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6. 두 마리의 호랑이 (2)
숭무관 제1 수련장.
‘요즘도 이런 도장이 있었나?’
혜성은 다소 생경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돌을 깎아 만든 바닥, 주위를 감싼 대나무들, 품이 넓은 도복을 입은 숭무관장까지. 조선 시대로 타임 슬립을 한 기분이었다.
다만 이건 비공개 스파링. 평소 서른 명이 수련하던 넓은 공간에는 그와 숭무관장, 단둘만 마주 섰다. 태호와 한수호는 거리를 두고 대나무 근처에서 대기했다.
‘해동검도에 베이스를 두고 자신만의 검술을 만들었다더니. 그게 진짜인가 보군.’
혜성은 정면의 숭무관장을 유심히 쳐다봤다.
반백의 고지식한 무사. 손에 들린 검은색 목검이 진검처럼 싸늘한 예기를 풍겼다.
“능력을 봉인했군. 그만큼 자신 있다는 건가? 아니면 나를 우습게 보는 건가?”
숭무관장은 혜성의 봉인 팔찌를 보고 대번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 있어서가 아닙니다. 관장님을 업신여기는 건 더더욱 아니고 말입니다.”
혜성은 고개를 가로저은 뒤 상체를 꾸벅 숙이고 말을 이었다.
“관장님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이 대결의 목적은 누가 더 강한가를 겨루는 게 아니라, 제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한 수련. 능력자로서가 아니라 무술을 배운 한 사람으로서 관장님께 배움을 청하고자 합니다.”
공손하면서도 진지한 태도. 이어서 그는 양손으로 대검을 들고 검 끝으로 상대를 겨눴다.
전력으로 싸우면 혜성이 100% 이긴다.
사실 이건 숭무관장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혜성이 최근에 꺾은 바람의 송곳니만 하더라도 그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혜성은 자신의 부족함을 사실대로 털어놓고 도움을 청한 터.
숭무관장은 고지식해도 자존심 때문에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다.
“방송에 나온 이미지는 거짓이 아니었군. 비무란 본래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수련. 그동안 잊고 있었던 걸 자네에게 배웠어.”
숭무관장도 양손으로 검을 들고 자세를 취했다.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하겠네!”
파팟, 숭무관장은 자세를 낮추고 혜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바람 같은 움직임. 순간적으로 뿌연 잔상이 남았다.
“감사합니다!”
혜성은 한 걸음 물러서며 대검을 수직으로 세워 방어했다.
검과 검이 부딪치기 전.
숭무관장의 검이 반원을 그리며 방향을 틀었다. 타깃은 무방비로 노출된 혜성의 오른쪽 어깨.
혜성은 연신 뒷걸음질 치며 대검을 아래에서 위로 움직였다. 상대의 검을 쳐내기 위해.
숭무관장의 검이 다시 검로를 바꿔 일직선으로 찔러왔다. 이번엔 혜성의 왼쪽 옆구리. 상대적으로 느릴 수밖에 없는 대검의 특성을 이용한 페이크였다.
퍽, 옆구리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혜성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키며 오른쪽으로 물러났다. 시작부터 기선을 제압당한 상태. 손발이 어지러워져서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동작이 너무 커. 중요한 건 효율성. 불필요한 동작을 배제하고 최단 거리로 움직여야 하네.”
정신없는 와중에 숭무관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으럇!”
혜성은 기합을 지르며 대검을 수평으로 크게 휘둘렀다. 통했다. 목검이 숭무관장의 손에서 빠져 위로 높이 튀어 올랐다.
다음 순간, 숭무관장은 고개를 숙이고 혜성의 품을 파고들었다. 혜성은 대검을 크게 휘두른 상태. 상대의 접근을 막을 수 없었다.
퍽, 숭무관장의 단단한 주먹이 혜성의 복부를 강타했다.
“컥!”
혜성은 반대편 대나무까지 나가떨어졌다.
“무기는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공격수단. 무기에 연연할 필요는 없네.”
숭무관장은 이렇게 외치며 오른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공중에 떠올랐던 목검이 팽그르르 돌면서 떨어져 도로 그의 손에 쥐어졌다.
“일어나. 실전에서는 쓰러졌다고 봐주는 법이 없어.”
숭무관장은 쓰러진 혜성에게 달려가 쉴 새 없이 밀어붙였다.
이변은 없었다. 혜성이 비틀거리며 자세를 잡기 전, 빈틈을 노리고 숭무관장의 검이 쏟아졌다. 혜성도 대검 좀 휘두른다고 자부했지만, 검술로 일문을 이룬 백전노장 앞에서는 허점투성이였다.
혜성이 기억하는 비무는 여기까지. 이후에는 정말 먼지 나게 맞은 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아아!”
태호와 한수호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
클럽 지하 밀실.
오늘도 EDM이 방음벽을 뚫고 은은하게 들려왔다.
“불편한 건 없으셨습니까?”
총괄 매니저가 잔에 술을 따라 건네며 물었다.
“비행기로 2시간도 안 되는 거리다. 불편할 게 뭐 있나?”
사내는 무표정하게 대답하며 술 대신 생수를 따서 마셨다. 마른 듯하지만 날카로운 인상. 잘 벼려진 검 같은 이미지였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뭐든 말씀만 해 주십시오.”
매니저는 무안해하며 건네던 잔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내가 온 걸 어떻게 알았지?”
사내가 매니저를 노려보며 물었다. 상대를 꿰뚫는 눈빛이었다.
“저희야 정보력으로 먹고살지 않습니까? 게다가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도 있고요. 만병귀 님이 비행기에……”
아차!
매니저는 주절주절 대답하다가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상대의 코드명을 함부로 입에 담는 건 금기 중의 금기.
“죄송합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쾅하고 테이블에 이마를 찧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령이 당했다고?”
만병귀는 담담한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그는 한국에 기반이 없는 상황. 좋든 싫든 매니저와 그 배후 세력이 필요했다.
“그렇습니다. 사실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시뮬레이션을 돌렸을 때는 사령의 승률이 90% 이상이었거든요.”
매니저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수치를 과신했군. 능력치는 어디까지나 참고 사항. 승패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지.”
병신. 사내는 나직이 욕설을 내뱉은 뒤 말을 이었다.
“이혜성은 요즘 뭘 하고 있지?”
“전국의 강자들을 찾아다니며 비무 중이라고 합니다. 해외에서도 주목하는 유명인사 아닙니까? 비무는 비공개로 진행되었습니다만, 어떻게 알았는지 벌써 짧은 영상 몇 개가 유출됐습니다.”
매니저는 태블릿을 꺼내 영상을 재생했다.
상대는 쌍검을 쓰는 고수. 몰래 촬영한 듯 화질이 조금 흐렸다.
“이혜성이 일방적으로 졌습니다. 상대가 안 되던데요.”
매니저는 비웃으며 다른 영상들도 보여줬다.
다음 상대는 장창을 쓰는 고수. 이번엔 혜성도 준비를 단단히 한 듯 1분 정도 버텼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그리고 그다음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이혜성이라도 능력을 봉인한 상태라면……”
매니저는 코웃음을 치다가 멈칫했다. 사내의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진 것이다.
“뒤로 갈수록 이혜성의 움직임이 날카롭군. 단기간에 실력이 느는 게 눈에 보일 정도야. 현재까지 전적은?”
“4일간 7연패인가, 8연패인가? 아무튼 이것 때문에 여기저기서 말이 많습니다. NSA에서도 조만간 뭔가 조치를 취할 거라는 소문이 있고 말입니다.”
매니저도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세상에 실전만큼 좋은 훈련은 없지. 이혜성은 일부러 능력을 봉인하고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거다. 기본 능력을 강화하면 각성 후의 능력까지 강화될 테니까.”
사내는 대번 혜성의 의도를 꿰뚫어 봤다.
이윽고 영상이 끝났다. 사내는 팔짱을 끼고 생각하다가 물었다.
“생각보다 일이 재미있게 풀릴 것 같다. 혹시 대형 이벤트를 하나 열 수 있나?”
“산하에 위장 사업체가 좀 있습니다만. 무슨 이벤트 말입니까?”
“현재 한국에서 이혜성의 라이벌이라 불릴 수 있는 자는 누구지?”
“그야 당연히 유수혁이죠. 나이도 비슷하고. 전적은 유수혁이 압도적으로 화려합니다만, 이혜성에게는 2차 각성과 끝을 모를 잠재력이 있거든요.”
매니저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침을 튀기며 설명했다.
한 명은 패배를 모르는 엘리트. 다른 한 명은 뒤늦게 포텐셜을 터뜨린 신성. 각각 백호 길드와 NSA의 얼굴이었지만, 성장 과정은 정반대였다.
“바로 그거다. 이혜성 대 유수혁. 서로 물어뜯게 만드는 거다.”
사내는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
SJ 기획, 소회의실.
“……이상이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입니다. 유수혁이 일본에서 누군가와 만났다는 것만 파악했을 뿐, 그게 누구였는지 알아내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수은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보고를 마쳤다. 며칠 동안 밤을 새운 듯 안색이 창백했다.
“골치 아프군. 하필 유수혁이라니. 이혜성에게는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유수혁이 블랙과 관계됐다는 거. 이혜성은 블랙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테니까.”
박무영은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보고서는 유수혁의 근황에 관한 것이었다.
“저어,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가?”
한수은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왜 이혜성을 선택하신 겁니까? 솔직히 지금은 유수혁이 이혜성보다 몇 수는 위 아닙니까? 유수혁도 우리 쪽에 관심을 보였고 말입니다.”
“유수혁은 너무 강한 것만 추구하거든.”
박무영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강하기 때문에 거절했다? 능력자가 강해지고 싶어 하는 게 왜 문제인가? 한수은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부족한 능력은 내가 나중에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네. 전적도 계속 활동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늘어날 테고. 하지만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는 올곧은 마음은 누가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냐.”
박무영은 재차 한숨을 내쉬고 덧붙였다.
“유수혁의 성격상, 비슷한 또래의 강자를 그냥 두고 보지 않겠지.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 이혜성에겐 좀 더 시간이 필요해.”
***
테헤란로 백호 빌딩 23층 사무실.
“이혜성은 언제 만날 수 있습니까?”
유수혁은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맞은편의 김준수를 쳐다봤다. 유수혁답지 않았다. 오랜만에 돌아와 할 일이 산적해 있는데도 그의 관심은 오직 이혜성뿐이었다.
“자네도 알잖나? 만나고 싶다고 바로 만날 수 없는 거. 일정을 조율하고 있지만,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김준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스케줄 조율의 어려움. 유수혁과 이혜성은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화제인 탓에 제약이 많았다.
그러나 그가 혜성과 유수혁의 만남을 미루는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넌 누군가가 네 위에 있는 걸 용납 못하지. 그게 자신과 또래라면 더더욱. 그래서 혜성이라는 장래의 라이벌을 미리 밟아두려는 거 아닌가?’
김준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 말을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제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다시 유수혁이 뭐라고 말하는 도중이었다.
똑똑,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파란색 서류철을 들고 있었다.
김준수가 힐끔 곁눈질 하니 [……이혜성 동향……]이라는 제목이 얼핏 보였다.
‘유수혁답군. 내가 시간을 끄니까 비서에게 따로 조사를 시킨 건가?’
김준수는 유수혁의 눈치를 살피며 쓰게 웃었다.
“전국의 강자를 찾아다니며 비무행이라. 재미있군.”
유수혁은 진지했다. 그의 시선은 보고서에 못 박혀 있었다.
“저도 도전하겠습니다.”
유수혁은 보고서를 돌려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제정신인가? 백호의 얼굴이자 대한민국 랭킹 7위가 비무행이라니. 자넨 이런 데 낄 레벨이 아니야.”
김준수는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며 언성을 높였다.
“상대는 이혜성. 이유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유수혁은 고개를 가로저은 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혜성이 혹시라도 그를 피할 수도 있었다. 피하지 못하게 못을 단단히 박아야 했다.
“홍보실장님. 저 유수혁입니다. 지금 언론사에……”
김준수가 말릴 틈도 없었다.
다음 날, 모든 언론의 헤드라인은 하나로 도배됐다.
- 유수혁. 이혜성에게 공개 도전!
국민들을 열광시키는 일대 사건.
혜성의 비무행은 대한민국의 차세대 에이스를 둘러싼 자존심 대결로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