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62화 (62/150)

# 062. 승자와 패자 (2)

객실에 돌아온 뒤.

한수호는 소파에 앉아 각 게시판의 댓글을 확인했다. 한마디로 난리가 났다. 그는 그중에서 추천을 많이 받은 글들만 간단히 소리 내 읽어줬다.

- 이건 이혜성이 유수혁에게 공개적으로 도전한 거 아니냐?

- 그러게. 처음엔 자신 없다고 빼더니. 화려한 무대를 위한 큰 그림이었나?

- 2차 각성하면 능력치는 이혜성이 앞서겠지만. 문제는 유수혁의 시그니처 아이템 아닌가?

- 경험 면에서도 차이가 크잖아. 유수혁은 중딩 때 AA급들을 깨고 다닌 거 잊었어?

……

한수호는 댓글 읽기를 슬그머니 중단했다.

간혹 혜성의 승리를 예상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유수혁의 우세를 점쳤다. 심지어 혜성의 팬 카페에서도 이번 대결의 목적은 혜성의 수련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이상한데요? 국장님이 의외로 잠잠하단 말이에요. 당장 호텔에 들이닥치고도 남을 양반인데. 정말 소문대로 여의도 높으신 양반들이 개입된 건가?”

막내가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아 화제를 돌렸다. 한수호에게 슬쩍 눈치를 주며.

“저도 이해가 안 됩니다.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꾸신 겁니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한수호는 핸드폰을 도로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누군지 알겠냐?”

혜성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줬다. 유수혁과 회색 마스터가 나란히 찍힌 사진이었다.

“블랙의 마스터? 왜 유수혁하고 같이 있는 거야?”

막내가 신음처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장진우가 인맥을 총동원해 그를 찾아보고 있었지만, 아직 별다른 소득이 없는 상태였다. 정보실 쪽에 있는 요원들도 감감무소식. 그런데 뜬금없이 유수혁과 일본에서 만났다? 뭐가 뭔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이 노인이 최면술사들의 스승인가요?”

한수호도 막내를 통해 혜성과 블랙의 악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대번 눈을 크게 뜨고 혜성과 사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혜성은 백팩에서 삼두 거북이 케이스를 꺼냈다. 안에는 반지 형태의 작은 아이템이 들어 있었다.

“송도에서 새로 개발한 프로토타입 아이템이다. 블랙은 전력을 다하면 몬스터의 힘이 섞인 특수한 파장을 뿜어댄다더군. 이건 그 특수한 파장에 반응하는 거다.”

“그래서 유수혁을 도발한 건가요?”

막내가 반지를 건네받아 불빛에 비춰보며 물었다. 언뜻 보면 평범한 금반지였다.

“유수혁이 물어본다고 대답해 줄 사람도 아니고. 블랙이냐고 직접적으로 묻기도 어렵고. 그가 블랙인지 아닌지, 내가 직접 판단하겠다.”

혜성은 날카롭게 곤두선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일은 누가 이기든 아주 화끈한 싸움이 되겠군요. 알겠어요. 박태준이랑 다른 녀석은 우리가 맡을게요. 형은 유수혁한테만 집중하세요.”

막내는 한숨을 내쉬었다.

죽은 사람처럼 숨어 지내고 있는 혜성의 부모님이 떠올랐다. 호흡기에 의지한 채 병실에 누워 있는 혜성의 여동생도 생각났다.

이 모든 것의 원흉은 블랙. 블랙과 관계가 있다는 것만으로 혜성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

다음 날, 올림픽 체조경기장.

힘찬 음악과 함께 팀 NSA가 왼쪽에서 천천히 등장했다.

“야, 진심인가 본데?”

관객들은 다들 놀라 웅성거렸다.

완전무장.

막내와 한수호는 실전에 나서는 것 같았다. 검은색 특수 갑옷과 보호대, 통신 기능을 갖춘 특수 고글, 단검 등의 다양한 무기까지. 둘은 A급 장비들로 전신을 둘렀다.

특히 한수호는 혜성을 따른 이후 이런 무장이 처음인 터. 잔뜩 흥분해서 얼굴이 상기돼 있었다.

“와, 이혜성이다!”

혜성이 등장하자 함성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의 상징인 검은 정장이 조명을 받아 평소보다 더 멋있게 보였다. 들고 있는 대검도 날이 번쩍이는 진검이었다.

이에 맞서는 백호도 만만치 않았다. 반대편에서 박태준과 백호 길드의 능력자가 천천히 등장했다. 백호의 상징인 흰 갑옷과 보호대로 중무장하고, 손에는 흰색의 장검을 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유수혁이 희뿌연 조명을 받으며 등장했다.

- 유수혁! 유수혁! 유수혁!

혜성을 연호하는 것 못지않게 큰 함성이 터졌다.

호랑이에서 모티브를 딴 순백의 갑옷과 보호대, 각종 축복이 깃들어진 황금 머리띠 등. 그는 유니크 등급의 시그니처 장비들을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천장의 스크린에 유수혁의 손가락이 클로즈업됐다. 실반지 같은 은색 아이템을 손가락마다 하나씩 끼고 있었다.

- 무형검까지 가져온 거야?

- 일단 템빨은 유수혁이 압도적인데?

소란한 가운데 관객들의 웅성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다른 팀은 기권으로……”

장내 아나운서가 뭐라고 말했지만, 관객들의 함성 때문에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설명은 필요 없었다. 대회는 이미 이벤트 수준을 벗어난 상태. 제정신이 박힌 능력자들이라면 대전을 계속할 이유가 없었다. 말이 좋아 대장들끼리의 단체전이지, 실제로는 혜성과 유수혁의 일 대 일 대전이었다.

잠시 후, 양 팀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천천히 무대에 올랐다. 심판이 양 팀의 대장, 혜성과 유수혁을 케이지 중앙으로 불러 모았다.

“드디어 만나는군. 유수혁이다. 너와의……”

유수혁은 심판의 말을 한 귀로 흘리고 혜성만 노려봤다.

“우리가 친구가 될 것도 아닌데. 통성명이 필요한가?”

혜성은 유수혁의 말을 차갑게 잘랐다. 지지 않고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유수혁의 조각 같은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그가 손을 들려는 찰나, 심판이 잽싸게 끼어들어 둘을 떼어놓았다.

둘의 얼굴은 천장의 스크린에 클로즈업된 상태였다.

“와, 기 싸움이 장난 아닌데?”

관객들은 잔뜩 흥분해서 옆 사람과 웅성거렸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몰랐지만,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른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혜성과 유수혁은 형식적인 인사도 생략하고 각자의 코너로 돌아갔다. 분위기에 휩쓸린 탓일까? 막내와 한수호도 잔뜩 흥분해서 케이지 밖에 서 있었다.

“형, 절대 무리하지 마요.”

“무슨 일이 있으면 신호를 주십시오. 당장 올라가겠습니다.”

막내와 한수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마디씩 했다. 혜성은 차가운 표정으로 묵묵히 듣기만 했다.

땡, 마침내 공이 울렸다. 힘의 제약은 물론, 라운드의 구분과 시간제한도 없는 진짜 언리미티드였다.

“간다!”

혜성은 대검을 고쳐 잡으며 케이지 중앙으로 몸을 돌렸다.

***

‘시간을 끌면 불리하다. 단숨에 몰아붙인다!’

혜성은 대검을 비스듬히 들고 케이지 중앙으로 튀어 나갔다.

고요했다. 넓고 어두운 공간에 유수혁과 단둘이 마주 선 느낌이었다. 그 외의 것들은 언제부턴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초집중의 상태.

유수혁의 움직임이 느릿하게 보였다. 놈은 가볍게 코웃음 치며 손가락들을 슬쩍 움직였다.

사삭, 놈을 중심으로 뭔가를 베는 듯한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다. 사용자의 뜻에 따라 허공을 움직이는 열 개의 검이었다.

‘무형검!’

혜성은 반사적으로 대검을 수직으로 세워 급소를 보호했다.

파앗, 그의 팔다리에서 동시에 핏물이 뿜어졌다. 칼에 베인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유수혁이 어떤 수법으로 공격했는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크윽!”

혜성은 이를 악물고 억지로 신음을 삼켰다. 자기도 모르게 돌진하는 속도가 늦어졌다.

다시 유수혁이 왼손을 무심한 듯 수평으로 휘둘렀다.

혜성은 급히 대검을 움직여 넓은 검신으로 측면을 보호했다.

쾅, 보이지 않는 다섯 자루의 칼이 한꺼번에 대검을 강타했다.

결국 그는 핏물을 뿜으며 처음 있었던 철망 근처로 날아갔다.

“형!”

“선배님!”

막내와 한수호의 외침이 어렴풋이 들렸다. 주위의 광경이 잠깐 혜성의 시야에 들어왔다.

공이 울리고 불과 2초 남짓.

막내와 한수호의 걱정스러운 얼굴, 백호 길드 능력자들의 불안한 얼굴, 그리고 경악하고 있는 관객들이 얼핏 스치고 지나갔다.

“죽이지는 않았다. 빨리 2차 각성을 보여라.”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유수혁의 차가운 비웃음이 들렸다.

사삭, 다시 뱀이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오른쪽. 순간적으로 허벅지에서 핏물이 튀는 가운데 혜성의 신형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 순간, 혜성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하고 끊어졌다. 찌를 듯한 전투 본능. 2차 각성의 감각이었다. 검은색 아지랑이가 전신을 감싼 가운데, 아지랑이 틈으로 은은한 서기가 뿜어졌다.

“오, 진화한 건가? 2차 각성이 훨씬 빨라졌군.”

유수혁의 비아냥 같은 감탄이 들렸다.

‘놈의 파장은?’

혜성은 오른손 중지에 낀 반지를 힐끔 내려다봤다. 아직까진 아무 반응이 없었다.

- 조심!

어느새 활성화된 대수영이 경고를 날렸다. 다만 전처럼 상대의 공격을 환영으로 보여주지 않았다. 아니, 보여줄 수 없었다.

‘역시 무형검이군. 대수영으로도 예측이 안 되는 건가?’

혜성은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높이 뛰어올랐다. 무형검의 공격은 대수영도 예측 불가. 그렇기에 아예 멀찌감치 떨어져 무형검의 공격 범위를 이탈한 것이다.

그러나 그게 바로 유수혁의 노림수였다. 놈의 오른손이 살짝 움직였다고 느낀 순간, 혜성은 다시 왼쪽 어깨에서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파앗, 핏물이 그의 목덜미를 덮었다. 암흑의 수호자가 반 박자 늦게나마 목을 보호한 덕분에 겨우 치명상만 면했다.

‘이판사판이다!’

혜성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발을 뒤로 뻗어 철망을 디뎠다. 그리곤 무릎을 튕기며 유수혁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파파팟, 무형의 검이 싸늘한 예기를 뿜으며 사방에서 그를 압박했다. 순식간에 손발 곳곳에 크고 작은 검상이 생겼지만 무시. 유수혁 하나에만 전력을 집중했다.

유수혁은 아직도 제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잡았다!’

혜성은 대검을 크게 움직여 놈의 정수리를 수직으로 찍어 내렸다.

까깡,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대검이 벽에 막힌 듯 튕겨 나갔다. 어느새 유수혁이 왼손을 위쪽으로 들고 있었다. 놈은 다시 왼손을 슬쩍 휘둘러 혜성을 뒤로 날려 보냈다.

“설마 내 능력이 무형검뿐이라고 생각한 건가?”

유수혁의 신형이 그를 따라 솟아오르며 환영처럼 흐려졌다.

- 놈이 온다!

대수영의 경고가 재차 긴박하게 울렸다.

이번엔 놈의 공격이 잔상으로 희미하게 보였다. 2차 각성을 했기 때문에 기본적인 신체 능력은 혜성이 위. 하지만 놈의 두 주먹은 일체의 군더더기를 배제하고 날카롭게 혜성의 급소를 파고들었다.

일순 정신이 아득해졌다. 놈의 주먹은 숨 한 번 내쉴 동안 혜성의 주요 급소를 십여 차례 강타했다.

‘젠장!’

공격이 뻔히 보였지만 막을 수 없었다.

혜성은 대검을 크게 휘둘러 놈을 뒤로 물린 뒤, 주저앉듯이 바닥에 착지했다. 대검을 지팡이처럼 짚은 채.

반면 유수혁은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처음의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관중석이 일순 조용해졌다. 해설자들도 할 말을 잊고 입만 뻥긋거렸다.

- 이혜성이 불리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너무 차이 나는 거 아냐?

- 아까 순식간에 2차 각성한 거 못 봤어? 이혜성도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고.

- 힘과 속도가 싸움의 전부는 아니잖아. 기술의 숙련도와 경험 자체가 다르다고.

- 어째 유수혁이 전보다 훨씬 강해진 거 같지 않아?

관중석에서 몇몇이 뒤늦게 탄식을 내뱉으며 웅성거렸다.

“아직이다.”

퉤, 혜성은 피가 섞인 침을 뱉고 일어서다가 멈칫했다.

오른손 중지, 장진우한테 받은 반지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옅은 보라색. 몬스터의 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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