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4. 승자와 패자 (4)
쏴아아, 천장에서 스프링클러의 소화액이 비처럼 쏟아졌다.
관객들은 삽시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였다. 목숨보다 호기심이 더 중요한 몇 사람만이 의자 뒤에 숨어서 고개만 삐죽 내밀고 있었다.
‘간닷!’
강철호와 지원군들은 눈빛을 교환하고 유수혁을 향해 일제히 몸을 날렸다. 어차피 무형검은 최대 열 자루. 그들도 딱 열 명이었다.
“흥! 생각한 게 고작 그거냐?”
파팟, 무형검이 유수혁을 중심으로 빛살처럼 퍼져 나갔다.
“치잇!”
그들은 반사적으로 무기를 들어 목을 보호했다. 까깡, 그들의 무기와 무형검 사이에 불꽃이 튀었지만, 모두가 막아낸 건 아니었다. 쿵, 붉은 반달의 삼룡이 길게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그 순간, 막내와 한수호도 몸을 낮추고 유수혁의 좌우에서 달려들었다. 유수혁이 좌우로 손을 뻗어 반격하려는 찰나, 둘은 무릎을 꿇고 미끄러지듯이 유수혁을 스쳐 지나갔다. 둘의 공격은 유수혁을 교란하기 위한 페이크.
유수혁의 주의가 분산된 틈을 타, 혜성이 상체를 숙이고 뒤를 파고들었다.
“그렇지!”
막내는 주먹을 움켜쥐며 환호했다. 이어서 혜성이 오른손을 유수혁의 등에 붙이고 짧게 외쳤다.
“반사!”
혜성의 손바닥에서 눈부신 섬광이 뿜어졌다.
케이지를 가득 메운 거대한 빛. 누적 데미지의 반사였다.
‘성공인가?’
모두는 홀린 것처럼 혜성과 유수혁을 바라봤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혜성은 유수혁의 등에 손바닥을 갖다 댄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2차 각성의 징후는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암흑의 수호자도 정장 형태로 돌아와 있었다.
유수혁 또한 고개만 반쯤 돌린 자세로 멈춰 섰다. 파지직, 그의 흰 갑옷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거미줄처럼 가는 실금이었지만, 이내 얼음이 깨지듯 갑옷 전체에 균열이 갔다.
“끝인가?”
한 각성자가 중얼거리자, 막내가 급히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영화나 소설 못 봤어? ‘죽었나?’, ‘끝인가?’라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거. 그럼 악당은 보란 듯이 부활한다고.”
막내는 불안한 표정으로 유수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였다. 유수혁의 검지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컥!”
끝이냐고 중얼거렸던 능력자는 눈을 부릅뜨고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가슴 한복판에 손가락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천사의 빛?”
유수혁의 오른쪽, 박태준이 경악에 차 외쳤다.
레이저처럼 뻗어 나가는 빛 속성의 공격.
무형검과 더불어 유수혁을 상징하는 스킬이었다. 누군가는 그의 두 스킬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변화무쌍한 무형검과 신속한 천사의 빛이 동시에 펼쳐질 때, 유수혁은 비로소 완전체가 된다고. 그가 18,000대의 EF로 20,000이 넘는 강자들을 쓰러뜨린 것도 바로 두 스킬의 시너지 덕분이었다.
“끝이라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거. 잊었어?”
유수혁은 피식 웃으며 혜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위험!”
박태준이 달려와 몸을 날려 혜성을 밀쳤다.
혜성은 막내와 한수호가 서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퍽, 혜성의 뒤에 있던 능력자가 가슴에 구멍이 뚫려 쓰러졌다. 거의 종이 한 장 차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혜성이 죽었을 것이다.
“씨발. 뭐 저런 게 다 있어?”
강철호와 다른 능력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저 괴물. 데미지 반사도 소용이 없는 건가?”
막내도 주춤 물러서며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효과는 있었다. 내 갑옷을 부순 건 이혜성이 처음이니까. 설마 유니크 등급의 방어구를 박살 낼 줄이야. 반탄강기가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어.”
유수혁은 균열이 간 흰 갑옷을 잡아 뜯었다. 깨진 부분 사이로 타이즈 형태의 속옷과 탄탄한 상체가 드러났다.
“더 재주가 남아 있나?”
그는 능력자들을 한번 훑어본 뒤, 마지막으로 혜성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10개의 무형검이 스르르 움직여 그의 몸을 에워쌌다.
“젠장.”
혜성은 막내와 한수호의 부축을 받아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3차 각성으로 완전히 탈진 상태. 그러나 더 큰 문제는 3차 각성의 실패에 따른 정신적 충격이었다.
“기가 막히는군. 이 정도로 수준 차이가 컸나?”
혜성은 멍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사람이 너무 놀랍거나 화가 나면 웃음만 나온다더니. 지금 혜성의 심정이 딱 그랬다.
“이제 끝내자.”
유수혁은 혜성을 향해 천천히 왼손을 들었다. 막내와 한수호가 동시에 혜성을 가로막았지만, 솔직히 놈의 공격을 받아낼 자신은 없었다.
그때였다. 퍼펑, 케이지 바닥에서 메케한 연기가 솟아올랐다. 특수 연막탄.
“끝이라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며?”
누군가가 혜성을 향해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기자석 방향이었다. 연기 틈으로 여자라는 것만 얼핏 보였다.
“누구냐?”
유수혁은 반 박자 늦게 총을 쏘듯 검지를 움직였다. 쾅, 섬광이 혜성의 그림자를 뚫고 케이지 뒤쪽의 기둥을 강타했다.
- 앞으로 5분. 어떻게 해서든 5분만 버텨요. 새로운 이혜성을 보여줄 테니까.
막내와 한수호, 강철호 등의 귀에 처음 듣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
“방금 뭐가 지나간 거야? 웬 5분?”
“새로운 이혜성?”
막내와 한수호는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둘 다 얼떨떨했다. 상대가 누구였는지도 보지 못했다. 둘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여자처럼 생긴 그림자가 혜성을 낚아채 사라진 뒤였다.
연기는 빠르게 옅어지고 있었다.
“이혜성!”
케이지 중앙,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혜성의 이름을 외치는 유수혁의 그림자가 얼핏 보였다. 천사의 빛이 마구잡이로 퍼져 나왔다.
“지금이다!”
쾅, 누군가가 높이 뛰어올라 유수혁을 공격했다. 손에 들린 거대한 도끼로 보아 강철호인 것 같았다. 나머지 능력자들도 유수혁을 향해 일제히 뛰어올랐다. 연기로 시야가 제한됐을 때가 유일한 찬스. 단숨에 기선을 제압할 생각이었다.
이상했다. 분명 상황은 그들이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거의 절망에 가까운 상태. 솔직히 5분이 아니라 1분도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혜성’이라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다시 의욕이 솟았다.
“초등학교 때 배운 과학상식 알지?”
“아, 그거 말입니까?”
막내와 한수호는 시선을 교환한 뒤 조금 뒤로 물러섰다. 쏟아지는 물줄기, 케이지를 메운 연기. 둘은 자연스럽게 뭔가를 떠올렸다.
“혜성이 형도 가만 보면 허당이야. 무적인 거 같으면서도 은근히 손이 많이 간다니까.”
막내는 투덜거리며 손에 묻은 물을 탈탈 털었다.
“혜성 선배님이 실력을 발휘할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 그게 우리의 역할 아닙니까?”
한수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소화액 웅덩이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으아아!”
막내는 괴성을 지르며 양손의 온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그의 주위가 후끈 달아올랐다. 동시에 한수호도 짧은 기합과 함께 물을 막내 쪽으로 끌어모았다.
불과 물의 조합.
답은 안개처럼 짙은 수증기였다.
***
수증기 중앙.
“젠장! 이혜성은 아직인가?”
강철호는 도끼를 수직으로 휘두르며 소리쳤다. 수증기 덕분에 무형검의 움직임이 어렴풋이 보였다. 까깡, 그를 덮치던 무형검은 가벼운 금속성을 만들며 튕겨 나갔다.
“부지런히 움직여! 함부로 접근하지 말고!”
수증기 반대편, 박태준이 장검을 휘두르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외쳤다.
퍼펑, 수증기를 가르고 천사의 빛이 일직선으로 뿜어졌다.
“으아악!”
환도를 휘두르던 능력자 하나가 공중에서 유수혁을 덮치다가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이제 이쪽도 숫자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나마도 다들 크고 작은 상처를 몇 개씩 입은 상태였다. 그들은 접근을 삼가며 원거리 공격으로 시간을 끌었다.
“이, 씨발 놈들아!”
결국 유수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윙, 그를 중심으로 대형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강철호와 남은 이들은 급히 반대쪽으로 물러섰다.
유수혁을 중심으로 수증기가 서서히 걷혔다. 시뻘겋게 변해 일그러진 그의 얼굴과 땀으로 번들거리는 상반신이 보였다.
“뭐지? 놈은 바람의 능력자가 아닌데?”
처음엔 다들 영문을 몰랐다. 하지만 잠시 후, 그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표정을 일그러뜨려야만 했다.
아무리 이성을 잃고 폭주했어도 유수혁은 유수혁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무형검이 원을 그리며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공기를 빨아들이는 환풍기의 원리였다. 막내와 한수호가 사력을 다해 만들고 있는 수증기는 빨려들 듯이 위로 흩어졌다.
왼쪽 11시 방향. 유수혁이 왼손을 들고 검지를 까딱였다. 강철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번쩍, 천사의 빛이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으악!”
비명이 길게 울렸다. 강철호의 옆에 있던 다른 능력자의 것이었다.
“이 새끼들. 다 죽여버리겠어!”
악에 받친 유수혁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질린 표정으로 서 있는 강철호와 박태준, 땀이 흥건해서 비틀거리는 막내와 한수호가 차례로 시야에 들어왔다.
유수혁은 박태준과 잠깐 시선을 마주쳤다.
“그래, 너도 있었지. 내 꼬붕짓도 질린 건가?”
“수혁 씨, 그게 아니라……”
박태준은 뭐라고 변명하려 했다.
“닥쳐.”
유수혁은 상대의 말을 끊고 손을 크게 휘저었다. 쇄액, 무형검이 바람을 가르며 남은 넷을 향해 쏘아졌다.
절체절명.
“형!”
“선배님!”
막내와 한수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기진맥진.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유수혁이 수증기를 흩어버리지 않았더라도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건 무리였다.
‘어라?’
한참을 기다려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채챙, 대신 칼끼리 부딪치는 맑고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렸다.
“뭐지?”
막내는 실눈을 뜨고 케이지 중앙을 바라봤다.
하마터면 눈물을 보일 뻔했다. 혜성이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서 있었다. 기력을 회복했는지 2차 각성의 징후도 돌아와 있었다. 정장도 일렁이는 형태로 그를 감싸고 있었다.
“이혜성!”
강철호와 박태준도 일제히 혜성을 불렀다.
“미안. 내가 좀 늦었지?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아슬아슬하게 등장하는 법이잖아.”
혜성은 모두를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뭔가 달라진 분위기. 여유를 되찾은 것 같았다.
“힐러라도 만났나?”
유수혁은 왼손을 슬쩍 휘둘렀다. 쇄액, 무형검이 날카로운 파공음을 만들며 쏘아졌다.
“그거 안 되는 거 봤을 텐데?”
혜성도 똑같이 왼손을 휘둘렀다. 채챙, 둘 사이에서 불꽃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무형검?”
누군가가 경악에 차 외쳤다.
무형검은 스킬과 아이템을 둘 다 갖췄을 때만 가능한 기술. 단순히 스킬 카피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네가 어떻게 무형검을? 설마?”
유수혁의 눈에 뒤늦게 혜성의 손이 들어왔다.
혜성은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전투할 때 쓰는 튼튼하지만 투박한 스타일이 아니었다. 정장에나 어울릴 법한 날렵한 가죽 장갑이었다.
“이게 무형검인가? 정말 대단한 기술이군.”
혜성은 어깨를 으쓱하며 양손을 어깨 높이로 들었다. 주위에 남아 있던 수증기가 단검 모양으로 흩어졌다. 유수혁과 똑같은 형태. 하지만 풍기는 예기는 오리지널보다 날카로웠다.
그와 유수혁의 싸움은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다들 내려가 있어. 오늘 저놈하고 끝장을 볼 테니까.”
혜성은 유수혁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그의 주위를 맴돌던 단검들이 스르르 움직여 유수혁을 향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무형검에는 무형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