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3. 승자와 패자 (3)
- 와! 유수혁! 유수혁! 유수혁!
유수혁을 연호하는 함성이 더욱 커졌다. 혜성을 부르던 함성은 슬그머니 사라진 상태. 경기장은 유수혁의 팬들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케이지 왼쪽 하단 코너.
“그래, 이거야!”
유수혁은 혜성의 앞을 막고 소나기처럼 공격을 퍼부었다. 평소의 차가운 신사 이미지가 아니었다. 광기와 희열에 사로잡힌 악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역시 대수영은 명분. 그저 나와 싸우고 싶었던 것뿐이었나?’
더는 물러설 곳도 없는 상황이었다. 혜성은 철망에 등을 기댄 채 대검을 휘둘렀다.
까까깡, 검신에서 불꽃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좌우에서는 무형검의 기습, 정면에서는 유수혁의 타격기.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정도로 실력 차이가 컸나?’
그는 분명 유수혁의 힘을 증폭해서 카피한 상태였다.
유수혁처럼 무형검을 펼치지 못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무형검을 펼치기 위해선 스킬 외에도 유수혁이 손가락에 끼고 있는 아이템이 필요했으니까. 경험과 기술에서 밀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힘과 스피드에서도 열세인 건 의문이었다.
‘설마 유수혁은 싸우면서 더 강해지는 건가?’
문득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중지의 반지를 힐끔 내려다봤다. 예상대로 보라색 빛이 더 강해져 있었다.
빛의 선명도에 비례해서 유수혁의 공격도 점점 빠르고 거칠어졌다. 워낙 빠르게 움직이며 공격하는 통에 대수영의 예측도 소용없었다. 그나마 암흑의 수호자 덕분에 치명상만 면하고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혜성의 절대적인 위기. 콰직, 어느 순간 대검의 가운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퍼펑, 유수혁의 뒤에서 화염이 폭발했다. 막내였다. 흰 갑옷 때문에 충격을 주진 못했지만, 유수혁의 시선을 잡아끄는 데는 충분했다.
유수혁이 상체를 돌리려는 찰나, 다시 작은 그림자가 그의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번엔 단검을 든 한수호였다. 녀석은 유수혁의 뺨을 노리고 단검을 휘둘렀지만, 유수혁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혀 피했다.
막내와 한수호는 자세를 낮추고 잽싸게 물러섰다.
“잔챙이 새끼들이.”
유수혁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오른손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하마터면 상처가 날 뻔했다. 그는 이를 부득 갈며 둘을 쏘아봤다.
“미안. 우리는 팀이라.”
막내가 특유의 작은 불꽃을 검지 끝에 맺으며 히죽 웃었다. 마치 놈을 놀리는 것처럼.
“선배님, 괜찮으십니까?”
한수호가 오른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혜성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는 코너에서 벗어나 자세를 바로 한 상태였다. 창백해진 얼굴과 흥건한 땀. 고전한 티가 역력했다.
“이 새끼들이! 삼 대 일이냐?”
반대쪽 케이지 밖에서 박태준이 욕설을 내뱉으며 나서려 했다. 백호의 동료는 케이지에 난입하기 위해 철망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유수혁은 오른손을 슬쩍 들어 둘을 막았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그는 입술로 혀를 핥으며 상체를 부르르 떨었다. 광기를 넘어서 희열마저 느끼는 것 같았다.
“수혁 씨. 인제 그만……”
박태준은 반박하며 끼어들려다가 유수혁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충혈된 눈. 넘실거리는 살기. 다른 사람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눈치였다.
“역시 그 약 때문인가?”
박태준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는 동료에게 눈짓한 뒤, 검을 거두고 케이지 입구에서 물러났다.
“스톱! 경기는……”
멀리서 지켜보던 심판이 급히 손을 휘저으며 다가왔다. 대전을 중지시키기 위함이었다.
유수혁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심판을 노려봤다.
“컥!”
돌연 심판의 움직임이 멈췄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쿵, 그는 뒤로 짚단처럼 허물어졌다.
이어서 심판의 목에서 피가 콸콸 뿜어졌다. 무형검에 당한 흔적이었다.
“수혁 씨!”
박태준과 백호 길드의 사내도 철망을 뛰어넘어 케이지에 진입했다.
“참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유수혁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왼손을 움직였다.
박태준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컥, 뒤따르던 백호의 능력자가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졌다. 심판과 마찬가지로 예리하게 잘린 목에서 피가 뿜어졌다.
“뭐야?”
“갑자기 왜 저래?”
관중석 여기저기서 의아한 웅성거림이 터졌다. 처음엔 유수혁의 쇼인 줄 알았다. 그러나 케이지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피가 경기장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자, 쇼는 곧 공포로 변했다.
- 유수혁이 미쳤다!
- 으아악! 사람 살려!
관객들은 비명을 지르며 앞다투어 비상구 쪽으로 뛰어갔다. 구경보다 중요한 건 목숨. 서로 밀고 밀리는 통에 경기장은 이내 아수라장이 됐다.
“누구 맘대로 끝낸다는 거야?”
유수혁은 눈을 붉게 빛내며 양손을 허리 높이로 올렸다.
그 순간, 혜성은 뭔가를 떠올렸다. 사령의 던전에서 만났던 광폭화 된 능력자들. 광기에 찬 그들의 얼굴이 유수혁의 얼굴에 오버랩됐다.
동시에 장진우가 커피숍에서 했던 말도 생각났다. 몬스터 힘의 융합으로 인한 능력치 증폭. 하지만 그에 따른 이지 상실과 폭주라는 부작용이 있다고 했다.
“역시. 블랙의 힘에 손을 댄 건가?”
혜성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유수혁이 블랙이라는 게 확실해졌다. 더 이상의 대전은 무의미했다. 케이지 중앙에 있는 유수혁을 중심으로 혜성과 막내, 한수호가 삼면으로 그를 포위했다.
“젠장.”
박태준도 쓰러진 동료와 유수혁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막내와 한수호의 사이에 섰다.
“크하하핫! 그래. 다 덤벼라! 난 유수혁이다!”
유수혁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포효했다.
혜성의 반지에서 뿜어지는 보라색 빛이 갈수록 짙어졌다.
***
케이지 남쪽 기자석.
“……난 유수혁이다!”
유수혁의 광기에 찬 외침이 체육관에 크게 메아리쳤다.
기자석의 상황은 관중석과 비슷했다. 관객들을 따라 도망치느냐,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남아 대박을 노리냐. 다들 갈팡질팡했다.
“에이, 씨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능력자 싸움에 휘말려서 죽고 싶어? 일단 튀어!”
“야, 이런 대박이 흔한 줄 알아!”
기자들의 선택은 반반이었다. 일부는 관객들에 섞여 비상구 쪽으로 달려갔고, 일부는 케이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도망쳐 핸드폰을 꺼내 촬영을 계속했다.
“머저리 새끼들. 이런 거로 호들갑이라니.”
단 한 명, 기자석 중앙에 앉아 있는 여기자는 예외였다. 파티에서 혜성을 기다렸지만, 제대로 말도 못 붙인 기자였다. 그녀는 제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고 케이지를 올려다봤다.
부웅,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 번호가 제한된 전화였지만, 그녀는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지금 이곳의 상황은 전국에 생중계되고 있었으니까.
“……네, 네. 상황이 예상을 벗어났습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이혜성에게 유수혁과 블랙의 관계를 흘린 것 같습니다.”
그녀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가 뭐라고 말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듣기만 하다가 보고를 재개했다.
“유수혁은 싸울수록 블랙의 힘을 흡수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 정확한 수치가 나오진 않았습니다만, 이혜성을 각성시켰을 때보다 훨씬 강해진 걸 눈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유수혁의 상태를 짧게 요약했다.
혜성과의 싸움으로 인한 EF의 순환. 다시 이를 통한 몬스터 힘의 흡수 가속화 및 폭주.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네, 네. 맞습니다. 무형검을 깨지 못하는 한, 이혜성에게 승산은 없습니다. 역시…… 이혜성의 세 번째 무기를 전달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녀는 세 번째를 강조하고 전화를 끊었다.
***
케이지 중앙.
유수혁은 처음의 그 자리에 서서 손만 가볍게 휘저었다. 광기 어린 웃음을 흘리며. 혜성을 비롯한 다른 능력자들을 갖고 노는 것 같았다.
“씨발, 뭐 저런 사기템이 다 있어? 인간적으로 너무하는 거 아냐?”
막내는 입에서 욕이 절로 나왔다.
무형검.
아차 하는 순간 상대의 목을 긋는 최강의 무기였다. 소리에 집중해 용케 피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래선 유수혁을 공격하는 건 고사하고 접근조차 어려웠다.
그가 화염을 날리고 뒤로 물러나려던 찰나였다.
“막내야, 위!”
오른쪽에서 혜성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위?’
막내는 한 걸음 물러서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대형 스크린, 조명, 환기 시설, 각종 철근 구조물, 그리고 화재경보기와 스프링클러…….
“아!”
그는 천장을 훑어보다가 뒤늦게 혜성의 의도를 파악했다.
“이거다!”
막내의 화염구가 화재경보기를 스치고 천장을 강타했다. 가뜩이나 경기장은 관객들의 비명 때문에 혼란스러운 상황. 곧 화재경보기가 숨넘어갈 듯 울어대는 가운데, 스프링클러가 분수처럼 터졌다.
쏴아, 소화액이 비처럼 쏟아져 유수혁을 적셨다.
“이 새끼들 보게?”
그는 피식 웃으며 공격을 멈췄다. 그의 주위에서 소화액이 뭔가에 부딪혀 튕겨 나가는 것이 보였다.
“저게 무형검의 정체인가?”
혜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떨어지는 소화액을 유심히 관찰했다. 곧 그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허공에 둥실 떠 있는 10개의 단검이었다. 무형검은 정확히 말하자면 형태가 없는 무기가 아닌, 형태가 보이지 않는 원격 무기였다.
“무형검의 비밀을 간파하다니. 제법 머리를 굴렸군.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할 셈이지?”
유수혁은 조소를 머금고 주위를 쓰윽 둘러봤다. 몬스터를 연상시키는 녹색 눈동자. 그의 눈에 서린 광기가 더 짙어졌다. 단검의 끝도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혜성을 비롯한 모두는 당황하며 한두 걸음씩 물러났다. 그때였다.
“어떻게 하긴? 넷으로 안 되면 물량을 더 쏟으면 되는 거지.”
케이지 왼쪽 입구에서 씩씩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
혜성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철호가 특유의 큰 도끼를 어깨에 걸친 채 케이지에 오르고 있었다.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보아하니 유수혁이 제정신은 아닌 것 같고.”
“천하의 유수혁이라도 이 정도는 힘들걸?”
붉은 반달의 삼인방을 포함한 능력자 아홉 명이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차례로 올라왔다. 탈락했지만 관전을 위해 남은 자들이었다.
“좋았어!”
막내는 주먹을 움켜쥐며 작게 환호했다.
이들은 전국에서 이름 꽤 날리는 능력자들이었다. 게다가 무형검의 정체도 알아낸 상태였다. 제아무리 폭주하는 유수혁이라도 이 정도면 해볼 만했다.
막내가 다시 전열을 가다듬으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혜성이 무거운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아직 좋아하긴 일러. 잊었어? 유수혁은 듀얼 각성자라는 거. 하긴, 유수혁이 듀얼 스킬을 풀가동한 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니까.”
혜성은 케이지 중앙,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유수혁을 눈으로 가리켰다.
듀얼 각성자.
아주 희귀하게 두 개의 서로 다른 스킬을 지닌 능력자였다. 지금까지 유수혁이 보여준 건 무형검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스킬 하나. 나머지 능력은 보여주지 않은 상태였다.
“아!”
그제야 막내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무형검에만 신경 쓰느라 깜빡했다. 유수혁이 듀얼 스킬을 펼치면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난다는 것을. 강철호를 비롯해 많은 능력자가 그를 포위했지만,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냐. 놈은 블랙의 힘을 흡수하며 싸울수록 강해지고 있거든.”
혜성은 유수혁과 힐끔 시선을 마주친 뒤 입술을 달싹거리듯 속삭였다.
“네가 시간을 좀 끌어라. 3차 각성. 누적 데미지 반사로 단숨에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