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1. 승자와 패자 (1)
다음 날 오후 7시 정각.
체조경기장은 5시부터 관객으로 꽉 들어찼다. 근처 주차장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앞에도 입장하지 못한 관객 3만 명이 운집했고, 아시아까지 생중계되는 TV 시청률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혜성의 상대가 누구더라? 붉은 반달?”
“걔네 몰라? 강원도 쪽에서는 제법 유명한 형제들이잖아.”
“A급 이상은 될걸? 대장인 일룡이는 AA급이고.”
관객들의 관심사는 단연 이혜성이었다.
펑, 돌연 조명이 꺼졌다. 관객들도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둥, 둥, 둥. 심장 박동 같은 베이스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처음엔 낮고 부드럽게. 그러나 베이스는 점점 크고 강해졌고, 마침내 절정에 이른 순간 다시 조명이 켜졌다. 음악은 강렬한 비트의 메탈.
- 이혜성! 이혜성! 이혜성!
관객들은 발을 구르며 혜성의 이름을 연호했다.
잠시 후, 희뿌연 조명을 받으며 혜성과 일행들이 케이지에 올랐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 게 한두 번도 아닌 탓에 이젠 다들 여유가 있었다.
“형, 괜찮아요?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잖아요.”
계단을 올라가며 막내가 혜성의 옆구리를 찔렀다.
“맞습니다. 식사도 대충 하셨고 말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한수호도 걱정스러운 눈으로 혜성을 힐끔 돌아봤다.
어젯밤 발신자 불명의 문자를 받은 직후, 혜성은 쭉 아무 말이 없었다.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안색은 병자처럼 파리했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괜찮다. 지금은 시합에만 집중하자.”
혜성은 어깨에 걸친 나무 대검을 매만지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어서 붉은 반달 팀이 입장했다. 대환도를 든 거구들. 친형제는 아니었지만, 친형제처럼 다니다가 일룡, 이룡, 삼룡이란 별명이 이름처럼 굳어진 자들이었다.
1라운드를 돌파한 나름 강적이었지만, 그들의 소개는 혜성을 외치는 관객들의 함성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심판이 손짓이 있고 혜성과 상대 팀의 주장이 케이지 중앙으로 나섰다.
“자자, 어차피 이벤트 게임이니까 무리하진 마시고……”
심판은 규칙을 간단히 설명하며 주머니에서 작은 주사위를 꺼냈다. 대장전, 교대전, 단체전 등의 대전 방식이 2개씩 쓰여 있었다.
“대장전이면 좋겠군. 깔끔하게 한 번에 끝내게 말이야.”
혜성이 심판의 말을 자르고 짧게 말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태도. 목소리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누구 좋으라고? 삼 대 삼 교대전이 좋지. 팀원이 순차적으로 나와서 한 번씩 겨뤄봅시다.”
상대 팀의 주장, 일룡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새끼가.’
혜성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혜성한테 져도 나머지 둘을 꺾으면 된다. 속이 뻔히 보였다.
“아! 대장전이냐 교대전이냐? 양측이 원하는 방식이 엇갈린……”
장내 아나운서가 호들갑을 떨며 상황을 중계했다. 케이지 천장에 매달린 대형 모니터에 심판의 손이 클로즈업됐다.
두두두두, 빠른 드럼 소리가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가운데, 심판이 주사위를 던졌다가 잡았다. 이어서 심판이 손등에 올려진 주사위를 공개한 순간, 관중석의 함성이 절정에 이르렀다.
단체전.
여섯 명 전원이 케이지에 올라 한꺼번에 승부를 겨루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혜성이 자신의 코너로 돌아온 순간, 막내와 한수호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입가를 씰룩거리며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 보였다.
“1 라운드는 형이 다 했으니까 이번엔 우리한테 맡겨 봐요.”
“강철호 때 기록이 30초였죠? 그 기록을 가볍게 깨 보겠습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눈치.
“뭐?”
혜성이 당황하는 가운데, 녀석들은 상대를 힐끔거리며 소리 죽여 뭔가를 설명했다.
***
붉은 반달 쪽 코너.
“삼 대 삼이니까 맨투맨으로 간다. 놈들의 구멍이 막내인 거 알지? 원거리 딜러라는 놈. 그러니 내가 이혜성, 이룡이가 한수호를 맡고, 삼룡이가 막내를 막는다.”
일룡은 케이지 중앙을 힐끔 쳐다보며 작전을 지시했다. 이런 단체전에서 중요한 건 힘의 균형. 한 명이라도 먼저 무너지는 쪽이 패배였다.
케이지 중앙에는 팀 NSA가 이미 나와 있었다. 대검을 어깨에 걸친 혜성이 중앙에, 단검을 든 한수호가 왼쪽에, 그리고 막내는 검지에 작은 화염을 맺고 오른쪽에 일렬로 섰다.
조명이 어두운 탓에 표정을 정확히 읽을 순 없었지만, 혜성은 뭔가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린 것 같았다.
‘잘됐군. 시간을 끌면 불리하다. 단숨에 끝내주마.’
그들도 도신을 슬쩍 어루만지며 케이지 중앙으로 걸어갔다.
- Fight!
공이 울리고 장내 아나운서가 힘차게 외쳤다.
기선제압.
파팟, 양측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혜성의 목을 노리고 도를 수평으로 휘두르려는 찰나, 일룡은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혜성이 돌연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혜성의 목표는 셋째. 동시에 한수호는 둘째를 막아섰다.
“이 새끼들이!”
일룡은 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반 바퀴 돌린 뒤, 더욱 빠르게 혜성의 등 쪽을 베었다.
쾅, 작은 화염이 날아와 그의 도를 막아냈다. 원거리 핀 포인트 공격. 막내의 기습이었다.
퍼퍼펑, 녀석은 방향을 바꿔 혜성의 뒤로 우회, 연달아 십여 개의 화염을 쏘고 빠졌다.
“이 약은 새끼……”
일룡도 이를 악물고 강기를 날렸다. 아니, 날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 와! 이혜성! 이혜성!
다시 혜성을 연호하는 함성이 터졌다. 혜성이 어느새 삼룡의 목에 대검을 겨눈 것이다. 반면 일룡은 아직 막내의 그림자도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공이 울리고 불과 20초.
“벌써 끝이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관객들의 웅성거림이 체육관 여기저기서 크게 울렸다.
“졌다.”
일룡은 맥이 탁 풀려 도를 바닥에 던졌다.
***
대전이 끝난 뒤.
천장의 대형 모니터에 조금 전의 상황이 나왔다. 워낙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영상은 혜성을 중심으로 슬로 모션으로 재생됐다.
혜성은 붉은 반달의 삼룡을 향해 직선으로 내달렸다. 삼룡은 정면의 막내를 상대하기 위해 도에 강기를 맺고 날리려던 참이었다. 그는 갑자기 옆에서 혜성이 나타나자 당황해서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쾅, 혜성의 대검이 삼룡의 겨드랑이를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히 강타했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삼룡의 거구가 위로 들렸다가 떨어졌다.
이어서 혜성은 제자리에서 팽이처럼 빙글 돌며 대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타깃은 삼룡의 두꺼운 목. 삼룡이 눈을 질끈 감은 것과 동시에 혜성의 대검은 그의 목 한 치 앞에서 우뚝 멈췄다.
“역시 이혜성! 완전 상대를 갖고 노는데?”
“아무리 작전이 좋았다고 해도 저 정도면 이젠 각성을 안 해도 A급 아냐?”
뒤늦게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탄성을 내뱉었다.
- 이걸로 팀 NSA는 이혜성 혼자만의 팀이 아니라는 게 증명됐어요. 이혜성의 기습이 좋기도 했지만, 그 전에 막내 요원이 상대의 시선을 뺏는 페이크도 훌륭했거든요. 특히……
스피커를 통해 전직 헌터의 해설이 울려 퍼졌다.
스포트라이트가 케이지 위의 승자들을 비췄다. 이어서 심판이 혜성의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뭐라고 장황한 멘트를 날리며.
그러나 승리의 여운은 관심 밖이었다. 혜성은 케이지 옆을 힐끔 쳐다봤다.
다음 경기는 백호 길드. 박태준과 그 부하가 장검을 들고 서 있었다. 혜성의 번개 같은 솜씨를 봤으면서도 그다지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예상대로 유수혁은 안 나왔군. 8강쯤은 유수혁이 없어도 통과할 수 있다는 건가?’
백호 길드는 대회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건 유수혁의 상태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뜻이었다.
“이혜성 씨?”
문득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혜성이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내밀고 소감을 물어본 것이다.
“형!”
막내가 옆구리를 찔렀다. 그제야 혜성은 마이크를 받아들고 관객들을 둘러봤다.
“야, 조용히 해봐. 이혜성이 한마디 한다.”
쥐 죽은 듯 고요한 가운데, 장내의 모든 시선이 혜성에게 집중됐다.
“밤새 고민했습니다.”
혜성은 심호흡하며 뜸을 들였다.
“뭐지? 중대 발표라도 있는 건가?”
관중석에서 잠시 소란이 일었다. 혜성은 손을 들어 소란을 잠재운 뒤 말을 이었다.
“이 대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대회가 너무 깁니다. 언제, 어디서 게이트가 열릴지 모르는 시대 아닙니까? 이런 때에 능력자들이 며칠 동안 임무를 팽개치고 이벤트에 참여하는 건 사회적으로 낭비입니다.”
“…….”
“둘째, 이런 대회는 기존에도 많았습니다. 참가자들의 등급이 높아지긴 했습니다만, 전체적인 형태는 대동소이했지요.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전 좀 색다른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혜성은 돌연 왼손을 번쩍 들었다. 능력치를 제한하는 아이템을 차고 있었다.
“주최 측에 제안합니다. 이런 장난 같은 봉인은 집어치우고, 사나이답게 화끈하게 한판 붙읍시다. 4강 진출팀들이 총출동해서 교대전으로 벌이는 짧고 강렬한 승부. 진짜 언리미티드입니다!”
그는 오른손으로 팔찌를 푼 뒤, 관중석을 향해 힘껏 던졌다. ‘진짜 언리미티드’라는 말을 강조하며.
‘어떠냐?’
혜성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옆을 돌아봤다.
아나운서, 집행위원들, 그리고 다음 대전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능력자들까지. 전부 당황한 얼굴로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 이혜성! 이혜성!
체조경기장에는 이혜성을 연호하는 함성만 가득했다. 아나운서가 급하게 뭐라고 외쳤지만, 관객들의 함성에 묻혀 하나도 안 들렸다.
“제정신이에요? 이게 무슨 레슬링 태그매치도 아니고. 징계 끝난 지도 얼마 안 됐잖아요. 국장이 길길이 날뛸 거라고요.”
“저도 선배님과 유수혁의 대결을 보고 싶습니다만, 이렇게 뜬금없이 터뜨리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막내와 한수호가 좌우에서 동시에 말했다. 걱정 반, 불안 반의 목소리로.
“괜찮아. 내게 다 생각이 있으니까.”
혜성은 둘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그의 시선은 박태준 쪽으로 향해 있었다. 박태준도 그를 바라보며 동료와 뭐라고 속닥거리고 있었다.
“블랙이든 유수혁이든 다 나오라고 해. 어차피 겁날 거 없으니까. 둘이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면으로 돌파해 주마.”
혜성은 관객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중얼거렸다.
***
클럽 지하 VIP룸.
- ……진짜 언리미티드입니다!
대형 TV에서는 체조경기장의 상황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관객들의 흥분과 전율이 화면 너머까지 생생하게 전해졌다.
“이야, 역시 이혜성. 난 놈은 난 놈입니다. 사람을 흥분시키는 묘한 힘이 있다니까요.”
매니저는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었다.
“예상대로군. 지금 이혜성은 이성을 잃어버렸지. 옆에서 무슨 말을 해도 들어오지 않을 거다.”
만병귀도 엷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NSA는? 당장 대회를 취소하라고 난리 칠 텐데.”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괜히 명절 때마다 여의도에 돈뭉치 쇼핑백을 뿌리는 게 아니니까요.”
매니저는 손바닥을 비비며 히죽 웃은 뒤 말을 이었다.
“정치하는 양반들이 알아서 막아줄 겁니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다. 이미 전국 방송으로 나갔다. 여기서 막으면 관객들이 어떻게 할 것 같냐? 아마 당장 폭동이 날 것이다. 핑계야 많죠. 크크크.”
“수고했군. 유수혁은?”
“유수혁은 끊임없이 강함을 추구하는 놈 아닙니까? 위험한 미끼라는 걸 알면서도 덥석 받아들이더군요. 아마 지금쯤이면 그 ‘물건’의 힘을 전부 흡수했을 겁니다.”
탐욕스러운 놈. 매니저는 웃으며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거 아나? 마약이 나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만, 호기심에라도 일단 한번 마약을 접하면 그다음부턴 멈출 수 없다는 거.”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유수혁도 마찬가지다. 놈은 강한 힘이란 마약에 중독됐거든. 마스터를 만나 블랙의 힘을 얻은 순간부터 놈의 중독과 폭주는 예정된 셈이지.”
“아!”
“우리가 할 일은 그 폭주를 이혜성에게 돌리는 것. 무대만 마련해 주면 유수혁이 알아서 이혜성을 처리할 거다.”
만병귀도 모처럼 소리 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