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58화 (58/150)

# 058. 두 마리의 호랑이 (4)

사람이 북적이는 호프집.

그는 생맥주를 마시며 핸드폰의 스크롤을 움직였다.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해]

혜성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팬 카페 이름이었다.

그는 최근 게시물을 터치했다. 어젯밤, 혜성이 원주에서 곤봉의 고수와 겨뤄 대패했다는 소식에 짧은 동영상이 첨부돼 있었다.

“아이고, 이혜성이 또 졌네.”

그는 웃으며 댓글 창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 겨우 19연패. 유수혁의 78연승까진 아직 멀었네.

- 이제 시작이다. 20연패까지 가즈아아!

- 요즘 패하는 속도가 느려진 거 아냐? 이래서 100패 하겠어?

……

언뜻 보면 조롱 같은 댓글들. 그러나 작성자들은 모두 혜성에 죽고 사는 자들, 일명 ‘찐팬’들이었다.

- 힘내서 패하라고 힐링 팩터라도 보냅시다. 갓혜성 사무실 주소 아시는 분은 쪽지 좀.

그도 히죽 웃으며 댓글을 달았다.

“야, 지금 이거 볼 때야?”

옆에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니 벌써 7시 20분.

“깜빡했다!”

그는 벽에 걸린 대형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 호프집을 가득 메운 다른 이들도 모두 스크린만 쳐다보고 있었다.

능력자들의 무제한 무투 대회, 일명 ‘언리미티드’의 오프닝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개회식 및 대회 장소는 올림픽 체조경기장 특설 무대였다. 유명인의 개회사가 끝나고, 아나운서가 대회 규칙을 간단히 설명했다.

- 대회 기간은 총 4일.

- 출전자는 각 팀당 3명.

- 봉인 아이템으로 EF의 최대치를 1,000으로 제한.

- 생명력 측정을 위한 아이템을 항시 장착.

- 대결 방식은 한 명씩 차례대로 나오는 교대전, 팀원 전원이 한꺼번에 겨루는 단체전, 혹은 한 명만 나오는 대장전 중에서 하나를 추첨해서 결정.

그 외에도 몇 가지 규칙이 더 있었지만, 중요한 건 여기까지였다.

다음으로 주요 참가자들이 소개됐다. 본선 진출자는 총 16팀 48명. 주관사에서 지명도, 실력, 전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선별한 유명인들이었다.

“와! 얘들이 여기서 왜 나와?”

대형 스크린에 팀 이름이 하나씩 떠오를 때마다 탄성이 쏟아졌다.

연예인들이 나와서 대진표를 추첨했다. 대진이 하나씩 결정될 때마다 여기저기서 희비가 엇갈렸다.

“이혜성하고 유수혁은?”

그는 화면 왼쪽의 대진표로 시선을 옮겼다. 유수혁과 혜성은 나란히 1, 2번 시드. 반대 그룹에 고정돼 있었다.

“에이, 결승까지 어떻게 기다리나.”

그는 실망하며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이혜성 대 유수혁은 대회의 하이라이트잖아. 주최 측이 바보냐?”

친구가 피식 웃으며 핀잔을 줬다. 그런데 그다음 순간.

“풉! 뭐야, 이거?”

사내는 맥주를 뿜으며 사레가 들려 켁켁거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에 가까운 탄식이 터졌다.

팀 NSA의 1라운드 상대는 바로……

***

2번 대기실.

본선 진출자들은 외부와 단절된 대기실에서 팀별로 대기하고 있었다. 대회가 끝날 때까지 외부 출입은 금지. 정식 대결까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불미스러운 일을 막기 위함이었다.

“솔직히 말해 봐요. 나한테 감정 있죠? 사무실에서 밀린 서류 작업 하고 있는 사람을 왜 끌어들인 거예요?”

막내는 혜성과 한수호를 노려보며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벌써 세 병째. 목구멍에 물을 쏟아붓듯이 들이켰지만, 가슴속의 불은 오히려 더 활활 타올랐다.

“우리는 한 팀 아닙니까, 한 팀. 혜성 선배님이 가면 좌 막내 형님, 우 한수호는 기본 옵션입니다.”

한수호가 생글거리며 ‘한 팀’을 강조했다.

“넌 아직 사인 안 했다며?”

“사인은 안 했지만, 반은 NSA 아닙니까? 제가 NSA를 위해서 싸운 게 몇 번인데.”

“저 새끼. 처음엔 안 그랬는데 이젠 능구렁이가 다 됐네.”

막내는 한수호에게 꿀밤이라도 먹이려다가 도로 손을 내렸다. “이게 한두 번도 아니고. 내가 참아야지.”라고 되뇌며.

“그나저나 우리 상대는 누가 되려나?”

혜성은 벽에 걸린 중계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결승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는 반대 시드, 유수혁의 이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때였다.

“어?”

막내와 한수호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팀 NSA와 숙명의 대결을 벌일 팀은 바로……”

여자 아나운서가 환하게 웃으며 돌돌 만 종이를 펼쳐 보였다.

넘버 12.

강철호가 주축이 된 CIC의 요원들, 일명 팀 CIC였다.

“뭐? NSA 대 CIC?”

혜성도 황당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거렸다.

부웅, 바지에서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혜성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네, 이혜성입니다. …… 네. 네. 알겠습니다.”

통화하는 동안 그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누군데요?”

전화를 끊자마자 막내가 채근하듯 물었다.

“누구긴. 국장님이지. 이런 삼류 대회는 관심도 없으시다더니. 다들 TV 앞에 몰려 있나 보다.”

혜성은 한숨을 푹푹 내쉰 뒤 말을 이었다.

“좋은 소식하고 나쁜 소식이 있어. 뭘 먼저 듣고 싶어?”

“긍정적으로 생각하죠. 좋은 소식은 뭔데요?”

막내가 억지로 웃으며 되물었다.

“다음 인사 때 국장님이 우릴 책임지고 승진시켜 주신대. 고과는 당연히 최고 등급이고.”

“아싸, 승진?”

막내는 주먹을 움켜쥐고 좋아하다가 멈칫했다. 혜성의 표정이 여전히 무거운 탓이었다.

“나쁜 소식은 뭔데요?”

“우승은 못 해도 되니까 CIC는 꼭 이기란다. 이건 한일전에 버금가는 대결. CIC에는 가위바위보도 지면 안 된다나?”

그제야 막내와 한수호도 얼굴이 굳어졌다.

일이 너무 커졌다. 처음엔 그저 신촌 재건 기금 마련을 위한 자선 이벤트였다. 그런데 이게 NSA와 CIC의 자존심 싸움으로까지 번진 것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혜성은 모니터에 비친 팀 강철호의 사진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

1라운드 오프닝 게임.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경기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이 만원이었다. 능력자 간의 대결인 탓에 케이지는 가로, 세로 각 30m. 혜성이 장현수와 공개 대결을 펼쳤을 때보다 훨씬 화려했다.

“누가 이길까? 당연히 이혜성이겠지?”

“아냐. EF가 제한된 상황이잖아. 객관적으로는 경험이 풍부한 강철호가 우세할걸?”

“이혜성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저력이 있잖아. 역전의 명수랄까?”

갑론을박.

여기저기서 관객들의 웅성거림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윽고 심장 박동 같은 음악이 울려 퍼졌다. 희미하던 조명은 동시에 꺼졌고, 이어서 스모그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한 줄기 밝은 빛이 좌우를 비췄다.

“지상 최대의 쇼! 대한민국 최강의 능력자는 누구인가? 언리미티드! 지금부터 그 화려한 막을……!”

아나운서의 장황하지만 틀에 박힌 멘트가 경기장을 울렸다.

먼저 가죽 갑옷을 입은 CIC 3인방이 차례대로 등장했다. 강철호가 등에 멘 대형 도끼가 조명을 받아 섬뜩하게 빛났다. 그들이 조명을 받으며 한 명 한 명 케이지에 오를 때마다 장내 아나운서가 큰 소리로 이름을 호명했다.

다음은 팀 NSA였다. 가죽으로 된 갑옷을 입은 막내와 한수호가 먼저 등장했다. 마지막으로 아나운서가 혜성을 소개하려는 순간.

“와-아!”

체육관이 떠나가라 함정이 터졌다.

검은 정장으로 상징되는 영웅. 혜성이 조명을 받으며 천천히 등장했다. 비무 동영상을 통해 유명해진 대검을 어깨에 걸친 채.

- 이혜성! 이혜성! 이혜성!

장내는 혜성의 팬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아나운서의 멘트는 함성에 묻혔다.

잠시 후, 팀을 대표해서 혜성과 강철호가 케이지 중앙에서 인사했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아나운서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주최 측의 농간인가?”

강철호는 복잡한 표정으로 쓰게 웃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혜성이 CIC로 거의 넘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적으로 마주하다니. 상황이 참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혜성도 비슷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했다. 분위기에 휩쓸린 탓일까? 혜성은 서서히 피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도 국가 요원이기 전에 호승심에 불타는 능력자. 게다가 상대는 CIC에서 유명한 에이스였다. 전의에 휩쓸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그건 강철호도 비슷했다.

“내가 국장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 미안하지만 이번엔 사정을 봐주지 못할 것 같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은 미소를 지우고 서로를 노려봤다.

대전 방식은 각 팀의 대표만 겨루는 대장전. 같은 국가기관 소속답게 짧고 굵게 승부를 벌이기로 했다.

***

“와-아!”

관객들의 함성에 스피커가 찢어질 것 같았다.

“기대 이상입니다. 유수혁까지 나왔다니. 이건 대박입니다, 대박.”

매니저는 리모컨으로 볼륨을 조금 줄이며 환하게 웃었다.

처음의 목표는 혜성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유수혁의 출전, 그리고 이에 자극받은 CIC와 다른 강자들의 출전은 예상 밖이었다.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그는 손바닥을 비비며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만병귀는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시선은 정면의 TV에 고정한 채였다.

“승률은 반반. 핵심은 이혜성이 비무행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 이혜성이 얼마나 달라진 모습을 보이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될 거다.”

만병귀는 혜성의 대결을 떠올렸다.

혜성은 대회 전날까지도 비무를 벌인 터. 혜성이 지긴 했지만, 원주에서의 대결은 종이 한 장 차이의 석패였다.

그사이 대결 준비가 끝났다. 대결 방식은 대표끼리 승부를 겨루는 대장전. 물론 대표는 이혜성과 강철호였다. 둘은 10m의 거리를 두고 각자의 코너 쪽으로 물러섰다.

- Fight!

장내 아나운서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외친 뒤 물러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라?”

매니저는 대번 고개를 갸웃했다. 관중석에서도 놀란 비명이 터졌다.

시작과 동시에 혜성이 대검을 집어던진 것이다. 강철호는 아직 자세도 잡지 못한 상태. 그가 당황하며 도끼로 대검을 튕겨낸 순간, 어느새 코앞까지 돌진한 혜성이 높이 뛰어올랐다.

쾅, 혜성은 공중에서 대검을 잡고 그대로 강철호의 머리를 내려쳤다.

강철호가 급히 도끼를 머리 위로 들었지만, 체중이 실린 혜성의 힘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강철호가 순간적으로 휘청거림과 동시에 혜성이 빠르게 공격을 퍼부었다.

“무기를 던져? 미쳤나?”

매니저는 황당한 표정으로 만병귀를 쳐다봤다.

“아니. 제대로 싸우고 있는 거다. 이혜성. 비무행의 성과가 있군.”

만병귀는 굳은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무기는 무사의 자존심이다? 온실 속의 화초 같은 놈들이 지껄이는 나약한 변명이지. 실전에서 무기는 그저 상대를 죽이기 위한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끝났다. 강철호란 놈은 승리를 위해 싸우지만, 이혜성은 상대를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싸우고 있으니까. 이 싸움, 더 볼 필요도 없다.”

만병귀는 혜성의 승리를 단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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