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70화 (70/150)

# 070.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3)

- 시청자 여러분, 지금 인천 대교에서는 차량 추격전이……

“저 날파리 같은 새끼들. 이걸 무슨 게임으로 생각하나?”

혜성은 위를 올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방송국의 촬영 헬리콥터가 세 대로 늘어나 있었다. 지상파 방송국이 총출동한 것 같았다.

끄아아악, 돌개바람 중앙에서 기괴한 울음이 메아리쳤다. 혜성은 전신이 쭈뼛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잠시 후, 돌개바람 속에서 거대한 괴물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시 서펀트(Sea serpent). 또는 해룡.

길이 30m 정도의 바다뱀 같은 모습인데, 목 주위의 크고 화려한 비늘들이 인상적이었다. 특기는 거대한 몸을 이용한 공격과 음파 공격. 불이나 물처럼 특정한 속성을 갖춘 건 아니었지만, 큰 체구와 강한 힘을 이용한 공격은 위협적이었다.

놈이 커다란 입을 쩍 벌렸다. 음파 스킬을 사용하려는 것 같았다.

파팟, 혜성은 앞으로 달려간 뒤 난간을 밟고 높이 뛰어올랐다. 그리곤 두 팔을 교차해 가슴과 얼굴을 보호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 크아아아!

긴 울음과 함께 놈의 음파 공격이 그대로 혜성을 덮쳤다.

콰쾅, 혜성은 중앙 분리대를 뚫고 그대로 반대편 난간에 처박혔다.

- 시작과 동시에 이혜성이 타격을 받아……

헬리콥터의 기자들은 혜성을 클로즈업하며 요란을 떨었다. 어쩐지 그가 당한 걸 반기는 눈치였다.

“씨발.”

혜성은 욕설을 내뱉으며 찌그러진 난간을 짚고 일어섰다. 황금빛 서기와 전투 본능. 의도했던 대로 단숨에 2차 각성에 진입한 것이다. 정장도 일렁이는 안개의 형태로 변했다.

- 분석 완료. 놈의 패턴은 단순하다.

머릿속의 대수영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혜성은 시 서펀트를 향해 다시 뛰어올라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A급 이상이 기본적으로 갖는다는 강기. 놈에게 속성이 없는 탓에 그의 강기 또한 무(無) 속성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AAA급 이상이었다.

희뿌연 강기가 아래에서 위로, 놈의 미간을 정확히 강타했다.

“끄아아악!”

시 서펀트는 상체를 세우며 발버둥 쳤다. 바다 곳곳에서 거대한 물보라가 솟구쳤고, 물보라는 곧 거대한 파도가 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혜성은 물기둥을 밟고 더욱 높이 솟아올랐다.

“크아아!”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길게 포효했다. 놈보다 한 등급 위, AAA급의 음파가 놈의 머리를 덮쳤다.

퍼펑!

놈의 거대한 머리가 팝콘처럼 터졌다. 파란 가죽, 녹색 피, 붉은 뼈, 그리고 끈적거리는 뇌수의 파편이 혜성에게 튀었다.

- 시청자 여러분 보셨습니까? 이혜성이 단숨에……

- 국민 히어로, 이혜성. 오늘도 몬스터를……

- 이혜성이 또 성장한 걸까요? 이젠 AAA급 시 서펀트도……

헬리콥터들은 고도를 낮추고 혜성의 곁을 맴돌았다.

“젠장.”

혜성은 물보라들을 밟으며 사뿐히 다리 위에 착지했다. 깔끔한 승리였지만, 조금도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의 시선은 서쪽 바다를 향했다. 바다 한가운데, 쾌속정 한 대가 손톱처럼 작은 점이 돼 급속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해양 경찰이 뒤늦게 놈을 따라나섰지만, 양측의 거리는 갈수록 멀어졌다. 물론 해양 경찰은 쾌속정을 따라잡는다고 해도 놈의 염동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잠시 후, 사이렌이 울리고 NSA의 차량이 도착했다. 복장도 갖추지 못한 장진우를 선두로 막내와 한수호 등의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경찰차에서 가면을 쓴 강지영이 웅과 함께 내렸다.

혜성은 강지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 강지영도 그를 향해 다가왔다.

“괜찮아요. 괜찮아. 기회는 다시 있을 거예요.”

강지영은 혜성을 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그녀의 고운 손이 불그스름하게 빛났다. 노을이 감싸는 것 같은 디버프의 반응이었다. 혜성의 2차 각성은 서서히 빛을 잃고 약해졌다.

조용했다. 정확한 사연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혜성이 범인과 몬스터 사이에서 갈등하는 장면은 방송국 헬리콥터를 통해 전국에 중계된 상태였다.

“형……”

“선배님……”

막내와 한수호가 나서려는 찰나, 장진우가 팔을 뻗어 만류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혜진이. 혜진이를 원래대로 돌릴 방법이……”

결국 혜성은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차마 말을 잇지도 못하고. 그의 어깨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는 가운데, 강지영의 어깨가 축축하게 젖었다.

“울고 싶으면 울어요. 당신은 충분히 울 자격이 있어요.”

강지영의 착잡한 목소리가 위로처럼 그의 곁을 맴돌았다.

***

수원 J 시장, 성진순대.

벽에 걸린 TV에서는 혜성이 웬 여자에게 기대 흐느끼는 모습이 나오다가 갑자기 화면이 바뀌었다. 누군가가 방송국에 급히 손을 쓴 것 같았다. 스튜디오의 아나운서는 방금 혜성이 몬스터를 물리치는 장면만 되풀이해서 보여줬다.

“우리 혜성이가 왜 우는 거예요? 혜진이는 계속 못 만나게 하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예요.”

파마머리 아줌마는 택시 기사들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줌마, 우리한테 왜 그러세요?”

택시 기사들은 엉거주춤 서서 아줌마를 내려다봤다. 둘 다 난감한 표정이었다.

“제발 나 좀 살려주세요. 이러다 나도 죽어요. 누가 모를 줄 알아요? 과일가게, 슈퍼, 생선가게. 다 한통속이잖아요? 저 아줌마들도 마찬가지고.”

파마머리 아줌마는 눈물 젖은 눈으로 주위를 힐끔 돌아봤다.

다른 가게의 주인들이 식당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다들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이쪽으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아줌마와 시선이 마주치자 괜히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물러났다.

“이 사람아. 나랏일 하시는 분들한테 무슨 말이야? 이분들도 다 사정이 있잖아.”

주인아저씨는 쪼그려 앉아 아줌마를 토닥거렸다. 꽉 깨문 어금니와 파르르 떨리는 눈매. 그도 할 말이 많지만 애써 삭이는 눈치였다.

“아이고, 혜성아. 혜진아.”

결국 아줌마는 하얀 눈자위를 드러내고 쓰러졌다. 아저씨의 다급한 비명, 빨리 119를 부르라는 고함, 그리고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는 일대의 상인들까지. 가게는 금세 난장판이 됐다.

“하아. 처음부터 다 알고 계셨네.”

결국 택시 기사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기는 어미 뻐꾸기. 둥지를 바꿔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

저녁 무렵, 중국 동부 해안.

흰옷을 입은 사내 다섯 명이 담배를 피우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인적이 끊기고, 빛도 없는 곳이었다. 어슴푸레한 저녁노을 속에서 담뱃불이 잠자리처럼 허공에 떠 있었다.

이윽고 검은 쾌속정 한 대가 파도를 뚫고 반대편에서 나타났다. 엔진은 거의 끈 상태. 잠시 후, 쾌속정은 파도를 타고 자연스럽게 해안에 정박했다.

“왔군.”

사내들은 피우던 담배를 밟아 끄고 쾌속정으로 다가갔다.

“왜 둘뿐이지? 다른 놈들은?”

그들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왼쪽 눈가에 길게 검상이 있는 자였다.

“틀렸어. 웬 미친 새끼가 나타났거든.”

냉혹한 인상의 사내는 가래침을 뱉으며 웃었다. 동료가 죽었음에도 오히려 더 좋아하는 눈치였다. 머릿수가 줄어들어 그만큼 그가 가져갈 몫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물건은?”

“그야 확보했지.”

“그래. 그럼 어디……”

“어허. 선수끼리 왜 이래? 돈이 먼저 아닌가?”

그는 재킷을 여미며 슬쩍 물러났다. 놈들과 한두 번 거래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흰옷의 사내들은 자기들끼리 잠깐 소곤거렸다. 서쪽 지방 중국어 방언이었다. 놈들의 대화 중에 ‘마스터’라는 단어가 언뜻 들렸다.

몇 분 후, 흰옷의 사내 중 하나가 태블릿을 꺼내 뭔가를 입력했다.

부웅, 냉혹하게 생긴 사내의 핸드폰이 가볍게 진동했다.

“확인해 봐. 늘 사용하던 계좌로 보냈으니까.”

“역시 돈 하나는 확실하다니까. 크크크.”

그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계좌를 확인했다. 달러 표시 뒤에 0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런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줘. 팀이야 또 만들면 그만이니까.”

그는 히죽 웃으며 재킷 안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흰옷의 사내들은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경계했다.

“왜 이렇게 쫄고 그래?”

그는 푸르스름한 단검을 꺼내 가볍게 던졌다.

가운데 있는 사내가 오른손을 뻗어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곤 왼손으로 검신을 슬쩍 쓰다듬었다.

“진품이군.”

사내는 동료들을 돌아보며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이만.”

냉혹한 인상의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쾌속정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파앗, 흰 섬광이 뒤에서 번쩍였다.

“이 무슨 개 같은……”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가운데 놈이 단검을 들고 서 있었다. 조금 전의 빛은 단검에서 뿜어진 강기. 강기는 그의 명치를 뚫고 지나갔다.

쿵, 그는 썩은 나무처럼 쓰러졌다.

“약속은 지켰다.”

가운데의 사내는 단검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딱히 악감정은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였으니까.

“마스터께서 좋아하시겠군.”

퉤, 사내는 죽은 놈에게 가래침을 뱉고 몸을 돌렸다.

***

SJ 기획, 소회의실.

“이혜성이 또 한 건 했군.”

박무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TV의 볼륨을 줄였다. 뉴스에서는 혜성의 인천 대교 활약상이 속보로 나오고 있었다.

“그래. 어떤 놈들인지는 알아냈나?”

그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처럼 한수은이 차가운 표정을 한 채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3대 마스터 중 하나의 고용인들인 것 같습니다.”

“우리 때문에 용병을 고용한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쯤 꼬리를 자르고 잠적했겠군.”

박무영은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쓰게 웃었다.

은밀한 해안가에서 거래. 기습. 시체가 된 범인. 놈들의 수작은 안 봐도 눈에 훤했다.

그는 리모컨을 들어 TV의 영상을 뒤로 돌렸다. 혜성이 낯선 여자에게 기대 통곡하는 장면이었다.

“비극적인 장면이긴 한데, 이혜성은 지금 뭔가를 잊고 있군.”

그는 영상을 더 뒤로 돌렸다.

시 서펀트가 나타나기 전, 냉혹한 인상의 사내가 청룡의 비늘로 혜성을 공격하는 장면이었다.

일시 정지. 그는 혜성이 장갑을 낀 손으로 단검을 움켜잡는 곳에서 화면을 멈추고, 장갑을 확대했다. 단검의 데미지는 확실히 장갑에 전달되고 있었다.

장갑은 데미지를 통해 상대의 아이템을 카피하는 아이템.

일종의 ‘덮어쓰기’ 형식이었기 때문에 전에 카피한 무형검은 사라졌지만, 대신 청룡의 비늘을 카피한 상태였다.

“이혜성의 동생을 당장 우리 쪽 병원으로 데려와. 스킬 전이술을 가진 요원들도 소집하고. 아, 그 전에 이혜성에게 괜히 다른 아이템을 카피하지 않게 몸을 사리라고 알려야겠군.”

“알겠습니다.”

한수은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녀답지 않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이혜성. 정말 좋은 선택을 했군.”

박무영은 혜성의 전투 영상을 재생하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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