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9. 두 마리의 호랑이 (5)
올림픽 체조경기장, 언리미티드 특설무대.
- 와-아!
관객들의 함성이 환청처럼 들렸다.
‘제길! 이혜성이 이렇게 강했나? 2차 각성을 하기 전인데도?’
강철호는 이를 악물고 도끼를 휘둘렀다. 손발이 어지러워져 방어하기에만 급급했다. 등은 어느새 케이지의 철망에 닿아 있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승리를 자신했다. 둘 다 최대 EF가 1,000으로 제한된 상태. 이래선 혜성이 2차 각성으로 스킬을 카피해도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없었다.
‘선수를 뺏긴 게 컸다.’
그가 생각하는 동안에도 혜성의 공격은 계속됐다.
파팟, 혜성이 날카롭게 돌진하며 대검을 쭉 뻗었다. 목표는 그의 단전. 그는 대검을 쳐내기 위해 도끼를 아래에서 위로 움직였다.
혜성이 손목을 살짝 틀어 목표를 바꿨다. 이번엔 대검 끝이 그의 오른쪽 어깨를 찔러왔다.
“젠장!”
강철호는 이를 악물고 도끼의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그게 바로 혜성의 노림수였다. 혜성은 그의 왼쪽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하며 대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강철호는 도끼를 무리해서 크게 휘두른 상태. 혜성의 공격을 뻔히 보면서도 막을 수 없었다.
퍼억, 강철호는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지며 숨이 턱 막혔다. 혜성의 대검이 그의 옆구리를 가격한 것이다.
부웅, 다시 그의 머리 쪽에서 묵직한 파공음이 들렸다.
의식은 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상태.
‘졌다!’
강철호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고요했다. 수많은 관객이 있었지만, 누구 하나 말을 잇지 못했다. 멘트를 날려야 할 아나운서도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잠시 후, 혜성이 뒤로 물러나며 대검을 거뒀다.
- 와! 이혜성! 이혜성!
그제야 관중석에서 우레 같은 함성이 터졌다.
“NSA의 자존심! 그 이름처럼 떠오르는……”
아나운서도 뒤늦게 장황한 멘트와 함께 혜성의 이름을 외쳤다.
“어떻게 된 거야?”
“글쎄.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관중석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들리는 가운데, 천장에 매달린 대형 모니터에서 조금 전의 대결 영상이 느리게 재생되었다.
혜성은 기습적으로 대검을 던져 선제공격했다. 강철호가 물러서며 엉겁결에 대검을 쳐내자, 그는 새처럼 날아올라 공중에서 대검을 잡고 강철호의 머리를 내려쳤다. 그다음 페이크로 강철호의 큰 동작을 유도. 강철호의 허점을 만든 뒤, 대검을 강철호의 머리 앞에서 멈췄다.
대전이 시작되고 불과 30초.
첫 비무행에서 숭무관장이 혜성에게 보여준 수법의 응용이었다.
화면이 바뀌고 따로 마련된 스튜디오가 나왔다. 아나운서와 유명한 전직 헌터가 조금 전의 상황을 설명했다.
“……강철호의 자세도 빈틈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혜성이 생각보다 강했을 뿐이죠. 상대에게 허점이 없으면 만들면 그만이라는……”
“정말 순식간에 이혜성이 이겼습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 이거 너무 싱거운데요?”
매니저는 TV의 볼륨을 줄이고 뒤를 힐끔 돌아봤다.
만병귀는 나가려던 자세로 서 있었다. 워낙 순식간에 승패가 결정된 탓에 시선은 아직 TV에 고정돼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이혜성. 생각보다 강해졌군. 내 상대가 되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그는 담담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짐짓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관심 없다더니. 이제 보니 제일 관심이 많잖아?”
매니저는 문이 닫히는 걸 보며 피식 웃었다. 그는 보았다. 방을 나가기 직전, 만병귀의 주먹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뭐, 내가 능력자였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아무튼 이건 복수와 별개로 대박인데? 중계료하고 광고수익만 해도 다 얼마야?”
그는 킥킥거리며 TV로 시선을 돌렸다. 이혜성의 전투 스타일은 보는 사람을 흥분시키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
S 호텔 동관 VIP룸.
“아이고, 죽겠다.”
막내는 넓은 침대에 뛰어들듯 누웠다. 방에는 킹사이즈 침대 세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가 큰 대자로 벌렁 누워도 넉넉했다.
개회사, 각종 축하공연, 그리고 오프닝 게임까지. 첫날의 공식 일정은 밤 10시가 돼서야 겨우 끝났다.
혜성도 재킷을 벗어 던지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오른쪽 손목에 찬 은색 팔찌가 자꾸 거슬렸다. 능력치를 봉인하는 아이템. 참가자 간의 다툼을 막기 위해 대회 기간 중에는 항상 봉인 아이템을 팔에 차야 했다.
“일단 제일 중요한 관문은 넘었군.”
혜성은 어색한 듯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와 강철호의 대전을 시작으로 체조경기장과 보조경기장에서 동시에 대전들이 진행. 예선 참가자의 절반인 16팀이 호텔에 짐도 못 풀고 집에 돌아갔다.
“강철호를 그렇게 쉽게 제압하다니. 역시 선배님이십니다. 전보다 훨씬 강해지셨습니다.”
한수호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혜성에게 건네며 말했다.
“고마워.”
혜성이 생수의 뚜껑을 따려는 찰나,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국장의 전화였다.
“네, 이혜성입니다.”
혜성은 검지를 입에 붙여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막내와 한수호는 혜성의 곁으로 다가와 귀를 쫑긋 세웠다. 수화기 너머로 국장의 호탕한 웃음이 들렸다.
“……그래, 수고했어. CIC 새끼들. 호텔에 짐도 못 풀고 돌아갔다고? 꼴좋다. 1라운드를 통과했으니까 이 기세를 몰아서 우승까지……”
국장 혼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주변에서 부국장을 비롯해 귀에 익은 목소리도 왁자지껄 들렸다. 혜성은 “네, 네.” 하고 맞장구치며 듣기만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본부에서 아주 난리가 났군요.”
막내도 히죽 웃으며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NSA의 동기와 선후배들이 보낸 문자가 수백 통 쌓여 있었다. 한수호의 핸드폰도 비슷했다.
“방심하지 마. 대회는 이제부터가 진짜니까.”
혜성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테이블에 놓인 리모컨을 들었다. 벽에 걸린 대형 TV를 틀자 오프닝 게임들의 하이라이트가 나왔다.
“와!”
보조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 난쟁이와 거인을 연상시키는 이인조가 케이지 중앙에 서서 주먹을 번쩍 들어 올렸다. 둘의 발밑에는 검을 든 사내 셋이 피떡이 돼 쓰러져 있었다.
“팀 무사도?”
혜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와 같은 그룹인 3번 시드였다. 프리랜서로 활동 중인 AA급 능력자가 주축. 대장이 일신상의 이유로 첫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가운데, 남은 두 멤버로 가뿐히 1회전을 돌파했다.
“대장이 만병귀라고 했지? 준결승에서 만나는 건가?”
혜성은 개회식 소개 영상에 잠깐 스쳤던 낯선 사내를 떠올렸다.
검처럼 날카로운 인상. 대회 주관사의 특별 초청으로 참가한 자였다. NSA에서 사전에 만병귀의 신상을 털었지만, 해외에서 주로 활동했다는 것 외엔 특별한 정보가 없었다.
화면이 바뀌었다. 이번 대회의 또 다른 주인공, 유수혁이 속한 팀 백호의 하이라이트였다. 무사도 팀과 마찬가지로 유수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왼뺨에 긴 칼자국이 있는 사내가 유수혁을 대신해 대장전에 나섰다. 게임 시간은 불과 28초. 칼자국의 사내는 상대를 케이지 밖까지 날려 보냈다.
“의도적으로 서두른 것 같은데. 역시 나를 의식한 건가?”
혜성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솔직히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다. 한수호의 우상이 혜성이라면, 혜성의 우상은 유수혁이었다.
문제는 영혼의 파트너가 된 대수영. 혜성은 언젠가 강지영에게서 들은 대수영의 제작 비화를 떠올렸다.
‘유수혁은 자존심의 화신. 자신의 물건을 뺏기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닐 거다. 아니. 어쩌면 대수영은 핑계일지도 모르지. 유수혁은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능력자가 주목받는 걸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유수혁은 동경과 불안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상대. 혜성의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그때였다.
“박태준이라고, 백호 길드에서는 유명한 놈이에요. 저와는 상극인 자연계 한빙 속성을 가졌고요. 백호에 있는 친구들한테 물어보니까 유수혁의 오른팔이라던데요? 유수혁만 없었으면 백호의 에이스가 됐을 거라나?”
옆에서 막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비 다 했어?”
혜성은 TV를 끄고 고개를 돌렸다.
다음 일정은 클래식 음악과 정장, 최고급 와인으로 상징되는 기념 파티.
언론사와의 공식 인터뷰도 겸하는 자리였다. 막내와 한수호는 정장을 잘 차려입고 서 있었다. 한수호는 조금 어색한 것 같았지만, 막내는 나비넥타이까지 매고 한껏 멋을 부린 상태였다.
“나도 형 덕분에 능력치가 강제로 상승했지만, 박태준은 차원이 다른 놈이에요. 장진우 팀장 정도는 돼야 상대할 수 있을 거예요.”
“맞습니다. 박태준 다음에 나설 사람도 AA급이고 말입니다. 결승은 선배님하고 유수혁의 대장전으로 가길 비는 수밖에 없습니다.”
막내와 한수호는 인상을 찌푸리고 차례대로 덧붙였다.
‘대장전이라. 내가 그를 이길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꼭 그와 싸워야 하는 건가?’
혜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본의 아니게 가져간 대수영은 그저 핑계일 뿐이라는 걸. 대수영이 없었다면, 유수혁은 다른 명분으로 그와의 대결을 추진했을 것이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2라운드 상대만 해도 보통 놈들이 아니니까.”
혜성은 옆에 놓인 재킷을 들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1라운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전원 참석한다고 했지? 그럼 그도 오는 건가?’
혜성은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긴 잘생긴 사내를 떠올렸다. 대한민국의 대표 능력자, 유수혁. 드디어 첫 대면이었다.
***
S 호텔 서관 VIP룸 거실.
클래식 음악이 은은하게 흐르는 가운데, 회색 정장을 입은 한 사내가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또 이혜성의 영상을 보십니까? 이혜성은 운이 좋았습니다. 강철호의 능력은 거인의 힘이라는 괴력. 능력치 제한이 없었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뒤에서 박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운도 실력입니다. 그리고 능력치 제한이 없었다면 이혜성도 2차 각성을 하고, 아이덴티티를 활용했겠지요.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겁니다.”
유수혁은 리모컨을 들어 TV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했다. 혜성이 자신의 아이템을 강탈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은 굴욕에 가까운 분노뿐이었다. 그러나 막상 혜성의 싸움을 직접 보자, 분노는 호기심과 호승심으로 변했다. 혜성보다 강한 능력자는 많은 터. 왜 유독 혜성이 신경 쓰이는지는 본인도 알 수 없었다.
“파티에 늦겠습니다. 가시죠.”
박태준이 앞장서서 거실을 나섰다.
“이혜성.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유수혁은 가볍게 웃으며 박태준을 따라나섰다.
그런데 박태준이 막 방문을 열려는 찰나였다. 누군가가 방문 앞에 유령처럼 서 있었다. 실내임에도 짙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남자.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온 기척은 없었다.
“넌?”
박태준은 움찔하며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잠깐.”
뒤에서 누군가가 팔을 뻗어 박태준의 어깨를 잡았다. 유수혁이었다.
“먼저 파티에 가 계십시오.”
유수혁이 굳은 얼굴로 선글라스의 사내를 노려보며 말했다. 일촉즉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박태준은 고개를 가로저으려다가 멈칫했다. 유수혁이 눈을 위로 살짝 치켜뜬 것이다.
“알겠습니다. 먼저 가 있겠습니다.”
박태준은 유수혁과 사내를 번갈아 바라본 뒤, 꾸벅 묵례하고 사내를 지나쳐 방을 나섰다.
쾅, 박태준의 등 뒤로 방문이 거칠게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