 쏜다. 오늘은 삼겹살 같은 거 말고, 여기 레스토랑에서 칼질 좀 하자. 근사한 야경도 감상하면서.”
혜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7시 반이 훌쩍 지나 있었다. 평일이었지만 한창 사람이 몰릴 시간. 커피숍을 나서기에 앞서 먼저 예약 전화를 걸었다.
“오케이. 전망대에서 야경 좀 보다가 레스토랑에 가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네.”
혜성은 막내의 이름으로 예약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망대는 아까보다 더 북적였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헤치고 풍경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여의도 한강 공원과 둔치에 붉은 노을이 깔리고 있었다.
“쑤어이 막.”
어디선가 여학생들의 시끌시끌한 목소리가 들렸다. 성조가 독특한 동남아의 말투였다. 뒤를 돌아보니 태국사람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귀엽네.”
혜성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여학생들은 전망대를 오가며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었다.
“실례합니다. 죄송합니다.”
잠시 후, 여학생 중 하나가 다가와 어색한 한국어로 인사하며 핸드폰을 건넸다. 사진을 찍어 달라는 뜻이었다.
“네. 이리 주세요.”
혜성은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만들었다.
사진을 찍어주려는데 포인트가 좋지 않았다. 혜성은 막내에게 잠깐 눈짓한 뒤 조금 떨어진 창가로 이동했다. 석양과 한강 다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위치였다.
여학생들이 창가를 등지고 포즈를 잡았다. 긴 머리를 찰랑이거나 골반을 옆으로 비트는 등, 요즘 유행하는 한류 걸그룹 흉내를 냈다.
혜성은 문득 혜진이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가족끼리 나들이를 갔던 날, 혜진이도 조금 과장된 포즈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물론 나중에는 이불킥하며 후회했지만.
“하나, 둘, 세-!”
이윽고 혜성이 막 셔터를 누르려는 찰나였다.
콰콰쾅!
벼락같은 폭음과 함께 빌딩이 좌우로 크게 요동쳤다. 천장에서 먼지와 파편이 우수수 떨어졌다.
왜애엥, 빌딩 전체에서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고, 건물 주위와 아래층에서 회색 연기가 솟아올랐다.
“꺄아아악!”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까아아악, 어디선가 소름 끼치는 새 울음이 들렸다. 사람들은 급히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파지직, 외벽과 유리창이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졌다.
“위험해!”
혜성은 여학생들을 향해 반사적으로 내달렸다.
“꺄아아!”
여학생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도 그나마 안전한 안쪽으로 대피했지만, 한 명은 몸이 얼어붙은 듯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처음에 혜성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했던 학생이었다.
혜성은 떨고 있는 여학생의 팔을 낚아챘다. 그리곤 몸을 빙글 돌리고 원심력을 이용해 반대편으로 던져 버렸다.
여학생은 비명을 길게 지르며 친구들의 품에 안겼다.
“됐다!”
혜성도 다시 안쪽으로 몸을 날리려는 찰나였다.
콰직,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바닥이 내려앉았다. 이미 아래층은 바닥이 무너진 상태였다. 악마가 시커먼 입을 쩍 벌리고 먹이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젠장!”
바닥이 완전히 꺼지기 직전, 혜성은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앞쪽으로 솟구쳤다.
‘좋았어. 이대로 날아올라서 바닥을 구른 다음에……’
혜성은 멀리 정면을 응시하며 다음 동작을 계산했다. 약 5m 전방, 막내와 한수호가 보였다.
그때였다.
쾅, 뭔가가 혜성의 머리를 강타했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대형 조형물이었다. 혜성은 공중에 높이 떠 있던 상태. 미처 피할 수 없었다.
“이런 씨……”
그는 욕설도 끝맺지 못하고 그대로 추락했다. 파편, 깨진 유리, 그리고 각종 조형물 등과 함께.
“형!”
“선배님!”
막내와 한수호가 달려오다가 멈칫하는 걸 마지막으로, 혜성은 전원이 나간 TV처럼 시야가 아득해졌다.
***
쾅!
“서울 한복판에서 폭탄 테러라니? 대체 뭐한 거야?”
사내는 책상을 내려치며 고함쳤다. 가슴에 걸린 신분증에는 [한진영]이란 이름이 쓰여 있었다. NSA의 국장이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임시 지휘본부가 차려진 대형 컨테이너였다. 그는 열린 문을 통해 컨테이너 밖을 힐끔 쳐다봤다.
일대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하늘에는 헬리콥터가 떴고, 경찰 특공대와 NSA의 트럭, 소방차, 구급차가 연이어 도착했다.
방송국과 신문사 기자들도 장사진을 이뤘고, 그 숫자는 BJ들까지 포함하면 백 명을 훌쩍 넘었다.
- ……아직 테러리스트들의 공식 성명은 나오지 않은 가운데……
- ……이번 사건은 국제 테러리스트, 블랙의 소행으로 추측되며……
기자들이 경쟁적으로 멘트를 날렸다. 곳곳에서 대형 카메라가 돌아갔고, 하늘에는 촬영용 드론들이 벌떼처럼 날아다녔다.
“테러범의 공식 성명은 언제 나옵니까?”
“NSA나 CIC는 어째서……”
몇몇 기자들이 컨테이너로 몰려들었지만,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요원들이 인간 바리케이드를 만들어 통제했다. 하나라도 건지려는 기자들과 하나라도 더 막으려는 요원들 사이에 거친 몸싸움이 일어났다.
“상부에서 보도 지침이 내려올 때까지 기자들 철수시켜! 드론도 당장 빼라고 하고! 특수팀은?”
한진영은 옆을 홱 돌아보며 물었다.
“지상에 3팀, 상공에 2팀이 준비 중입니다.”
팀장 중 하나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대답했다.
“좋아! 준비 완료되는 대로 투입해!”
“하지만 아직 위에서……”
다른 부장이 말끝을 흐렸다.
“뭐? 지금 희생자하고 인질이 몇인지 알아? 일단 투입하고, 사후에 보고해!”
한진영은 더욱 언성을 높였다.
“알겠습니다!”
팀장들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급히 컨테이너를 나갔다.
한진영은 63스퀘어 쪽을 올려다봤다.
끄아아악, 소름 끼치는 괴상한 울음이 간헐적으로 들리고 있었다.
“폭탄에 변종 게이트까지. 이 새끼들! 대체 뭘 소환한 거야?”
***
임시 통제센터.
한진영과 요원들은 정면의 대형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63스퀘어에 잠입 중인 특수팀의 상황이 실시간으로 나오고 있었다.
팀장이 손가락을 활짝 폈다.
- 전원 대기!
파팟, 9명의 팀원은 벽과 기둥, 각종 조형물 뒤로 바람처럼 흩어졌다. 다들 검은 전투복을 입고, 검은 복면을 썼다. 언뜻 보면 경찰 특공대와 비슷했지만, 총 대신 장검, 창, 도끼 등을 들고 있는 게 달랐다.
잠시 후, 기둥 뒤에서 작고 가느다란 카메라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63스퀘어의 우측 로비였다. 비상구와 연결된 작은 문이 보였다. 태풍이 휩쓸고 간 듯 엉망이었지만,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대원이 손목의 스마트 워치를 확인했다. 베젤을 몇 번 돌리자 주위가 레이더처럼 표시됐다. 역시나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잠시 후, 팀장은 왼팔을 어깨 높이로 들었다. 흩어진 대원들의 시선이 그의 팔에 집중됐다.
- 진입!
이윽고 팀장이 주먹을 움켜쥔 순간, 그를 포함한 열 개의 그림자들은 일제히 비상구 쪽으로 내달렸다. 전방 진입자, 측면 보조자, 전후방 감시자 등으로 포메이션을 형성한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비상구 앞에 도착했다.
“헉!”
선두의 진입자가 돌연 짧은 숨을 들이켜며 위로 솟구쳤다. 뒤따르던 팀원들도 9개 방향으로 흩어졌다.
비상구 문 너머, 은색 거인 두 놈이 우뚝 서 있었다. 키 2.5미터, 체중 300킬로그램에 이르는 철벽의 지킴이, 일명 ‘아이언 골렘’이었다. 놈들의 발밑에는 탐지기를 속이기 위한 특수 결계가 그려져 있었다.
팀장은 왼손 검지와 중지를 곧게 펼쳤다. 팀원들은 포메이션을 재정비한 뒤, 놈들을 향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 했다.
그들이 막 몸을 날리려는 찰나, 바닥에서 검은 손들이 유령처럼 쓰윽 올라와 발목을 잡았다.
“이게 무슨……”
그들이 뭐라고 외치기도 전, 발목부터 시작해 곧 그들의 몸 전체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섀도 댄서.
‘게이트 오프너’라는 코드명의 아이템을 사용해 소환하는 몬스터였다. 지금처럼 매복해 있다가 범위 내에 들어온 적을 공격하는 게 특기. 다만 아직 외부에 공표되지 않았고, 당연히 소환하는 방법 또한 극비였다.
영상은 여기까지. 삐익, 골렘이 카메라를 짓밟는 걸 마지막으로 화면은 온통 까만색이 됐다.
“젠장!”
한진영은 쓰고 있던 헤드셋을 집어 던졌다. 처절한 비명과 기분 나쁜 정적만 반복됐다.
“지상 팀! 상공 팀! 전부 연락 두절입니다! 아무래도 우리의 대응 전략과 전술이 놈들에게 읽힌 것……”
팀장 중 하나가 눈치 없이 그의 화를 돋웠다. 한진영이 막 고함을 지르기 직전, 다른 팀장이 허겁지겁 뛰어 들어와 보고했다.
“긴급. 놈들이 사용한 폭탄을 분석했습니다.”
“어떤 종류야?”
한진영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군이나 기관에서 만든 건 아닙니다. 지하 마켓에서 사제로 만든 폭탄으로 추정됩니다.”
팀장은 폭탄의 타입을 간단히 설명했다. 차성진이 여의도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타입이었다.
“차성진하고 연관이 된 건가?”
“아직 증거는 없습니다만, 여러 정황상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때 탈취당한 아이템 있지 않습니까? 게이트 오프너 말입니다.”
“그게 왜?”
한진영은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당시 차성진을 통해 회수한 게이트 오프너는 극히 일부였다. 대부분은 지하 마켓으로 흘러갔다고 추정할 뿐, 추격이 쉽지 않았다.
“게이트 오프너 시리즈 중에서 제일 위험한 타입, 코드명 ‘게이트 가드’와 ‘헬 게이트’도 동원된 것 같습니다.”
“이런 씨발.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결국 한진영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일단 VIP께는 내가 직접 보고 드리겠다. 그 전까지는 모두 대기하고, 기자 놈들 몰려들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해.”
그는 굳은 표정으로 팀장들을 둘러봤다. 그가 계속 뭐라 말하려는데, 다른 요원이 들어왔다. 통신 담당 요원이었다.
“63스퀘어에서 아까부터 계속 같은 신호가 잡히고 있습니다. 한번 직접 들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요원은 블루투스 헤드셋을 건넸다.
“또 뭐야?”
한진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헤드셋을 받아 착용했다.
처음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눈을 감고 헤드셋에 집중했다. 탁탁탁, 같은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반복되고 있었다.
“모스 부호?”
한진영은 외마디 비명처럼 외쳤다.
“맞습니다. 폭탄에서 용케 살아남은 누군가가 신호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요원은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쪽 요원인가?”
팀장들의 웅성거림도 커졌다. 쉿, 한진영은 검지를 입술에 붙여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인식…… 번호…… M877900. 반복한다. M877……”
한진영은 뭔가에 홀린 표정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팀장들은 급히 태블릿을 꺼내 그가 중얼거리는 인식번호를 검색했다.
“찾았습니다! 우리 쪽 요원입니다!”
곧이어 누군가가 태블릿을 들고 반갑게 소리쳤다.
“누구야?”
한진영은 태블릿을 빼앗듯이 받아들었다.
“어? 이놈이 왜 여기에 있어?”
한진영의 입에서 놀라움과 기쁨, 의문이 뒤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다른 팀장들도 태블릿을 본 뒤 하나같이 깜짝 놀랐다.
잠시 후, 누군가가 태블릿을 통제센터 중앙의 대형 모니터에 연결했다. 모니터에 낯익은 요원의 증명사진과 신상정보가 떠 있었다.
- 인식번호 M877900 이혜성!
“또 이혜성이야? 하여튼 안 끼는 데가 없구먼. 이혜성이 테러를 부르는 거야, 테러가 이혜성만 따라다니는 거야?”
한진영은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