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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순직이 힘들다-71화 (71/150)

# 071.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4)

평택 외곽, H 클리닉.

“혜진아.”

혜성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유리창 너머를 초조하게 바라봤다.

치료실 중앙, 환자복을 입은 혜진이 누워 있었다. 머리카락이 길어지고, 뺨이 좀 야윈 것 외엔 전체적으로 평온한 모습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최고의 요원들이니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강지영이었다.

“그래야죠.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혜성은 혜진의 옆에 있는 유리 상자를 응시한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유리 상자 안, 청룡의 비늘을 카피한 그의 장갑이 녹색 액체에 잠겨 있었다.

상자의 위에는 소켓 역할을 하는 투명한 튜브가 나와 있었고, 튜브의 반대쪽은 혜진의 앙상한 팔뚝에 닿아 있었다.

병원에서 수액을 맞는 것과 비슷했는데, 약물 대신 아이템의 능력을 주입한다는 것이 달랐다.

청룡의 비늘이 다른 S급 아이템보다 유독 비싼 것도 바로 저 때문이었다. A급 이상 아이템들은 대부분 사용자의 EF를 이용해 활성화되는바, 강한 능력자가 아니라면 사용에 제약이 따랐다.

하지만 청룡의 비늘은 특이하게도 아이템 자체의 에너지원으로 활성화됐는데, 이는 곧 평범한 일반인도 소켓이나 보조 도구의 도움을 받으면 청룡의 비늘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잠시 후, 하얀 가운을 입은 치료사가 치료실에서 나왔다. 치료실에서 아이템과 씨름한 지 세 시간째. 안색은 창백했고, 얼굴을 비롯한 온몸은 땀으로 흥건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일단 최선을 다했으니까 결과를 지켜봅시다.”

치료사의 대답은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처럼 뻔했다.

“정말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 거겠죠.”

“몇 번 말씀드렸듯이 이론상으론 가능합니다. 다만 당장 일상으로 돌아오는 건 무리입니다. 청룡의 비늘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열쇠일 뿐이니까요. 전과 같은 평범한 삶으로 돌아오려면 최소 일 년 이상은 꾸준히 정신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최소 일 년이라.”

혜성은 치료사의 말을 반복해 중얼거렸다. 솔직히 잠에서 깨어난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일 년이 아니라 그 이상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어!”

강지영이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혜성도 얼굴이 굳어졌다.

혜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처음엔 아주 미약해서 알아볼 수 없었지만, 곧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처럼 떨림이 커졌다. 진전이 있다는 신호였다.

강지영은 혜성에게 고개를 돌렸다. 혜성은 당장 유리를 뚫고 들어갈 것처럼 동생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 해요? 들어가서 손이라도 잡아줘야죠. 빨리 돌아오라고 말이에요.”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혜성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직은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용기요?”

“혜진이가 이렇게 된 건 다 저 때문이니까요. 다 낫는다고 해도 과연 저를 용서해 줄까요?”

혜성은 말끝을 흐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차마 동생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래도 들어가 보세요.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잖아요.”

그녀가 한창 말하는 도중이었다.

복도 저편에서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누군가가 들어왔다. 단신의 파마머리 아줌마와 키가 크고 마른 듯한 아저씨였다. 누군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아줌마의 눈과 코, 아저씨의 턱과 얼굴형은 옆에 있는 혜성과 판박이였다.

강지영은 둘을 향해 꾸벅 인사한 뒤 자리를 비켜줬다. 치료사는 남아서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눈짓을 받고는 슬그머니 뒤따랐다. 경호원들도 씁쓸하게 웃으며 몸을 돌려 나갔다. 복도에는 혜성과 그를 똑 닮은 장년의 남녀만 남았다.

혜성의 시선은 복도 저편의 두 사람에게 박혀 있었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반대로 할 말이 너무 많아 뭘 먼저 꺼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혜성아……”

파마머리의 아줌마가 웅얼거리듯 작게 말하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담배 연기가 뿌연 휴게실.

“오래 걸리네. 하긴, 그동안 밀린 이야기들이 많을 테니까.”

강지영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문가에 서 있던 웅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봤다. 혜성의 부모님이 도착하고 거의 반나절이 지났다. 그동안 그녀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계속 대기실에만 앉아 있었다.

“이제 4개월 정도 남았나?”

그녀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미간을 좁혔다.

혜성이 부모님께 사실을 밝힐 수 있을까?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4개월 남짓뿐이라고. 아니. 그는 절대 그것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혜성 씨에겐 마지막 특별 휴가인 셈이군. 앞으로 두 번 다시 없을.”

강지영은 쓰게 웃으며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때였다. 대기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몇 시간 만에 초췌해진 혜성이었다. 하지만 눈은 전보다 더 생기가 돌았다.

“오랜만에……”

그녀는 말을 꺼내려다가 삼켰다.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혜성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아버지가 딱 한 말씀 하셨어요.”

혜성은 그녀의 맞은편에 털썩 앉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뭐라고요?”

“‘그때 몬스터를 선택한 건 네 최고의 선택이었다. 넌 내 아들이기 전에 국가의 요원이다. 만약 사사로운 정 때문에 사명감을 저버렸다면 호적을 파버렸을 거다.’라고 하시더군요.”

“혜성 씨가 누굴 닮았는지 알겠네요.”

강지영은 조금 과장되게 웃음을 터뜨렸다.

“호적 파이기 싫어서라도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큰 짐을 벗은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어깨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

월요일 오전, NSA 본부 국장실.

“오랜만이군.”

국장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쓰게 웃었다. 목에 건 신분증에는 사진과 ‘한진영’이란 이름이 쓰여 있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혜성도 찻잔을 내려놓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둘 다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혜성의 가족사는 특수 요원의 숙명과도 같은 비극. 때론 백 마디 말보다 짧은 침묵이 더 진심을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한진영은 짐짓 환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바꿨다.

“자네 활약 때문에 요즘 난리네. CIC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소식도 들었고. 그래서 하는 말이네만. 우리도 특수팀을 하나 창설하기로 했네.”

“특수팀이요?”

“그래. 물론 팀장은 자네. 팀원 또한 자네가 원하는 대로 붙여주겠네.”

팀장? 순간적으로 혜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야. 윗선의 결재도 떨어져야 하고,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많으니까. 특수팀이 실질적으로 가동되려면 몇 달은 걸리겠지.”

한진영은 미소를 머금고 혜성을 쳐다봤다. 말과 달리 창설을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국장의 다음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특수팀 창설의 절차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만 언뜻 기억났다.

한 시간가량 이어진 긴 면담을 마친 뒤, 혜성은 홀린 표정으로 국장실을 나왔다.

“특수팀이라.”

문득 강철호가 떠올랐다. 그때 CIC 대신 NSA를 선택한 게 새삼 잘한 것 같았다.

“역시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군.”

“맞아요. 선택의 연속이죠.”

혜성이 한참 중얼거리는 도중,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이야!”

그는 화들짝 놀라며 물러났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국장실 앞 복도. 어느새 막내가 그의 옆에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요? 몇 번을 불렀는데.”

혜성은 뭐라고 면박을 주려다가 말을 삼켰다. 녀석의 표정이 시무룩했다.

“고민 있냐?”

막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혜성의 질문을 기다린 눈치였다.

혜성은 녀석을 휴게실로 끌고 갔다. 마침 휴게실은 텅 비어 있었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그가 자판기에서 시원한 캔 커피를 하나 뽑아 건네며 물었다. 막내는 목이 탔는지 캔 커피를 단숨에 비우고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의 선택 때문에요.”

“연우 씨? 왜?”

“매형, 아니 태호 형 말이에요.”

막내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난 또 뭐라고. 태호 못 믿냐?”

“믿긴 하지만. 이놈의 철부지 누나는 남친이 없어도 걱정, 있어도 걱정이에요.”

“걱정하지 마. 태호가 다른 건 몰라도 여자관계 하나는 깔끔하니까. 내가 보장해.”

혜성은 피식 웃으며 막내의 어깨를 툭툭 쳤다.

막내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됐다.

동생이 어느 날 남자친구라고 웬 놈을 데려온다면? 아마 혜성은 지금 막내보다 더 과격하게 나섰을 것이다. 어떤 놈이냐? 어떻게 만났냐? 뭐가 좋냐? 집안은? 형제는? 여자관계는?

“그래서 오늘 63스퀘어에서 같이 커피 한잔 마시기로 했어요. 정말 어렵게 마련한 자리예요.”

막내는 눈을 빛내며 혜성을 쳐다봤다.

‘커피는 핑계다. 저녁 식사와 술자리를 빌려 태호의 진심을 듣고 싶다. 그런데 나 혼자 가면 여우 같은 누나가 계속 내 공격을 커트할 거다. 그러니 형이 좀 도와달라.’라는 눈빛이었다.

“알았다, 알았어. 나도 갈게. 마침 시간도 있으니까.”

혜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막내도 표정이 밝아졌다.

***

EDM이 은은하게 울리는 클럽 지하.

“김연우의 스케줄을 입수했습니다. 오늘 동생과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더군요. 이혜성도 그 자리에 참석할 것 같습니다.”

정장을 입은 매니저가 꾸벅 인사하고 보고했다.

“장소는?”

소파에 앉은 자가 손바닥을 비비며 물었다. 며칠 전 있었던 언리미티드의 총괄 매니저로 알려진 자였다. 최근 여기저기서 쫓겨 다닌 탓에 조금 수척해져 있었다.

“63스퀘어입니다.”

매니저는 작은 태블릿을 내밀었다.

“수고했군.”

총괄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블릿을 확인했다. 김연우와 막내가 주고받은 메시지를 해킹한 내역이었다.

혜성과 태호, 그 외 NSA 요원을 미행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일단 그들에게 쏠려있는 세간의 이목이 문제였다. 게다가 그들은 감각도 보통 인간과 다른 각성자였고, 다른 NSA 요원들이 수시로 따라다녔다.

하지만 김연우는 예외였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민간인 신분. 그녀를 미행하다 보면 언젠가는 혜성과 접촉할 수도 있다고 예상했는데, 그 상황이 생각보다 빨리 닥쳤다.

“이혜성 패거리가 전부 오겠지? 개새끼들. 내가 이대로 혼자 죽을 거 같아?”

그는 이를 갈며 욕설을 내뱉었다.

물론 혜성과 정면으로 싸워 이길 자신은 없었다. 폭주한 유수혁마저 혜성에게 당하는 걸 똑똑히 봤으니까. 게다가 믿었던 만병귀라는 놈도 유수혁을 데려간 뒤로는 연락을 받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난 이제 조직에서 끝났다. 이판사판. 다 같이 죽자.”

그는 핸드폰을 꺼내 단축번호를 눌렀다.

준비는 진즉에 끝난 상태. 마침 장소도 저녁 무렵의 63스퀘어라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신호가 가고 핸드폰 너머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나다. 애들 준비 다 됐지? 지금 당장 63스퀘어로 튀어와. …… 응. 맞아. 오늘 저녁, 63스퀘어에서 아주 제대로 한 방 터뜨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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