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0. 두 마리의 호랑이 (6)
S 호텔 대연회장.
10인조 오케스트라가 잔잔한 선율을 연주하는 가운데, 파티는 고상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자선 이벤트인 탓에 연예인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유명한 능력자들이 대거 참석했지만, 주인공은 단연 이혜성이었다.
“와, 이혜성이다. 1라운드를 30초 만에 끝냈다며?”
“2차 각성을 안 하고도 강철호를 씹어먹던데?”
“요즘 도장 깨기 연패로 유명하던데. 나도 비무행 좀 다녀야 하나?”
다들 혜성을 힐끔거리며 수군거렸고, 일부는 같이 기념사진을 찍자고 주위로 몰려들었다. 혜성은 어색하게 웃으며 일일이 촬영에 응했다.
막내와 한수호도 이젠 제법 유명인사였다. 둘은 각각 와인과 탄산음료를 들고 서서 기자들과 인터뷰했다.
‘유수혁은?’
혜성은 사진 촬영에 응하면서 연신 난간 쪽을 힐끔거렸다. 정장을 입은 박태준과 백호 길드의 사람이 뭔가를 속닥거리고 있었다. 가끔 그를 곁눈질하며.
‘유수혁은 왜 안 나타나지?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유수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팀 무사도의 만병귀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둘이 어딘가에서 대결을 벌이는 건 아니겠지?’
혜성은 이렇게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식 대결 전까지 사적인 만남이나 싸움은 금지. 참가자들은 지금처럼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인사할 수 있었다.
“혜성 씨. 시간 있으면 잠깐 인터뷰 좀……”
이윽고 여기자 하나가 한참을 기다린 끝에 혜성에게 다가와 말을 붙였다.
‘누구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린데.’
혜성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였다.
콰쾅!
어디선가 큰 폭발음과 함께 붉은 섬광이 번쩍였다. 진동에 호응하듯 천장의 샹들리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뭐야?”
혜성을 비롯한 모두는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서관 18층 VIP룸 방향. 깨진 유리창 사이로 화마가 춤을 추는 게 보였다.
“젠장!”
박태준이 와인 잔을 던지고 연회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른 이들도 잠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 뒤 급히 박태준을 뒤따랐다.
“형!”
막내와 한수호도 곁으로 다가와 혜성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래. 우리도 가보자.”
혜성은 사람들에 섞여 서관으로 내달렸다.
서관 18층. 그곳은 유수혁과 백호 팀원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5분 뒤, 서관 18층 앞 비상계단.
황성인이라고 했던가? 참가 계약서를 쓸 때 만났던 총괄 매니저가 경호원들을 잔뜩 거느리고 입구를 막았다. 허겁지겁 달려왔는지 그들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단순 화재는 아닌 것 같은데? 테런가?”
“능력자끼리 한판 벌인 거 아냐?”
“에이. 도심 한복판의 호텔에서 싸워?”
사람들은 경호원들의 어깨너머, 복도 중앙의 VIP룸을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뒤. 화재경보기가 요란하게 울리는 가운데 천장의 스프링클러가 한바탕 방을 휩쓸고 지나간 상태였다. 바닥과 벽은 소화액으로 흥건했다.
“유수혁은?”
사람들은 까치발을 하거나 목을 길게 빼고 복도 중앙을 바라봤다.
문이 날아간 VIP룸.
물에 젖은 유수혁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폭발 속에서 반사적으로 보호막을 형성한 것 같았다. 셔츠에 연녹색 그을음만 좀 묻었을 뿐. 특별히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수혁 씨! 괜찮습니까?”
누군가가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는 소리 난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이 풀린 멍한 표정. 뭔가에 취한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한데? 한번 봅시다. 이런 건 내가 전문이거든.”
누군가가 경호원들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돌아가시죠. 수혁 씨는 무사합니다. 그럼 된 거 아닙니까? 여긴 저와 매니저가 처리하겠습니다.”
한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박태준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복도를 막아섰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처음 나섰던 사내가 뭐라고 반박하려다가 움찔했다.
박태준은 굳은 표정으로 어금니를 깨물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살기. 그 살기는 주위에 있는 능력자들을 향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도 주최 측의 특별 초청을 받은 능력자였다.
“거,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너무하네.”
“백호의 이름값을 믿고 나대는 거냐?”
다른 능력자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나섰다. 금세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아이고, 그만들 하십시오. 사소한 사고입니다. 어쨌거나 수혁 씨도 무사하고 말입니다.”
매니저와 경호원들이 급히 끼어들어 양쪽을 떼어놓았다.
“쳇!”
능력자들은 박태준을 노려보다가 삼삼오오 짝지어 흩어졌다.
막내와 한수호도 당황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유수혁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둘도 이해가 안 가긴 마찬가지였다.
“우리도 일단 방으로 돌아가자.”
혜성은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렸다.
***
동관 VIP룸.
“젠장!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막내는 거칠게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답답했다. 나비넥타이와 재킷을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벗어 던졌다.
“맞습니다. 박태준은 분명 뭔가를 숨기는 눈치였습니다.”
한수호도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혜성도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아까부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까 유수혁 상태 봤지? 유수혁이 마약이나 환각제를 할 리는 없고. 대체 뭐였을까?”
그는 혼잣말처럼 나직이 물었다.
“글쎄요. 아까 유수혁 셔츠에 녹색 가루가 묻은 거 봤죠? 그건 독성 약물이 열기에 노출됐을 때 생기는 건데. 인화성이 강한 위험한 약물을 복용하다가 일부가 누출돼 폭발한 거 아닐까요?”
막내는 몇몇 약물들을 언급했다.
악마의 눈물, 흰 수염 원숭이의 피, 자이언트 달팽이의 진액 등. 단기간에 EF를 올릴 수 있지만, 중독성을 비롯한 각종 부작용 때문에 금지된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은 특유의 역한 냄새가 있잖아. 보통 불이 꺼진 다음에도 냄새가 한참 동안 남아 있거든. 그런데 아까는 그런 냄새가 없었단 말이지.”
혜성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수혁이 얼마 전에 한, 중, 일 연합작전을 하면서 SS급 던전을 깼잖습니까? 거기서 뭔가 대단한 아이템을 얻은 게 아닐까요? 그리고 그걸 몰래 복용하다가 사고가 난 거고요.”
이번엔 한수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에이, 아이템은 국가에서 엄격하게 관리하는 거 알잖아. SS급 던전이라 특히 더 엄격했을걸? 하급 아이템이라면 몰라도 그런 폭발을 일으킬 정도로 위험한 물건은 반출이 어렵다고.”
다시 막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뭐야?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아이템이나 약물의 흔적인가?”
혜성은 검지로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셋이 한참 동안 머리를 맞댔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일단 국장님께 보고할까요?”
막내가 혜성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아냐. 우리끼리 좀 더 알아보고 보고하자.”
혜성은 백호의 위세를 떠올렸다.
백호는 평범한 길드가 아니었다. 국장 위의 라인과 정계에도 인맥이 거미줄처럼 깔린 대기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확실한 증거도 없이 의혹만으로 백호를 수사한다? 유야무야 넘어가는 건 물론, 오히려 혜성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나저나 형은 왜 유수혁을 피하는 거예요? 아무리 유수혁이 강해도 형에겐 2차, 3차 각성이 있잖아요. 강철호도 30초 만에 박살냈는데 말이에요. 물론 적이 아니니까 3차 각성의 필살기는 쓸 수 없을 테지만.”
막내는 가볍게 혀를 차며 화제를 돌렸다. 혜성의 소극적인 반응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맞습니다. 선배님은 상대가 강할수록 강해지는 타입 아닙니까? 전투 경험이나 스킬은 밀리더라도 기본적인 능력치가 위니까 한번 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수호도 입을 삐죽 내밀고 거들었다. 이기고 지는 건 둘째 문제. 누가 이기든 둘의 승부를 보고 싶었다.
“글쎄.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만, 유수혁은 내 전투 롤모델이잖아. 그런데 유수혁과 전력으로 싸운다? 솔직히 아직 와닿지 않아.”
그는 쓰게 웃은 뒤 말을 이었다.
“그리고 유수혁 성격에 이벤트라고 대충 할 거 같아? 아마 둘 중 하나는 의식불명이 돼야 끝날걸?”
압도적인 강함. 일단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근성. 유수혁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이자 대중이 유수혁에게 열광하는 이유였다.
“에이, 그래도……”
막내는 여전히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한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습니다. 제 태양이 혜성 선배님이라면, 혜성 선배의 태양이 유수혁 아닙니까? 저도 선배님하고 목숨 걸고 싸우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반드시 싸워야 하는 계기가 있으면 모를까. 그게 아니면 이벤트니까 적당히 하다가 기권하든지……”
혜성이 한창 말하는 도중이었다. 부웅, 테이블에 놓인 그의 핸드폰이 부르르 떨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혜성은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들어 알람을 확인했다. 발신자표시가 제한된 문자였다.
“……!”
돌연 혜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왜 그러십니까? 누구한테……”
옆에서 한수호가 뭐라고 말했지만, 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혜성의 핸드폰에 온 것은 사진 한 장. 유수혁이 일본의 어느 신사에서 찍힌 사진이었다. 배경이나 헤어스타일을 보니 며칠 전. 한, 중, 일 연합작전을 끝낸 직후 잠깐 일본 관광이라도 한 것 같았다.
혜성은 사진을 확대했다. 모자와 뿔테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는 유수혁 특유의 냉소적인 미소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문제는 유수혁의 바로 옆에 웃으며 서 있는 사람이었다. 회색 생활한복을 입은 노신사.
“마스터?”
혜성은 회색 마스터를 뚫어지게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하고 끊어진 느낌이었다.
“유수혁.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혜성은 거칠게 핸드폰의 화면을 껐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사진을 보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유수혁이 블랙의 마스터와 함께 있었다는 것. 유수혁과 반드시 싸워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
동관 일반실.
그녀는 방의 불을 끄고 창가로 다가갔다. 혜성에게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요청했다가 화재 때문에 흐지부지 물러선 기자였다.
창가 옆에는 작은 스탠드가 있었다. 그녀는 창문 너머 도심 어딘가를 응시하며 스탠드를 켰다 끄기를 반복했다. 마치 모스부호를 보내는 것처럼.
- 블랙이 움직였다. 이혜성은 아직 유수혁과 블랙의 관계를 모른다. 이혜성의 곁을 맴돌며 계속 상황을 주시하겠다.
보고가 길어지면 놈들이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커튼을 치고 돌아섰다.
“블랙이나 지하 마켓, 유수혁 등은 별문제가 아니야. 조금 복잡하긴 해도 충분히 예측 가능하니까. 문제는 이혜성. 툭 하면 나오는 불나방 같은 똘끼 때문에 어디로 튈지 모르거든.”
그녀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