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8.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1)
토요일 오후 1시, 코엑스 지하 주차장.
검은 승합차 한 대가 구석에 주차해 있었다. 겉보기에는 연예인들이 타는 고급 승합차 같았지만, 실제로는 방탄 기능을 갖춘 특수 차량이었다.
“NSA 놈들은?”
승합차 안,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가 신분증과 초대장을 점검하며 물었다. 입술 위에 작은 상처가 있어 잔혹한 이미지를 풍겼다.
“지하에서 특별한 걸 샀지. 게이트 오프너라고.”
“우리가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서울 전역에서 B급 게이트를 열기로 했어.”
맞은편에 앉은 사내 둘이 각종 화기를 챙기며 히죽 웃었다.
“NSA 놈들 발바닥에 땀 나게 뛰어다니겠군.”
선글라스를 낀 한 사내가 운전석에서 뒤를 돌아보며 킥킥거렸다.
“방심하지 마. 이혜성이라고 했나? 요즘 NSA에 이상한 놈이 있다더군. 사건이 있는 곳엔 어김없이 나타난다나?”
잔혹한 인상의 사내는 신분증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나도 들은 적이 있어. 상대의 스킬을 카피하는 다차 각성자라던데?”
“그래 봤자지. 설마 여기까지 나타나겠어?”
“그리고 나타나면 어때? 우리에겐 확실한 보험이 있잖아.”
준비 완료. 다른 셋도 화기를 내려놓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번 일만 잘되면 동남아에서 몇 년쯤 푹 쉬자고.”
잔혹한 인상의 사내는 선글라스를 끼고 승합차에서 내렸다.
차 문이 닫히기 직전, 뒤에 앉은 사내들이 태블릿으로 타깃을 확인하는 게 언뜻 보였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한 뼘 길이의 단검. 검신에 비상하는 동양식 용이 음각된 ‘청룡의 비늘’이었다.
***
오후 한 시 반, 코엑스 D1홀 정문.
“제25회 국제 아이템 경매전이라……”
혜성은 큼지막한 현수막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천면 여우의 가면을 써서 평범한 외모로 위장한 상태였다.
게이트 시대 초기, 아이템은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라는 사유물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아이템에 눈이 먼 능력자 간의 싸움, 아이템을 사용하는 범죄의 등장 등 수많은 부작용이 나타났다. 게다가 몬스터로 인한 피해와 이에 따른 막대한 복구 비용은 정부의 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정부는 던전과 게이트를 직접 관리, 허가를 받은 길드에게만 게이트와 던전을 배분하는 현재의 제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AAA급 이상의 특수 아이템을 공개적으로 거래하는 자리를 마련했는데, 그게 바로 국제 아이템 경매였다.
“참 웃기죠? 아이템을 사고파는 건 똑같은데, 지하 마켓은 불법이고 국제 경매는 합법이라니. 세금 때문에 그러는 건가?”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천면 여우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강지영이었다. 다만 평소의 캐주얼한 차림과 달리, 오늘은 검은색 바지 정장으로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곰처럼 큰 웅이 혜성을 수줍게 힐끔거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혜성은 웅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별거 아닌 인사였는데, 웅은 우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돌을 만난 소녀팬 같은 수줍은 반응이었다.
“그런데 여긴 초대받은 VIP만 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경매 가격도 최소 수십만 달러고 말입니다.”
혜성은 주위를 슬쩍 둘러봤다.
정장을 입은 요원들이 코엑스 안쪽을 통제하고 있었다. 기자들도 출입증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어 입구를 서성였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혜성 씨가 그동안 국가를 위해 해준 게 얼만데요?”
강지영은 빙긋 웃으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검은색 봉투를 꺼냈다. VIP 초대장이었다.
“돈은요?”
“그것도 신경 쓰지 마세요. 혜성 씨에게 진 빚을 갚으라는 박 실장님의 특별 지시가 있었으니까.”
강지영은 혜성의 팔짱을 끼고 경매장 안으로 끌고 갔다.
‘이번엔 정말 아무 일도 없겠지?’
혜성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걸음을 옮겼다. 혜진이의 웃는 모습이 벌써 눈앞에 아른거렸다.
***
국제 경매전답게 보안이 무척 까다로웠다. 신분증과 초대장 확인, 소지품 검사, 특수 검색대 통과. 혜성은 여러 복잡한 절차를 거친 뒤 겨우 경매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가짜 신분증 아닌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 거지?’
혜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슬쩍 물어봤지만, 강지영은 영업 비밀이라며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와.”
혜성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경매장을 두리번거렸다.
천장이 높은 고딕 스타일 실내, 뒤로 갈수록 조금씩 높아지는 좌석들, 그리고 물품이 올라올 중앙의 무대와 조명 등.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화려했다. TV에서나 보던 유명한 길드의 대표들도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경호원을 한두 명씩 대동한 외국인들도 중간에 섞여 있었다.
“긴장할 것 없어요. 우리에겐 돈이라는 확실한 무기가 있으니까.”
강지영은 가볍게 농담조로 말하며 그를 중앙의 지정석으로 데려갔다.
그들이 착석했을 때는 경매가 막 시작된 참이었다. 무대에서는 마침 중세 유럽풍의 장검을 경매하고 있었다. 장검 앞에는 [주홍 물방울]이라는 팻말이 작게 붙어 있었다.
“주홍 물방울? 중국 쪽 던전에서 입수했다는 그 주홍 물방울인가요? 그게 왜 여기까지 왔지?”
혜성의 눈이 대번 커졌다.
“소유권이 좀 애매했거든요. 중국 쪽 길드에 한국의 백호가 같이 붙었다나? 아이템은 하난데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은 많고. 그래서 이렇게 경매에 부치고, 그 수익금을 비율대로 정산하는 거죠.”
강지영은 주홍 물방울의 입수 경위를 간단히 설명했다.
“아!”
혜성은 새삼 경매의 목적을 떠올렸다.
아이템의 소유권 분쟁을 합리적으로 깔끔하게 정리하자는 것. 이것이 이번 경매전이 열린 이유 중 하나였다.
“3!”
“4!”
호가가 계속 올라갔다. 단위는 십만. 다만 ‘원’이 아니라 ‘달러’였다. 결국 주홍 물방울은 40, 사백만 달러에 낙찰됐다.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여기저기서 희비가 교차했다. 그 외에도 유명한 아이템들이 경매에 올랐다.
“이제 슬슬 나올 거예요.”
강지영은 눈을 빛내며 나직이 속삭였다.
잠시 후, 스태프들이 뭔가를 가져와 무대 위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아무 문양도 없는 검은색 상자였다. 가로, 세로 각 1미터 정도. 팻말에는 [청룡의 비늘]이라고 쓰여 있었다.
“오오, 저게 그 물건인가?”
“정신 계통 스킬을 패시브로 지닌 단검이라. 기가 막히는군.”
“게다가 정신력 강화도 딸려 있다며? 듣자 하니 각성자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쓸 수 있다던데?”
여기저기서 탐욕에 젖은 목소리가 들렸다. 겉으로는 다들 고상한 척 빼고 있었지만, 보물 앞에선 본능이 드러났다.
- 지금부터 보실 물건은……
사회자가 한쪽에서 마이크를 들고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모두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저것만 있으면 된다는 거지.’
혜성도 다른 이들처럼 무대 위의 상자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어서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고 본격적인 경매가 진행됐다.
“40!”
“50!”
“60!”
시작부터 주홍 물방울의 기록을 간단히 뛰어넘었다.
“100!”
중국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히죽 웃으며 자신의 번호판을 높이 들었다.
“뭐? 천만 달러?”
“중국 새끼들. 여기서도 돈 자랑인가?”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S급이라고 해도 그렇지. 단검 하나에 120억 원이라니. 요즘 중국이 돈으로 고급 아이템을 쓸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
“110!”
왼쪽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약간 어눌한 억양의 한국어. 일본에서 온 능력자 같았다.
중국과 일본의 능력자는 서로를 바라봤다. 짐짓 점잖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에서는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120!”
“130!”
“140!”
“150!”
양측의 호가가 경쟁적으로 높아졌다. 한국의 능력자들은 한숨을 내쉬며 둘의 다툼을 구경만 했다.
잠시 소강상태. 중국 쪽 능력자가 160을 부를지 말지 고민하는 찰나였다.
“200!”
여성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침묵을 깨고 울려 퍼졌다. 강지영이었다.
“이천만 달러?”
혜성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강지영을 쳐다봤다. 한화 약 240억 원. 얼마나 큰 돈인지 선뜻 감이 오지 않았다.
“말했잖아요. 박 실장님의 특별 지시라고.”
강지영은 별거 아니라는 듯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경매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능력자가 사납게 노려보는 가운데, 강지영은 어깨를 으쓱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경매장 밖.
“물건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혜성은 넥타이를 살짝 풀며 채근하듯 물었다. 마음이 급했다. 당장 청룡의 비늘을 들고 동생에게 뛰어가고 싶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건 시장에서 두부 한 모 사는 게 아니잖아요. 금전 거래가 끝나면 경매소 측에서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강지영이 웃으며 대답하는 도중이었다.
왜-엥!
별안간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코엑스 안에서 들렸다. 뭔가 일이 터졌다는 신호. 경매장 입구의 철제 셔터들이 일제히 내려갔다.
‘사고?’
혜성은 건물을 돌아봤다.
콰쾅, 지하 주차장 쪽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그를 포함한 주위의 모든 이들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끼이이익, 곧이어 요란한 바퀴 소리와 함께 검은 승합차가 주차장에서 튀어나왔다. 주차장 입구 쪽의 사람들과 시설들은 무시. 승합차는 가드레일과 셔터를 들이받은 뒤, 그대로 도로로 내달렸다.
“꺄아악!”
혜성의 주위에서 다시 길게 비명이 울렸다. 가드레일의 파편이 날아온 것이다.
“젠장!”
혜성이 나서려는 찰나, 큰 그림자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웅이었다. 녀석은 큰 대자로 사지를 뻗은 뒤, 파편들을 몸으로 막아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뭐가 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뭐야?”
혜성은 뒤늦게 승합차가 사라진 도로를 쳐다봤다.
승합차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경찰차 두 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따라갔지만, 일대가 아수라장이 된 탓에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경매장. 청룡의 비늘. 사고. 수상한 놈들의 도주.
“씨발! 어떤 새끼들이야?”
혜성은 대번 상황 파악이 됐다.
“여기는 불여우. 현재 코엑스에서……”
강지영도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했다.
“제길!”
혜성은 욕설을 내뱉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콰르르릉, 어디선가 묵직한 굉음이 들렸다. 소리만으로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엔진소리였다. 50m쯤 떨어진 대로변의 오토바이 전시장. 내레이터 모델들이 있는 걸 보니 오픈 이벤트라도 벌어진 것 같았다.
“여기 좀 맡아 주세요!”
혜성은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전시장으로 뛰어갔다.
“뭐 하려고요?”
뒤에서 강지영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개새끼들. 그게 어떤 물건인지 알고.”
혜성은 스마트워치의 무선을 경찰의 주파수로 변경했다. 그리곤 재킷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끼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오른쪽 귀에 찼다.
마침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시승이라도 하려는지 빨간색 오토바이의 시동을 켜고 발을 올리고 있었다.
“비켜!”
혜성은 남성을 밀치고 그대로 오토바이에 올랐다.
- 두X티 파니갈레 V4 스페셜 에디션.
옆에 있던 입간판에 오토바이의 설명이 언뜻 보였다.
혜성은 당황하며 서 있던 내레이터 모델에게서 헬멧을 뺏어 썼다. 클러치를 살짝만 당겼는데도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NSA, 인식 번호 M877900 이혜성. 현재 코엑스 D1홀 근처. 차량 도주 용의자를 추격하겠다.”
혜성은 정면을 응시하며 액셀러레이터를 서서히 감았다.
“뭐? 이혜성?”
“이혜성! 이혜성이 나타났다!”
시민들은 이혜성을 연호하며 옆으로 비켜줬다.
부아아앙, 잠시 후 혜성은 빨간색 선이 돼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