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66화 (66/150)

# 066. 누룽지 맛 사탕 (1)

병원 검사실.

“이상 무. 역시 전보다 더 강해졌구나. EF가 1,800대까지 올라왔는데?”

태호가 혜성의 몸에 붙은 각종 센서를 떼어주며 말했다.

“이제 곧 2,000까지 찍는 건가?”

혜성은 오른팔을 크게 돌려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전보다 힘이 넘쳤다. 프로틴을 먹거나 근력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근육도 더 크고 단단해진 것 같았다.

“상대의 아이템을 카피하는 아이템이라고? 주인하고 똑같네. 아이템 이름이 뭐야?”

“개발 당시 코드명은 카피캣이라던데. 아직 정식으로 이름을 붙이진 않았어.”

“아무튼 그걸 쓸 때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고 했지? 조심해. 대수영도 그렇지만, 일부 유니크 아이템은 독특한 자의식이나 특성이 있거든. 아직 활성화된 지 얼마 안 돼서 지금이야 괜찮은 것 같지만, 자주 사용하면 언젠가 크게 한번 문제가 생길 수도……”

언제나처럼 태호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누가 의사 아니랄까 봐 녀석은 했던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런데 너 향수 뿌리냐?”

혜성은 태호의 말을 건성으로 넘기고 녀석을 향해 코를 킁킁거렸다.

“향수라니? 약 냄새야.”

태호는 화를 내듯 목소리를 높였다. 당황한 태도. 뭔가 뜨끔한 것 같았다.

“야, 내가 병원에 몇 번을 왔는데. 아무렴 약 냄새하고 향수를 구분 못 하겠냐? 너, 여자 만나지?”

혜성은 셔츠와 재킷을 걸치며 피식 웃었다.

“무, 무슨 소리. 난 여자 같은 거 관심 없다고.”

“지랄하네. 관심이 없긴. 강지영은 남자였냐? 솔직히 말해봐. 누구냐? 사나이 태호의 순정을 훔친 여자는.”

혜성은 녀석의 옆구리를 찌르며 짓궂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태호는 메신저의 프로필도 바꾼 상태였다. 강지영 사진에서 이상야릇한 하트로. 전형적인 연애 초기 증상이었다.

“자꾸 말 돌리지 말고 네 건강이나……”

다시 태호가 혜성에게 말하는 도중이었다.

부웅, 혜성의 재킷에서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혜성은 핸드폰을 꺼내 알람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시간 얼마 안 남은 거 알지? 그 안에 꼭 성공해라. 다른 놈은 몰라도 네가 결혼하면 사회는 당연히 내가 봐야지.”

“이 새끼가. 정말 아니라니까.”

“그래, 아니라고 치자.”

혜성은 태호와 주먹을 가볍게 부딪치고 병실을 나섰다.

“참. 너 며칠 전……”

태호는 뒤늦게 뭔가 떠올라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혜성의 표정이 벽에 걸린 거울에 언뜻 비쳤다. 자신과 농담을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 축 처진 어깨가 보는 이의 마음마저 아리게 만들었다.

“네가 ‘그날’을 잊어버릴 리 없지.”

태호는 혜성이 나간 뒤에도 한참 동안 문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일까? 혜성은 요즘 들어 과장된 웃음과 농담이 부쩍 늘었다.

“그나저나 완전 개코네. 어떻게 알았지?”

태호는 뒤늦게 손목을 코에 갖다 대고 킁킁거렸다. 혜성이 알면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터.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

커피숍.

정장을 입은 사내가 혼자 구석에 앉아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혜성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요즘은 중국발 황사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몰아닥치고 있었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어 혜성도 딱히 눈에 띄지 않았다.

- 백호 길드 연일 하한가.

- 사라진 유수혁은 어디에?

- NSA, 유수혁에 1급 수배령 발동.

그는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인터넷 기사를 빠르게 훑어봤다. 벌써 사흘이 지났지만, 언론은 아직도 언리미티드 이야기로 도배돼 있었다.

“미안해요. 인터뷰가 길어졌어요.”

머리맡에서 누군가가 아는 척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마스크를 쓴 강지영이 고개를 삐죽 내밀고 태블릿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저도 태호 병원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혜성은 태블릿을 작은 백팩에 넣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둘 다 바쁜 사람이었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할 말이 많을 거예요. 유수혁은 어디에 있는가? 왜 대전 도중 폭주했는가? 유수혁과 블랙의 관계는? 그때 날 구해준 건 정말 SJ의 한수은인가?”

강지영은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말문을 열었다. 혜성의 생각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맞습니다. 문자나 전화로 들을 수도 있겠지만, 직접 만나서 듣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거든요.”

“잘하셨어요. 안 그래도 보여줄 게 있었거든요.”

강지영은 빙그레 웃으며 백팩에서 작은 서류철을 꺼냈다.

“이게 뭡니까?”

혜성은 고개를 갸웃하며 서류를 훑어봤다.

어딘가의 자금거래명세였다. 중간에 적힌 LK 로직스라는 회사명이 눈에 띄었는데,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유수혁의 컴퓨터에서 얻어낸 자료예요. 아직 속단은 이르지만, 블랙의 자금세탁과 관련된 것 같아요. 테러를 하든 조직을 운영하든, 뭐든 돈이 있어야 가능하잖아요? 페이퍼 컴퍼니를 내세워 자금줄을 관리하는 건 고전적인 수법이죠.”

“이걸 유수혁이 갖고 있었다고요?”

“네. 유수혁이 최근에 한, 중, 일 연합작전을 하며 일본 쪽 능력자들과 접촉했잖아요. 그 과정에서 뭔가를 알아낸 것 같아요.”

강지영은 쓰게 웃으며 이번 사건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블랙의 자금거래자료 입수 및 거래. 블랙의 힘을 남용하고 폭주. 일본으로 도주. 그제야 혜성은 유수혁이라는 거대한 퍼즐이 하나로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추론이에요. 정확한 건 좀 더 조사해야 해요.”

이윽고 강지영이 긴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KIS 엔터테인먼트는요?”

“거기는 NSA에서 조사에 착수했어요. 일전에 혜성 씨한테 당한 지하 마켓 있잖아요. 거기의 실세와 관련된 것 같아요.”

“지하 마켓이라. 난 블랙과 지하 마켓, 양쪽에서 공공의 적이 된 건가?”

혜성은 인사동의 마켓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그 때문에 마켓 전체가 NSA에 노출되고 폐쇄된 상태였다.

“유수혁을 데려간 놈은 어떻게 됐습니까? 만병귀 말입니다.”

“아직 모르겠어요. 인천 공항으로 들어온 흔적은 찾았는데, 나간 건 못 찾았거든요. 일본으로 밀항했거나 서울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 같아요.”

사건이 종결됐지만, 여전히 개운치 않았다. 조만간 2부가 시작될 거 같은 느낌이었다.

“놈은 유수혁보다 강한……”

혜성이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강지영의 핸드폰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알람을 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오래 자릴 비울 수가 없어요.”

“제가 더 죄송하죠. 바쁘신 거 뻔히 알면서 불러냈는데.”

“아무튼 블랙은 당분간 움직이기 어려울 거예요. NSA에서도 혜성 씨를 배려해서 한동안 임무를 안 맡길 거 같고. 모처럼 시간이 생겼는데 뭐 할 생각인가요? 또 비무행인가요?”

강지영이 서류철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비무행이라. 뭐 그것도 좋습니다만, 잠깐 부모님을 좀 뵙고 싶습니다. 며칠 전이 어머니 생신인 것도 잊고 있었거든요.”

“흠. 두 분은 지금 신분을 숨기고 계시지 않나요? 그게 될까요?”

“당연히 직접 만나는 건 안 되죠. 그저 먼발치에서 얼굴이라도 한번 뵙고 싶어요. 물론 기관에서 반대하면 어쩔 수 없지만.”

혜성은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글쎄요. 혜성 씨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강지영은 고개를 가로저으려다가 말을 도로 삼켰다. 혜성의 씁쓸한 얼굴을 보니 차마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조심하세요. 적은 언제, 어디서 혜성 씨의 가족을 노릴지 모르니까요.”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몸을 돌렸다.

커피숍을 나서기 전, 그녀는 혜성을 다시 한번 돌아봤다. 혜성은 멍한 표정으로 태블릿에서 뭔가를 보고 있었다. 세상의 활기와 동떨어진 모습.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무대에서 그 혼자만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이제 4개월 반쯤 남은 건가?”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커피숍의 문을 밀었다.

***

수원시 J 시장 어귀.

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비상깜빡이를 켜고 대로변에 멈춰 섰다.

“시간은 최대 30분.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밥만 먹고 빨리 와야 해. 눈을 마주치거나 다섯 마디 이상 말하면 안 되고. 만약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잽싸게 도망쳐. 이건 자네가 아니라 자네 부모님을 위해서 하는 말이야. 명심하게.”

장진우는 사내의 옷매무시를 점검하며 재차 주의를 줬다.

이미 수십 번이나 똑같은 말을 했지만, 여전히 불안한 눈치였다. 주위에 대기 중인 요원도 서른 명. 겉보기엔 요원 하나가 승합차를 타고 외출한 것뿐이었지만, 뒤에서는 VIP 경호를 방불케 하는 특급 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사내는 떨리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외모. 지나가다 한두 번은 들었을 것 같은 목소리. 평범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변장한 혜성이었다. 천면 여우의 가면, 회색 부엉이의 울대, 각종 변장 도구 등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계셨다니.’

그는 크게 심호흡하며 차에서 내렸다.

시장 구석, ‘성진 순대국밥’으로 향했다. 혜성은 식당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췄다. 코가 시큰했다. 혜성의 ‘성’, 혜진의 ‘진’을 딴 게 분명했다.

“여기까지 와서도 순대국밥집인가?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으니까. 이렇게 시장 한복판에 숨어 계시는 게 오히려 안전하겠지.”

혜성은 주위를 둘러봤다. 건어물 가게, 마트, 과일 가게 등의 주인들과 눈이 마주쳤다. 경호와 잠복 임무에 특화된 NSA의 요원들이었다. 그는 요원들과 짧게 눈인사를 하고 순대국밥집에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낯선 아줌마가 행주로 테이블을 정리하며 건성으로 외쳤다.

평일의 조금 늦은 점심시간. 열두 개의 테이블은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순대 특유의 구수하면서도 옅은 비린내가 후각을 자극했다.

마침 구석에 자리가 하나 났다.

“여기 특 하나요. 반반 섞어서요.”

혜성은 식당을 한번 둘러보고 자리에 앉았다. 홀과 카운터를 겸하는 아줌마 둘만 바쁘게 움직일 뿐. 정작 만나고 싶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손님이 많으니 조금 안심이 됐다.

잠시 후 뚝배기에 펄펄 끓는 순댓국이 나왔다. 들깻가루 한 스푼 반, 후추와 새우젓 약간. 혜성은 국물을 훌훌 불어 혀를 축였다가 멈칫했다. 알싸한 청양고추가 버무려진 특유의 맛. 어렸을 때는 그렇게 먹기 싫어했던 익숙한 맛이었다.

‘아직도 주방에서 직접 만드시나? 하긴, 다른 건 몰라도 음식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분이 아니지.’

아무래도 국밥이 너무 맵고 뜨거운 것 같았다. 눈에 뿌연 액체가 맺혔다. 혜성은 눈을 빠르게 깜빡인 뒤 다시 숟가락을 움직였다.

무슨 맛인지 느껴지지 않았다. 감정을 애써 삭이며 기계적으로 씹고 넘기는 행위를 반복했다. 식사 틈틈이 고개를 슬쩍 들고 주방 쪽을 쳐다봤지만, 보고 싶었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손님이 계속 몰리는 통에 주방은 더욱 바빠졌다.

이윽고 뚝배기를 비스듬히 세우고 국물을 마시려던 참이었다. 삐빅, 손목시계의 알람이 짧게 울렸다. 30분 종료.

“잘 먹었습니다!”

그는 악을 쓰듯 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 안까지 들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다른 손님들의 시선이 잠깐 그에게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돈 여기 있어요.”

혜성은 지갑에서 흰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마음 같아선 주방이라도 한번 기웃거리고 싶었지만, 장진우가 했던 당부가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그냥 지나다가 들른 손님이다. 여기 주인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다. 빨리 가자.’

그는 가자는 말만 속으로 되뇌며 가게를 나왔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상했다. 이곳에 올 때는 그렇게 멀게 느껴졌는데, 막상 가게에서 나오니 금방 시장 입구에 도착했다. 장진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승합차의 문을 열고 그를 맞이했다.

장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면에 가려진 혜성의 무덤덤한 얼굴을 본 뒤,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가 막 승합차에 오르려는 찰나였다.

“아이고, 손님! 잠깐만요!”

뒤에서 아줌마가 숨넘어갈 듯 그를 부르며 달려왔다. 녹색 앞치마를 목에 두른 채였다.

약간 굽은 허리. 나이에 비해 자글자글한 주름. 그리고 귀까지 덮은 파마머리. 그와 여동생을 반반씩 섞어놓은 듯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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