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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순직이 힘들다-57화 (57/150)

# 057 두 마리의 호랑이 (3)

정오 무렵, 을지로역 근처 커피숍.

혜성은 커피숍에 혼자 앉아 태블릿으로 뭔가 보고 있었다. 어젯밤에도 춘천까지 가서 비무행을 벌인 상태. 태호가 밤새 치료했지만, 뿔테 안경으로 가린 눈가에 멍 자국이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보고 있나?”

머리맡에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오셨습니까?”

혜성은 영상을 정지시키고 고개를 들었다. 장진우 팀장이었다.

“유수혁의 영상인가?”

장진우는 혜성의 맞은편에 앉으며 태블릿을 힐끔 쳐다봤다.

“네. 유수혁의 별명 중 하나가 미스터 기본기 아닙니까? 평범한 주먹질 하나도 유수혁이 하면 다르죠. 제 전투 교본이랄까요?”

혜성은 어색하게 웃으며 태블릿을 백팩에 넣었다.

“참 아이러니하군. 유수혁은 자넬 라이벌로 여기고 공개적으로 도전장까지 내밀었는데, 정작 자네는 유수혁을 우상으로 여기고 싸울 마음이 없으니. 그래, 도전은 거절할 텐가?”

“네. 이미 김유진 기자를 통해서 거절할 거라는 기사를 내보내기로 했습니다.”

“왜? 나도 기대가 큰데.”

장진우는 혀를 차며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유수혁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그가 비무라고 대충 할 것 같습니까? 봉인 아이템은 무시. 둘 중 하나가 크게 다칠 때까지 끝장을 보려고 하겠죠. 그리고 솔직히 2차 각성을 해도 그를 어떻게 공략할지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혜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금 본 동영상을 떠올렸다.

같은 기본기라도 유수혁이 하면 다르다. 괜한 말이 아니었다. 가령 스트레이트 하나를 뻗더라도 군더더기 없이 상대를 향해 최단 거리로 날아갔다.

“그래도 난 좀 아쉽군. 자네 팬들도 실망이 클 테고 말이야. 비겁자라고 안티 팬도 생기는 거 아냐?”

장진우는 입맛을 다시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제가 공명심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라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참, 그런데 왜 갑자기 저를 보자고 하신 겁니까?”

혜성은 쓰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아, 비무행을 조심하라는 말을 하려고. 징계도 끝나고 당분간 임무도 없지만, 혹시 뒷말이 나올 수도 있잖아. 아직도 자넬 안 좋게 보는 사람들도 있고. 그리고……”

장진우는 잠깐 주위를 둘러본 뒤 뭔가를 내밀었다. 아이템을 보관하는 케이스였다.

“이게 뭡니까?”

혜성이 열어보려 하자, 장진우는 케이스를 슬쩍 그의 손에 쥐여 주고 목소리를 낮췄다.

“아직 정식으로 나온 건 아냐. 연구소에 있는 지인한테 받은 프로토타입이거든. 일단 넣어둬.”

장진우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곤 더욱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차성진과 최면술사들 기억하지?”

“물론입니다.”

“연구소에서 놈들을 조사하던 중에 흥미로운 걸 알아냈어. 그들의 주 활동무대는 일본. 그리고 그들은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무명의 B급이었네. 그런데 자네와 싸울 때는 AA급이었단 말이지.”

“뭡니까? 단기간에 능력치를 확 끌어올릴 수 있는 비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혜성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목소리도 덩달아 낮고 은밀해졌다.

“그런 것 같아. 아직 좀 더 조사가 필요하지만.”

“어떻게 말입니까?”

장진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인간과 몬스터의 융합.”

“몬스터?”

혜성은 사령을 떠올렸다. 놈도 인간과 몬스터 육신의 융합체. 하지만 블랙의 능력자들과는 달라 보였다.

장진우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 마켓의 육체 개조와는 다른 것 같아. 몬스터의 핵을 변형해서 이식한다나? 능력치를 단숨에 증폭시키면서도 육체 개조의 단점은 없지. 다만 이종(異種)의 에너지를 강제로 융합하기 때문에 이지 상실이나 폭주 같은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더군.”

“그럼 제게 주신 건 뭡니까?”

“체내에 주입된 몬스터의 파워를 감지하는 아이템이네. 몬스터와 융합하다 보니, 전력을 다하면 은연중에 몬스터 고유의 파장이 섞이거든.”

장진우는 아이템의 사용법을 간략히 설명하고 덧붙였다.

“최면술사의 기억에서 본 마스터란 놈은 아직 감감무소식이잖나. 게다가 자네는 블랙의 제1 타깃이고. 자네가 블랙과 위험을 끌어들이는 건지, 아니면 블랙과 위험이 자네만 찾아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장진우가 한창 말하는 도중이었다.

삐빅, 그의 핸드폰이 빠르고 급하게 울어댔다. 아직은 근무 시간.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사무실이었다.

“쳇, 또 회의야? 신촌 사건 이후 툭하면 비상이군.”

그는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혜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배웅한 뒤 도로 자리에 앉았다. 인간과 몬스터의 융합. 이지 상실. 폭주. 장진우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전력을 다해 싸우면 상대가 블랙인지 알 수 있다고?”

혜성은 케이스를 재킷 안주머니에 넣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

백호 빌딩 23층.

“뭐? 거절이라고? 이 새끼. 도망가는 거야, 뭐야?”

유수혁은 신문을 구겨 벽에 던졌다.

- ……유수혁은 나의 우상. 그리고……

신문에 실린 혜성의 인터뷰 기사는 완곡하지만 분명한 거절이었다.

비서는 그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물러섰다. 넓은 방에는 그 혼자 남았다. 그때였다.

부웅, 바지에서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발신자 표시가 제한된 번호. 외부에 공개된 연락처는 그의 사무실뿐. 개인 연락처를 아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네, 유수혁입니다.”

유수혁은 날 선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반갑습니다. 전 유수혁 씨의 열렬한 팬입니다.

스피커 너머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히죽 웃었다.

“뭐야?”

유수혁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러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다시 전화를 귓가로 가져가야 했다.

- 신문 봤습니다. 이혜성과 대결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신다고요?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조만간 이혜성과 대결할 수 있게요. 그것도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화려한 무대에서 말입니다. 대신……

***

늦은 저녁 무렵, 서울로 돌아가는 고속도로.

“아이고, 죽겠다.”

SUV 뒷좌석에서 혜성의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 미친놈아. 그러다 골병든다니까.”

태호가 백미러로 혜성을 힐끔 돌아보며 구박했다.

혜성은 머리와 가슴에 붕대를 칭칭 감은 상태. 미라 같았다. 한수호가 옆에서 상처에 약물을 발라주고 있어, 차 안에는 약 냄새가 진동했다.

“다음은 누구였더라?”

혜성은 잔소리를 흘리고 핸드폰으로 이메일을 확인했다. 그때였다. 핸드폰이 부르르 떨리며 [꼰대 영감]이라는 발신자명이 떴다.

“국장이 왜 전화했지?”

혜성은 인상을 찌푸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 그래도 어제 비무행을 조심하라는 말을 들은 터. 찔리는 게 많았다.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해! K-NSA 이혜성입니다!”

혜성은 평소보다 과장되고 씩씩하게 전화를 받았다. 듣고 있던 태호와 한수호가 고개를 돌리고 킥킥거렸다.

다행히 비무행과 관련된 전화는 아니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혜성은 간간이 맞장구치다가 쓰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뭐냐?”

“뭡니까?”

태호와 한수호가 동시에 물었다.

“혹시 KIS 엔터테인먼트라고 아냐?”

혜성이 핸드폰으로 KIS를 검색하며 물었다. 스포츠 이벤트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였다. 특별히 이상한 건 없었다.

“전에 무슨 해외 축구팀 초청대회 했잖아. 이름은 들어봤지. 왜?”

태호가 백미러로 혜성의 눈치를 살피며 되물었다.

“거기가 정부하고 손잡고 몇몇 능력자들을 초대해서 자선 이벤트를 개최한대. 수익금은 전액 신촌 재건사업에 쓰이고.”

“무슨 이벤튼데 능력자를 초대해? 사인회냐?”

“아니. 3:3 격투 대회. EF를 1,000으로 제한하고 겨룬다나?”

각성자들이 등장한 후, UFC 등 기존의 대회는 자연스럽게 각성자들의 차지가 됐다. 비슷한 격투 대회는 많은 터. 다만 일회성 자선 대회라는 점이 달랐다.

“KIS에서 너희 국장 윗선하고 정계에 엄청나게 로비했겠네. 그런 대회는 홍보 효과만 해도 엄청날 테니까.”

태호는 대수롭지 않게 피식 웃었다.

“격투대회라.”

혜성은 턱을 쓰다듬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구미가 당겼다. 상금은 둘째 치고, 토너먼트라면 강자들과 연이어 겨룰 좋은 기회였다.

‘그도 나올까?’

유수혁을 잠깐 떠올렸다. 유수혁은 그를 포함한 젊은 능력자들의 우상이었다. ‘이런 대회에서 그와 만나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만으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니야. 그가 이런 대회에 나올 리 없지.”

혜성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수혁은 그와 차원이 다른 존재. 그가 이제 막 떠오른 별이라면, 유수혁은 정점에 떠 있는 태양이었다.

“그럼 저와 막내 형님도 참가하겠습니다.”

한수호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넌 왜?”

“우리는 한 팀이라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선배님이 가면 저와 막내 형님도 가는 겁니다.”

한수호는 결연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막내의 의사는 가볍게 무시하고.

녀석의 머릿속에는 벌써 토너먼트가 열리고 있었다. 선봉 한수호, 중견 막내, 대장 혜성으로 이뤄진 고전 격투 게임이었다.

“막내 녀석. 또 투덜거리겠네.”

혜성이 쓰게 웃는 찰나, 다시 핸드폰이 진동했다. 이번엔 국장의 비서가 보낸 이메일이었다. 자선 대회의 진행을 위한 협조문서.

“어디 보자. 3일 뒤. 장소는 올림픽 체조경기장. 참가자는……”

혜성은 이메일을 소리 내 읽다가 멈칫했다. 표정이 굳어졌다.

백호 길드의 유수혁.

참가자 명단의 마지막에 그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하, 유수혁. 아주 작정을 했군.”

혜성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껐다. 단순한 자선 이벤트가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같은 시각, NSA 본부 사무실.

“에취! 누가 내 얘기 하나?”

막내는 요란한 재채기를 연발했다. 무심코 팔뚝을 보니 소름이 잔뜩 돋아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혜성이 형한테 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나까지 끌어들이고 말이야. 에이, 설마.”

그는 피식 웃으며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억지웃음. 웃을수록 불안은 더 커졌다.

***

클럽 지하 밀실.

“어떻게 됐나?”

사내가 실눈을 뜨며 물었다. 시끄러운 와중에도 소파에 가부좌를 틀고 명상 중이었다.

“잘 됐지요. 유수혁이야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미끼를 덥석 물더군요. NSA도 상부에 기름칠 좀 했더니 바로 승낙했고요.”

매니저는 손바닥을 비비며 진행 경과를 간략히 보고했다. 너무 수월하게 끝난 탓에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수고했군. 내 자리는?”

“주관사 특별초청 자격으로 한 자리 비워 놨습니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뭐가?”

“다른 팀은 세 명씩 구색을 갖춰 출전할 텐데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저희 쪽 애들 둘을 붙여드릴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대회는 끝까지 진행되지 않을 거거든.”

그는 단숨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매니저의 얼굴에 잠깐 의문의 빛이 스쳤다.

“그나저나 이혜성은 아직 유수혁과 진지하게 싸울 마음이 없는 것 같군. 공개적인 대결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다니. 어디, 호랑이 두 마리가 피투성이가 돼 서로 물어뜯도록 약 좀 쳐 볼까?”

사내는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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