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65화 (65/150)

# 065. 승자와 패자 (5)

5분 전, 케이지 아래.

“……혜성 씨, 이혜성!”

혜성은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걸 들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인 것 같긴 한데, 정확히 누군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문득 손에서 이질적인 감촉이 느껴졌다. 장갑을 끼운 모양이었다.

“시간이 없어요. 내 말 잘 들어요. 이건 혜성 씨를 위한 신형 아이템이에요. 동기화를 끝낸 상태니까 바로 사용이 가능해요. 일종의 아이템 카피. 혜성 씨가 적의 아이템으로 인해 받은 데미지를 카피하는 거죠.”

상대는 낮고 빠른 목소리로 설명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데미지와 아이템 카피라는 말은 언뜻 귀에 들어왔다.

이어서 손을 통해 따뜻한 기운이 전달됐다. 치료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체내에 있는 시계의 태엽을 뒤로 감는 느낌이었다.

부웅, 은은한 서기를 뿜으며 2차 각성이 돌아왔다. 유수혁의 무형검에게서 받은 데미지도 함께.

혜성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시에 상대가 누군지 깨달았다.

‘한수은?’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치료하고 달라요. 어떻게 보면 당신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죠. 이게 어떤 의미인지 언젠가 알게 될 날이 올 거예요.

이제야 혜성은 그녀가 말한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체내의 시계를 5분 전으로 돌린다. 그건 곧 유수혁에게서 받은 데미지와 이를 통한 카피 능력도 되살아난다는 뜻. 그리고 그중에서 무형검에 당한 데미지는 장갑으로 전송될 터였다.

‘이게 바로 무형검의 감각인가?’

잠시 후, 혜성은 씨익 웃으며 VIP존 구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

케이지 중앙.

아직 수증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가운데, 혜성과 유수혁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이며 교차를 반복했다.

채채챙, 날카로운 금속성이 귀 따갑게 울려 퍼졌다. 양쪽의 무형검은 대등한 수준. 결국 싸움의 변수는 혜성이 카피하지 못한 다른 스킬, 천사의 빛이었다.

- 온다!

대수영이 긴급 신호를 보냈다. 퍼엉, 거의 동시에 유수혁의 검지에서 한 줄기 빛이 발사됐다.

“안 통한다니까.”

혜성은 고개를 옆으로 살짝 움직여 공격을 피했다.

천사의 빛은 무형검과 함께 사용할 때 시너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형검이 혜성의 카피본에 완전히 막힌 상태. 천사의 빛이 빠르고 위협적이긴 해도 주의하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천사의 빛은 그만 쓰는 게 좋을 거야.”

혜성이 유수혁의 주위를 시계방향으로 맴돌며 외쳤다.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다. 진심 어린 경고였다.

“이 개새끼가!”

유수혁이 잔뜩 독이 올라 천사의 빛을 마구 쏘아댔다. 옅은 수증기 속에서 그의 녹색 눈자위가 더욱 섬뜩하게 빛났다.

“완전히 맛이 갔군. 한 번 더 간다.”

혜성은 3차 각성의 감각을 떠올리며 틈을 엿봤다. 유수혁은 공격이 거칠어지는 것과 비례해 빈틈도 늘어났다.

- 지금이다!

타이밍을 재고 있던 대수영이 급하게 외쳤다. 유수혁이 혜성의 잔상을 향해 거대한 천사의 빛을 발사하려던 참이었다.

퍼펑, 유수혁의 손에 맺힌 천사의 빛이 돌연 폭발했다. 천사의 빛은 아직 그의 검지에 맺혀 있던 상태. 살점과 피가 튀고 뼈가 드러났다.

“크아아!”

유수혁은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 쥐고 무릎을 꿇었다. 처절한 비명을 길게 지르며. 극심한 고통 탓에 얼굴을 비롯해 상반신 전체를 덜덜 떨었다.

“그 냉정한 유수혁이 이렇게 흥분하다니. 역시 제정신이 아니군.”

혜성은 막 유수혁의 품을 파고들려다가 멈췄다.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유수혁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혜성을 노려보며 외쳤다.

“네 팔을 망친 건 너 자신이다.”

혜성은 착잡한 얼굴로 유수혁을 내려다봤다.

누구나 인정하던 대한민국의 차세대 에이스.

한때는 자신의 우상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유수혁과 싸우는 걸 엄청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는 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 미치광이일 뿐. 뇌전의 광견과 다를 게 없었다.

혜성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천사의 빛은 명(明) 속성, 반면 네가 손댄 몬스터의 힘은 기본적으로 암(暗) 속성이다. 아무리 듀얼 각성자라고 해도 상반된 속성을 동시에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지. 이건 상식이잖아.”

상극인 두 속성의 충돌.

초반에야 유수혁이 강력한 EF로 충돌을 억눌렀지만, 자멸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유수혁답게 마무리하자. 깔끔하게.”

혜성은 양손을 슬쩍 들었다. 열 자루의 무형검이 둥실 떠올라 유수혁을 포위했다.

***

“누구 맘대로?”

뒤에서 누군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혜성과 유수혁은 동시에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범한 검은색 가죽 갑옷을 입은 자가 장검을 들고 돌진해 왔다. 다소 마른 듯한 체형. 흰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검을 연상시키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블랙이냐?”

혜성은 왼손을 저어 무형검 다섯 자루를 날렸다.

그는 상대가 누군지 직감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자. 바로 만병귀였다.

만병귀의 장검이 원을 그리듯 움직였다. 까깡, 무형검 다섯 자루가 간단히 튕겨 나갔다.

‘이걸 쳐내?’

혜성은 오기가 생겨 양손을 크게 휘저었다. 이번엔 열 자루가 사방에서 만병귀를 덮쳤다.

“흥!”

만병귀는 달려오는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몸을 팽이처럼 빙글 돌렸다. 까까깡, 요란한 불꽃과 함께 열 자루도 거의 동시에 튕겨 나갔다.

혜성이 무형검을 회수하려는 찰나, 놈은 상체를 숙이고 용수철처럼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칫!”

혜성이 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만병귀의 검이 훨씬 빨랐다. 놈의 검은 일직선으로 쭉 뻗어 나와 혜성의 가슴을 찔렀다. 챙, 암흑의 수호자 덕분에 겨우 관통상을 면했지만, 검에 실린 힘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쾅, 혜성은 그대로 구석의 철망에 처박혔다.

“오늘은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만병귀는 검을 빙글 돌려 손잡이로 유수혁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그리곤 기절한 유수혁을 어깨에 둘러메고 높이 솟구쳤다.

“멈춰!”

혜성이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는 순간, 놈이 사라진 천장에서 회색 연기가 쏟아졌다.

케이지 밖의 동료들이 도와줄 틈도 없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강하다. 유수혁, 아니 그 이상인가?”

혜성은 다리가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쌓인 데미지가 뒤늦게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형!”

“선배님!”

막내와 한수호가 달려오는 모습을 어렴풋하게 보며, 혜성은 옆으로 쓰러졌다.

***

그날 밤.

SJ 기획, 소회의실.

벽에 걸린 대형 TV에선 뉴스 속보가 한창 나오고 있었다. 장소는 이벤트가 열린 체조경기장.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체육관 입구를 배경으로 혜성을 비롯한 능력자들이 들것에 실려 나오고 있었다.

- ……한편 도주한 유수혁이 남긴 소지품에선 마약류의 금지 약물이 대량으로……

아나운서가 상기된 얼굴로 사건을 설명했다.

언리미티드 대회 도중, 마약류의 약물을 복용한 유수혁이 폭주했다. 다행히 혜성을 비롯한 참가자들이 나서 관객들의 피해를 막았지만, 그 과정에서 참가자들 대다수가 죽거나 크게 다쳤다는 내용이었다. 중간에 난입했던 여자, 마지막에 유수혁을 데리고 사라진 만병귀, 블랙 등은 언급되지 않았다.

“언론사 대응은 다 끝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유수혁의 약물 중독으로 인한 폭주로 일단락 지었습니다. 다만 유수혁의 행방을 알아내는 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중간에 혜성을 치료했던 여기자였다. 안경을 벗고 얼굴을 문지르자, 가면 뒤에서 한수은의 얼굴이 나타났다.

“새 아이템은 어때?”

박무영은 리모컨을 들어 TV를 끄며 물었다.

“이혜성에게 확실히 전달했습니다. 아이템을 카피하는 아이템이라니. 이혜성에게 잘 어울리는 물건입니다.”

“잘됐군. 그래, 유수혁을 데려간 놈의 정체는?”

“놈은 아직 추적 중입니다. 코드명 만병귀. 블랙과 관련이 있다는 막연한 정보만 알아냈습니다. 역시 제가 놈을 따라갔어야 하는 건데.”

한수은은 분한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네는 혜성을 치료하느라 기력을 소진한 상태였잖나. 제 역할을 다 했네.”

박무영은 쓰게 웃은 뒤 화제를 돌렸다.

“유수혁의 뒷조사는 어땠나?”

“안 그래도 조금 전에 보고서가 들어왔습니다. 박태준의 진술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유수혁의 사무실, 집, 통신기록 등을 샅샅이 훑었습니다.”

한수은은 준비해 간 파란 서류철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그의 파괴된 하드디스크에서 자료 일부를 복원했습니다. 한, 중, 일 연합작전을 수행하던 중에 일본 측 관계자에게서 뭔가를 알아낸 것 같습니다.”

“일본이라고? 뭐야?”

박무영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서류를 확인했다.

여러 사람 명의의 계좌와 복잡한 거래명세서였다. 조직에서 제일 중요한 건 역시 돈. 지하 조직의 자금 세탁 자료였다. 페이퍼 컴퍼니도 낀 듯 중간에 LK 로직스라는 물류 회사가 보였다.

“블랙의 자금 흐름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유수혁은 이걸 미끼로 일본에서 블랙 측 인사와 몇 차례 접촉했던 것 같습니다. 박태준도 블랙의 인사 몇 명을 멀리서 본 적이 있다고 증언했습니다.”

“블랙이라. 하긴, 유수혁의 성격이라면 블랙의 힘에 관심이 많았을 테지.”

박무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끝을 흐렸다.

유수혁이 먼저 블랙의 힘을 요구했는지, 아니면 블랙이 먼저 힘을 제안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블랙의 힘을 사용하고, 그 부작용으로 폭주에 이르렀다는 사실이었으니까.

“호텔에서 일어났던 화재는 유수혁이 블랙의 힘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우발적 사고인가? 블랙의 힘을 탐하다니. 너무 나갔군.”

박무영은 검지로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벤트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벤트의 배후에는 누가 있었나? 블랙은 어디까지 개입됐나? 그리고 만병귀의 정체는 무엇인가? 여러모로 의문이 남는 사건이었다.

“혹시 블랙의 목적은 처음부터 이혜성과 유수혁, 둘 다가 아니었을까? 블랙 입장에서 보면 유수혁은 자신들의 약점을 쥐고 있는 골칫덩어리이자,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인재지. 그리고 이혜성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적이고.”

흩어진 퍼즐 조각들이 서서히 하나로 합쳐졌다.

유수혁의 호승심을 이용해 둘의 대결을 끌어낸다. 제일 좋은 그림은 폭주한 유수혁이 이혜성을 죽이는 것. 하지만 둘이 무승부를 거두거나 혜성이 이기면, 만병귀라는 놈이 나서서 처리한다. 아마 이게 놈들의 원래 계획이었을 것이다.

변수는 한수은의 개입이었다. 때문에 만병귀는 계획을 변경, 차선책으로 패배한 유수혁을 빼돌리고 도주했을 것이다.

“블랙. 실패했어도 상당히 남는 장사를 했군. 유수혁을 데려가다니.”

박무영은 쓰게 웃으며 보고서를 돌려줬다.

“당분간 또 정신없겠군. 일본 애들이 맘에 썩 들진 않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지. 걔들한테 협조 요청해. 이걸 단서로 블랙을 파헤친다.”

“알겠습니다.”

한수은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블랙과의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자정 무렵, 컨테이너가 밀집한 부산항 외곽.

낡은 승합차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끄고 천천히 나타났다.

“드디어 오셨군.”

사내는 피우던 담배를 던져 발로 끄고 승합차를 맞이했다. 달도 없어 어두침침했지만, 짙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이윽고 승합차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몸을 내밀었다. 팔에 깁스를 하고 있는 유수혁이었다. 조수석에서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내려 부축하려 했지만, 유수혁은 차갑게 뿌리치고 혼자 내렸다.

“다시 오실 줄 알았습니다.”

선글라스의 사내는 넉살 좋게 말하며 유수혁의 오른손을 힐끔 쳐다봤다.

일반적인 외상이 아니었다. 상반된 두 속성의 충돌로 인한 붕괴였다. 앞으로는 오른팔로 싸움은 고사하고 식사도 어려울 것 같았다.

“여전히 말이 많군. 잔말 말고. 정말 ‘그 힘’을 더 얻을 수 있나?”

유수혁은 사내를 쏘아보며 물었다.

“물론이죠. 그때 드린 건 순도 10%짜리였으니까요. 당신의 재능이라면 차기 마스터도 가능할 겁니다. 대신 앞으론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거 아시죠?”

선글라스의 사내는 ‘우리’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상관없다. 강해질 수만 있다면.”

“잘 생각하셨습니다. 가시는 동안 좀 불편하시겠지만, 양해해 주십시오.”

사내는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LK 로직스’라고 쓰인 작은 화물선이 출항 준비를 마치고 대기해 있었다. 선글라스의 사내와 그 동료들이 먼저 배에 올랐다. 유수혁은 마지막으로 배에 오르다가 멈칫했다.

“이혜성. 반드시 돌아오겠다.”

그는 서울 방향을 돌아보며 노려보곤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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