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7. 누룽지 맛 사탕 (2)
‘혹시 날 알아본 건가?’
혜성은 가슴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1초가 1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뒤에서 장진우가 어깨를 두드리며 신호를 보냈지만, 그는 가볍게 무시했다. 대신 멀리서 달려오는 파마머리 아줌마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아이고, 여기 있었네. 젊은 양반이 왜 이렇게 정신이 없어요?”
아줌마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리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혜성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줬다. 혜성이 테이블에 놓고 온 흰 봉투였다.
“이게 뭡니까?”
그는 쓰게 웃으며 봉투를 열어 봤다. 빳빳한 오만 원권이 가득 들어 있었다.
“손님이 놓고 간 거 맞죠? 세 봐요.”
아줌마가 웃으며 재촉했다.
혜성이 세어 보니 정확히 99장이었다. 아줌마는 다시 주머니를 뒤적거려 4만 2,000원을 손에 쥐여 줬다.
“특은 8,000원이에요. 위험한 세상이니까 현금 많이 들고 다니지 말아요. 신용카드도 위험하니까 이왕이면 체크카드만 쓰고.”
“이건 그냥……”
혜성이 당황하며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아줌마는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그는 손을 뻗어 아줌마의 어깨를 잡으려다가 멈칫했다.
‘저 사람은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다. 이름도 모르는 순대국밥집 주인아줌마다. 오늘 이후로 다시는 안 볼 사람이다.’
찰나의 시간, 그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요행 한 번 안 바라고 한평생을 고지식하게 사신 분들. 돈 봉투 따위를 생각했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때였다.
“참. 나도 정신이 없네.”
아줌마는 몇 걸음 가다가 도로 몸을 돌렸다.
혜성이 순간적으로 움찔한 가운데, 아줌마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혜성의 손에 꼭 쥐여 줬다. 그리곤 뒤도 안 보고 뛰어서 돌아갔다.
“어……”
혜성은 한참 동안 아줌마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목이 메었다. ‘어’ 다음의 두 글자를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혜성 씨.”
누군가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짚었다. 장진우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타임 오버. 혜성은 끌려가는 사람처럼 승합차에 올랐다. 마침 신호가 바뀌었다. 승합차는 기다렸다는 듯이 시장을 벗어났다.
“뭘 준 거지?”
혜성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손바닥을 펴 봤다. 누룽지 맛 사탕 두 개.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그는 그중 하나의 봉지를 찢었다. 수전증에 걸린 것처럼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미끄러졌다. 두 번, 세 번, 계속 실패했다. 보다 못한 장진우가 봉지를 대신 찢고 사탕을 건넸다. 그는 남은 하나를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사탕을 입으로 가져갔다.
도로의 노면이 거칠었다. 그의 어깨가 승합차의 진동에 반응하듯 위아래로 미세하게 움직였다.
서울로 돌아가는 내내 승합차에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 혜성이 먹은 순댓국과 사탕은 세상 어느 음식보다 맛있었다.
***
승합차가 멀어진 뒤.
“혀엉.”
“선배님.”
평범한 동네 백수 둘이 코를 훌쩍이며 근처의 모퉁이에서 나왔다. 얼굴이 상기된 막내와 한수호였다.
혜성이 기계처럼 순댓국을 먹는 모습, 정확히 499만 2천 원의 거스름돈을 받는 모습, 그리고 혜성의 어머니가 손바닥 위에 사탕 두 개를 꼭 쥐여 주던 모습까지. 둘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처음부터 모든 걸 지켜봤다.
“씨발 블랙 새끼들. 하필이면 가족을 건드리고 지랄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리 적이라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룰이라는 게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눈물이 핑 돌았다.
“수원에 지부 있지? 오늘부터 점심은 무조건 순댓국이다.”
막내는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중얼거렸다.
잠시 후,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둘의 앞에 멈췄다. 다른 요원이 운전하는 위장 차량이었다.
‘형을 위로할 사람은 나밖에 없지.’
‘역시 선배님의 위로는 내가……’
막내와 한수호는 아랫입술을 깨물어 눈물을 삭이며 차에 올랐다.
***
늦은 오후 무렵, 상암 월드컵경기장 인근 대로변.
“여기서 세워 주시면 됩니다.”
혜성은 횡단보도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늘공원.
아마 동생이 중학교를 막 졸업했을 때였을 것이다. 무뚝뚝한 아버지가 어쩐 일인지 핑크뮬리를 구경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혜성과 동생의 머리가 커지고 오랜만의 가족 나들이였다.
“애도 아니고 거길 왜 가? 몰라, 오늘 친구들하고 놀기로 했어.”
혜진이의 철딱서니 없는 반항, 어머니의 눈총과 혜성의 등짝 스매싱, 아버지의 실망한 표정 등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어찌어찌해서 결국 나들이를 했는데, 나중에 찍은 사진을 보니 그날 제일 좋아했던 건 혜진이와 아버지였다.
장진우는 고맙게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운전석의 요원에게 눈짓해서 차를 세웠다.
“잠깐 바람 좀 쐬겠습니다.”
혜성은 꾸벅 인사한 뒤 백팩을 챙겨 들고 차에서 내렸다.
천면 여우의 가면은 땀이 쉽게 차고 영 답답했다. 그는 가면을 벗고 평소처럼 뿔테 안경과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평일 오후의 하늘공원은 비교적 한가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커플 몇 쌍, 소풍이라도 나온 것 같은 병아리 유치원생들만 드문드문 보였다.
“여긴 변한 게 없네.”
혜성은 마지막 가족 나들이를 떠올리며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대충 돌아보고 나오니 5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저녁을 먹기도, 그렇다고 누군가를 만나거나 집에 돌아가기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 뭐하냐?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혜성은 핸드폰을 꺼내 태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지금 바쁘다.
무성의한 답장이었다. 언제 끝나냐고 다시 메시지를 보냈지만, 태호는 읽기만 하고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병원에 응급 환자라도 들이닥쳤나?”
혜성은 쓰게 웃으며 하늘공원 반대편, 메타세쿼이아 길로 방향을 바꿨다.
곧게 뻗은 메타세쿼이아 나무들, 그 아래에 핀 이름 모를 꽃들, 시원한 그늘과 운치 있는 오솔길이 인상적이었다. 오솔길을 따라 중간중간 설치된 벤치는 데이트를 나온 연인들로 만석이었다.
“데이트하기 참 좋은……”
혜성은 벤치에 앉은 연인들을 무심코 보다가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대형 토끼 귀 머리띠를 한 커플이 보였다. 이제 막 사귀었는지 검은색 티셔츠와 청바지로 옷을 맞추고 팔짱까지 끼고 있었다.
“제가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했거든요. 오늘은 거기서 근사한 저녁을……”
둘도 웃으면서 벤치에서 일어서다가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뭔가 안 어울릴 듯하면서도 은근히 잘 어울리는 커플. 태호와 김연우였다.
“이 새끼가. 바쁘다더니 데이트로 바쁜 거였냐? 어쩐지 안 하던 향수까지 뿌리더라니. 뭐, 약 냄새에 찌들었다고?”
혜성은 마스크를 살짝 내리며 피식 웃었다. 비웃는 건지 놀리는 건지. 표정이 야릇했다.
“너, 너 오늘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냐?”
태호는 귀신을 본 것처럼 놀라 말을 더듬었다. 김연우는 얼굴이 빨개져서 혜성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그래? 내가 결혼식 사회는 확실히 봐준다고 했잖아. 언제부터였냐? 둘이 사귀기 시작한 게. 설마 신촌에서 네가 나 대신 싸운 다음부터였냐?”
혜성이 태호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한창 말하는 도중이었다.
“야! 김연우! 너 오늘 회사에서 야근한다며?”
어디선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들렸다.
그들은 모두 소리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네 백수 같은 두 녀석이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제 딴에는 변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누군지 대번 알아볼 수 있었다. 소리를 지른 건 둘 중 큰 녀석. 바로 막내였다.
“쟤는 또 여기서 왜 나와?”
걸려도 하필이면 저 녀석한테 걸리다니. 김연우의 얼굴은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잡은 태호의 손을 슬그머니 놓으려 했지만, 태호는 오히려 그녀의 손을 더욱더 세게 잡았다.
“왜 다들 여기에 온 거야? 여기서 계 모임이라도 하냐?”
혜성도 김연우와 막내를 번갈아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혜성과 한수호는 잠깐 옆으로 물러났다. 난감해하는 태호, 안절부절못하는 김연우, 그리고 잔뜩 흥분해서 씩씩거리는 막내까지. 셋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선 모습은 아침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보는 맛이 있었다.
막내는 매서운 눈빛으로 태호와 김연우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성후 씨,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우리는……”
태호가 손을 저으며 변명하려는 찰나였다. 막내는 태호의 손을 덥석 잡으며 크게 외쳤다.
“매형! 앞으로 매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
그날 밤, 오피스텔.
“미친놈. 매형이 뭐야, 매형이?”
혜성은 재킷을 침대 위에 벗어던지며 피식 웃었다.
손을 잡고 도망치듯 달아나는 태호와 김연우, ‘매형’이라 부르며 둘을 쫓아가던 막내, 그리고 혜성과 막내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막내를 따라간 한수호. 마치 한 편의 시트콤을 본 기분이었다.
“태호 녀석은 괜찮으려나?”
혜성은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핸드폰을 내렸다. 이미 메시지를 보냈지만, 녀석은 읽지 않았다. 녀석의 소심한 성격을 봤을 때, 쪽팔려서 당분간 잠수 탈 게 뻔했다.
부웅, 기다렸다는 듯이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태호가 아니었다. 발신 번호가 제한된 전화였다.
“누구지?”
혜성은 잠깐 심호흡한 뒤 전화를 받았다.
“네, 이혜성입니다.”
-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쉬는 데 방해한 건 아니죠?
약간 웃음기를 머금은 듣기 좋은 목소리. 강지영이었다.
“아닙니다. 집에 막 돌아온 참이었습니다.”
혜성은 소파에 앉으며 편하게 전화를 받았다.
- 시간이 없으니 용건만 말할게요. 찾은 거 같아요.
“네? 뭘요?”
- 혜성 씨의 동생을 원래대로 돌릴 방법.
혜성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게 뭡니까? 어디로 가면 됩니까? 언제부터……”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질문을 쏟아냈다.
- 아직 속단하긴 일러요. 이론상 가능하다는 거지, 실제로 해본 적은 없으니까.
강지영은 짧은 한숨으로 그를 진정시키고 말을 이었다.
- 혹시 청룡의 비늘이라고 아시나요? 정신 계통의 S급 아이템이요.
“청룡의 비늘?”
혜성은 고개를 갸웃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실물로 본 적은 없지만, 이름과 효능은 들은 적이 있었다. 용의 둥지라는 S급 던전에서 발견되는 희귀한 아이템. 환각을 통해 상대를 교란하며, 부가적으로 정신력을 강화하는 기능이…… 여기까지 떠올리자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신력 강화?”
- 맞아요. 현재 혜성 씨의 동생은 최면의 후유증 때문에 누워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 외부에서 정신력을 강화해 최면의 후유증을 제거하는 거죠.
“그게 지금 어디 있습니까?”
혜성은 금세 몸이 달아올랐다. 당장이라도 아이템을 찾아 뛰쳐나갈 기세였다.
- 이번 주 토요일 오후 2시. 코엑스에서 열리는 국제 아이템 경매전에 청룡의 비늘이 나온다는 정보가 있어요.
“토요일 오후 2시.”
혜성은 강지영의 말을 나직이 되풀이했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