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55화 (55/150)

# 055. 두 마리의 호랑이 (1)

일본 도쿄 H 호텔 VIP룸.

흰 정장을 입은 노신사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좌우에는 검은 기모노의 노신사와 회색 생활한복의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숨 막히는 침묵.

무거운 공기가 그들을 짓눌렀다. 중앙의 테이블 위에는 잉크 냄새를 풍기는 신문들이 널려 있었다.

- 한국의 이혜성, 신촌에서 종횡무진 대활약.

- 이혜성, AA급 몬스터를 분쇄하다. 그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혜성에 대한 감탄과 찬사 일색. 대한민국 NSA의 말단 요원은 바다 건너까지 유명했다.

“어이없군. 우리가 놈을 더 띄워준 셈이 됐어.”

흰 노신사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우측을 돌아봤다. 회색 생활한복을 입은 노신사가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혼돈의 그림자는 어떻게 됐나? 녀석이 뭔가 흘리기 전에 빨리 꼬리를 잘라야 할 텐데.”

흰 노신사는 찌르는 듯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소식이 끊겼습니다. 일단 NSA에는 잡히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습니다만, 아무래도 NSA 외의 다른 조직이 개입한 것 같습니다.”

회색 노신사는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이해가 안 되는군. 사념의 형제나 뱀 귀신은 그렇다고 쳐도…… 혼돈의 그림자마저 이혜성에게 패하다니. 객관적인 전력만 놓고 보면 패할 수 없는데 말이야.”

흰 노신사는 다시 신문을 힐끔 내려다봤다. 한국의 기관에서 홀쭉이와 뚱뚱이 최면술사, 사령, 미스터리라고 부르는 자들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게…… 결정적인 순간마다 계획에 없던 훼방꾼들이 나타났습니다.”

회색 노신사는 막내, 한수호, 장진우 등을 간단히 언급했다.

일명 이혜성 군단.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그들 또한 유명인사였다.

“다시 한번만 제게 맡겨 주십시오. 이번엔 실수 없이 처리하겠습니다.”

검은 기모노를 입은 노신사가 회색 노신사를 힐끔 쳐다보며 끼어들었다. 마치 회색 노신사의 위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아니. 우린 당분간 나서지 않겠네.”

중앙의 흰 노신사는 단숨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째서입니까? 우리와 이혜성은 더 이상 양립할 수 없습니다.”

검은 노신사가 따지듯 물었다.

개인적인 원한은 둘째 문제. 혜성의 처리는 조직의 위상이 걸린 일이었다.

“물러서는 게 아니야. ‘만병귀(萬兵鬼)’가 나서기로 했으니까. 아마 지금쯤이면 인천행 비행기를 탔을 거야.”

흰 노신사는 한 사내를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만병귀. 그 이름처럼 세상의 모든 병기에 귀신처럼 능통한 능력자였다.

그 이름을 듣자 나머지 둘은 흠칫 놀라며 표정이 굳어졌다.

“혼돈의 그림자보다 강한 자들은 많습니다. 하나로 안 된다면, 둘 이상을 동시에 투입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왜 하필 만병귀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파문당한 터. 놈의 변덕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놈을 받아들이면 머지않아 큰 분란을 초래할 겁니다.”

검은 노신사와 회색 노신사가 차례대로 목소리를 높였다.

말이 길어질 것 같았다. 흰 노신사는 오른손을 살짝 들어 둘의 말을 잘랐다.

“만병귀가 먼저 제안을 해왔네. 혜성을 제거하면 다시 받아줄 수 있겠냐고. 녀석도 조직을 떠나 있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을 거야. 그리고 우리에겐 해결해야 할 또 다른 문제가 있지 않은가? 바로 유수혁.”

흰 노신사는 유수혁을 강조하며 좌우를 돌아봤다.

신문의 이혜성 기사 아래.

유수혁이 SS급 던전을 클리어했다는 사진과 기사가 실려 있었다. 최초의 한·중·일 연합 작전. 화제성은 혜성에게 밀렸지만, 중요성은 그 이상이었다.

“유수혁이라.”

두 노신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인상을 찌푸렸다.

“유수혁은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거나 제거해야 합니다. 물론 제 첫 제안은 간단히 거절당했습니다만.”

회색 노신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하는 말일세. 이혜성과 유수혁. 이 두 문제를 하나로 엮어서 처리하는 건 어떻겠나?”

흰 노신사가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뭔가 생각이 있는 듯 의미심장한 표정이었다.

다른 두 노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산 하나에 호랑이 두 마리가 살 수는 없다고 했지. 이혜성과 유수혁은 한국의 차세대 에이스를 다투는 기대주. 지금은 유수혁이 앞선 듯하지만, 둘은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지. 그러니……”

흰 노신사는 목소리를 낮춰 뭔가를 길게 설명했다.

***

병원 검사실.

“매일 검사받는 것도 일이네.”

혜성은 투덜거리며 원통형 검사기에서 나왔다. 상의를 탈의하고 각종 센서를 부착한 상태. 그는 센서를 거칠게 뜯은 뒤 옷걸이에 걸린 셔츠를 입었다.

“결과는 어때?”

그는 검사실 왼쪽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흰 가운을 입은 태호가 컴퓨터 앞에 앉아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누가 치료했는데. 올 클리어. 퍼펙트!”

태호는 히죽 웃으며 엄지를 내밀었다. 혜성도 녀석을 향해 엄지 척.

“아무튼 당분간 임무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고? 하긴, 근신 중에 그렇게 활약했으니 자기들도 찔리는 게 있겠지. 이제부터 뭐 할 거냐?”

태호는 혜성이 서 있는 쪽으로 의자를 빙글 돌리며 물었다. 혜성이 NSA에 남기로 한 게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이번에 느낀 게 있어. 기본 능력치가 올라가면, 각성 후의 능력치도 상승하더라고. 마침 시간도 있으니 기본 능력 강화에 주력할 생각이야. 아직 부족한 체술도 익히고.”

혜성은 셔츠의 단추를 채우다가 멈칫했다.

‘마스터라고 했나?’

그는 뚱뚱이의 뇌파에서 본 회색 개량 한복의 노인을 떠올렸다.

그의 목표가 단순히 순직이라면 지금 실력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블랙의 타도. 언젠가 마스터까지 상대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기본 능력치라. 어디 보자.”

태호는 혜성의 분석 자료를 벽에 걸린 모니터에 띄웠다. 체력, 민첩성, 반사신경 등의 신체 능력. 각종 에너지 파형. 다양한 자료가 있었지만, 그는 EF와 관련된 수치를 확대했다.

“전체 EF는 1,100 남짓. 그새 10%나 올랐네. 뭐, 18,000이 넘는 유수혁에 비하면 아직 어림없지만.”

태호는 EF를 강화하는 방법들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제일 쉬운 건 일부 몬스터의 핵에서 발견되는 영약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다만 한꺼번에 강화하면 신체에 무리가 가는바, 한 번에 5%씩 점진적으로 강화해야 했다.

그 외에 기공을 수련하는 전통적인 방법도 있었지만, 어렵고 비효율적이라서 최근엔 기피하는 추세였다.

“잊었어? 난 방법이 하나 더 있는 거.”

혜성은 고통스러운 척 인상을 찌푸렸다.

“아!”

태호는 뒤늦게 그의 능력을 떠올리고 웃었다. 맞을수록 강해지는 능력.

“EF는 그렇다고 쳐도, 체술도 익힌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하려고?”

“못 들어 봤냐? 실전이 최고의 훈련이라는 거.”

혜성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은색 팔찌를 꺼냈다. NSA에서 능력자를 체포할 때 사용하는 수갑과 비슷한 아이템이었다.

“능력을 30% 정도로 제한하고 싸울 생각이야. 실전 같은 싸움으로 EF도 올리고, 덤으로 체술도 연습하고. 이런 게 바로 일석이조 아니겠냐?”

혜성은 팔찌를 도로 안주머니에 넣으며 히죽 웃었다.

2차 각성을 제한하고 최대한 큰 데미지를 얻는다. 간단하면서도 가장 효율적인 수련법이었다.

“미치겠네. 누구하고 싸우게? 길에서 무턱대고 시비를 걸 수는 없잖아. NSA에서도 당분간 임무에서 배제한다고 했고.”

태호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상대야 많지.”

혜성은 다시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밀었다.

받은 편지함. 그의 이메일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 도전장이 수북했다.

“내 유명세를 노리고 도전한 놈들도 있지만, 순수한 무인으로서 나와 겨뤄보고 싶다는 사람들도 많아. 비공개 스파링을 하자고 하면 아마 서로 먼저 하겠다고 달려들걸?”

“미친놈. 유수혁이 했던 도장 깨기냐?”

태호는 유수혁의 전설적인 일화를 떠올렸다.

아마 78연승이었던가? 연전연승. 한국에는 마땅한 도전자가 없어 나중엔 중국과 일본까지 원정에 나섰을 정도였다.

“비슷해. 결과는 반대겠지만.”

혜성은 어깨를 으쓱하며 쓰게 웃었다.

“정말 죽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그래, 언제부터 시작할 거야?”

태호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능력을 제한한다면 혜성은 보나 마나 연전연패. 주치의인 그도 바빠질 게 뻔했다.

“나 시간 없는 거 알잖아? 오늘 당장 시작하자.”

혜성은 재킷을 걸치며 검사실을 나갔다.

“이 미친놈아. 나도 준비할 시간은 줘야지.”

언제나처럼 태호가 악의 없는 욕설을 퍼부으며 허겁지겁 가방을 챙겼다.

***

늦은 오후 무렵, 천안시 외곽.

렌터카 번호판을 단 대형 SUV가 한적한 국도를 따라 천천히 나타났다. 혜성이 운전하는 차량이었다. 조수석에는 태호가, 뒷좌석에는 한수호가 앉아 있었다.

“여기쯤인가? 좀 머네.”

이윽고 혜성은 도로 옆 공터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태호와 한수호도 백팩을 짊어지고 따라 내렸다.

“넌 왜 따라왔냐?”

태호가 한수호를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녀석은 혜성과 똑같은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막내 형이 보고서 때문에 본부에 잡혔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가 아니면 누가 막내 형 대신 선배님을 수행합니까?”

한수호는 섭섭하다는 투로 되물었다.

“아카데미에는 안 돌아가?”

“안 그래도 연락이 왔습니다. 선배님하고 다니면서 배우는 게 최고의 현장 학습 아닙니까. 아카데미에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수호는 혜성의 옆에 바싹 붙었다. 신촌 사건 이후, 혜성과 떨어지는 게 불안한 눈치였다.

“아이고. 제2의 막내군.”

혜성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막내는 최고의 파트너인 동시에 결정적인 순간마다 순직을 방해하는 장애물. 겨우 장애물을 치웠다고 좋아했더니, 더 끈질긴 놈이 껌딱지처럼 달라붙었다.

“빨리 가자.”

혜성은 트렁크에서 장비를 꺼냈다.

우선 능력 봉인 팔찌를 양 손목에 하나씩 찼다. 그리곤 특수 제작한 양손용 목검을 들어 햇빛에 비춰봤다.

폭은 한 뼘, 검신의 길이는 약 1.3m. 밸런스를 위해 손잡이 부분이 보통의 검보다 길었다. 겉은 나무로 만들었지만, 속은 납을 채워 진짜 검처럼 묵직했다.

“이걸 어쩌지?”

그는 대검 옆의 상자를 바라봤다. 각종 보호구가 실려 있었다.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대로 트렁크를 닫았다. 보호구는 건들지도 않고.

“정말 보호구가 없어도 되겠습니까? 상대는 현장에서 은퇴한 지 오래됐어도 AA급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옆에서 한수호의 다소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자신 없지.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검술이 아주 화려하더라. 그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맞는 게 목표야.”

혜성은 대검을 어깨에 걸치며 눈을 찡긋했다. 말과 달리 걱정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크크크.”

한수호는 갑자기 몸을 돌리고 킥킥거렸다. 듣고 있던 태호도 입가를 씰룩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왜? 선배가 맞는 게 그렇게 재밌냐?”

혜성은 짐짓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싸우기 전에 맞을 것을 걱정하는데, 선배님은 반대로 안 맞을 걸 걱정하셔서 말입니다.”

한수호는 급히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시간이 없었다. 잡담은 여기까지.

“가자. 어디 한번 먼지 나게 맞아 보자.”

혜성은 쓰게 웃으며 공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습용 대검을 오른쪽 어깨에 걸친 채.

붉은 기와를 올린 옛날 스타일의 도장. [숭무관(崇武館)]이란 큰 현판이 보였다.

***

송도 연구소.

책임 연구원은 뒷짐을 진 채 정면의 대형 모니터를 응시했다. 안경을 쓴 두꺼비 같은 인상이었다.

“진행 상황은?”

그가 모니터의 각종 수치를 살피며 물었다.

좌우로 분할된 화면.

검은색 상자가 오른쪽에 보였다. 왼쪽에는 사람 모양의 이미지가 있었고, 상자와 사람 이미지 사이에 수십 가닥의 회색 점선이 깜빡였다.

“동기화 이상 무. 이혜성의 P2파 일부가 살짝 벗어났습니다만, 조정 범위 안에 있습니다. R파는……”

젊은 연구원이 빠른 손놀림으로 제어 장치를 조절하며 보고했다.

“내가 이걸 만들었다니. 이건 정말 걸작이야.”

책임 연구원은 흡족한 표정으로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단순한 아이템이 아닌, 자식처럼 느껴졌다.

“유니크 등급 아닙니까, 유니크. CIC에서도 이런 작품이 나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젊은 연구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문제는 아이템이 아니라 사용자야. 이혜성이 이걸 다룰 수 있을까?”

책임 연구원은 아이덴티티를 떠올렸다.

이건 그놈과 달랐다. 아이덴티티는 자신이 먼저 혜성을 파트너로 인정한 터. 하지만 눈앞에 있는 작품은 아이덴티티보다 더 까다로운 놈이었다.

“이놈은 양날의 검. 잘만 하면 최고의 무기가 되겠지만, 어설프게 덤볐다간 오히려 주인을 잡아먹을 거야.”

책임 연구원은 모니터의 하단을 응시했다.

동기화 진행률 83%. 100%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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