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54화 (54/150)

# 054. 넌 누구냐? (6)

저녁 무렵, 잠실 N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

“무슨 일이지?”

혜성은 렌터카를 구석에 세워두고 급히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강철호와 만나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려던 참에 연락을 받았다. 급하게 나온 탓에 트레이닝복에 병원 슬리퍼 차림이었다.

[긴급. 오피스텔에서 기다림.]

막내가 남긴 짧은 메시지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블랙에 대해 뭔가 알아낸 걸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몇 초가 수십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그의 오피스텔이 보였다.

“무슨 일……”

그는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가다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칠흑 같은 어둠.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뭐야? 먼저 와서 기다리는 거 아니었……?”

혜성은 고개를 갸웃하며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찾았다. 그때였다.

퍼펑!

난데없이 폭죽이 터졌다. 혜성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축하합니다.”

어둠 너머, 막내가 초를 켠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흐릿한 주황색 불빛 너머로 태호, 한수호, 김유진, 김연우 등의 낯익은 얼굴들도 보였다.

“어?”

혜성이 잠깐 당황하는 사이, 그들은 혜성을 오피스텔 가운데로 잡아끌고 둥글게 에워쌌다.

“소식 들었어요. 왜 우리한테까지 비밀로 한 거예요?”

왼쪽의 김연우가 짐짓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CIC에 출입하는 후배 기자한테 들었어요. CIC로 옮긴다면서요? 그것도 최연소 팀장으로.”

오른쪽의 김유진이 웃으며 덧붙였다.

“누가 그래?”

혜성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사방에서 한꺼번에 말이 쏟아지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에이, 시치미 떼는 겁니까? 우리 쪽 요원들이 태호 형님 병원을 몰래 지키는 거 알죠? 아까 걔들한테도 들었어요. 낮에 강철호가 왔었다고.”

이번엔 정면의 막내였다. 그는 케이크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생각 많이 했어요. 솔직히 처음엔 좀 놀랍고 섭섭했는데. 그래도 형을 보내주는 게 좋을 것 같더라고요. 이런 기회는 다시 없을 테니까.”

“맞습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최연소 팀장이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도 CIC로 가서……”

막내 옆의 한수호가 웃으며 말하는 도중이었다.

“엥? 너 NSA 아니었어?”

막내가 한수호를 돌아보며 섭섭하다는 듯 물었다.

“저 졸업 전이라는 거 잊으셨습니까? 아직 어디로 갈지 사인 안 했습니다.”

“이 새끼가. 배신이냐?”

“배신이라뇨? 전 혜성 선배님만 따라서……”

막내와 한수호 사이에 잠깐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제야 혜성은 전후 사정을 알 수 있었다. 90년대 스타일의 깜짝 파티.

“그거 없던 일로 됐어.”

혜성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뭐라고요?”

처음엔 다들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방안이 조용해졌다. 누군가가 벽의 스위치를 올려 불을 켰다. 어색하게 웃고 있는 혜성이 보였다.

“좀 아쉽지만 거절했다고. 대신 CIC에서 조만간 특수 아이템을 주기로 했어. 사령의 던전을 깬 보상이라나?”

혜성은 재차 ‘거절’이란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왜요? 미쳤어요?”

막내와 김연우가 대번 이구동성으로 따지듯 물었다.

“미친 거 아냐. CIC는 초승달 팀을 재건할 계획이거든. 팀원을 새로 뽑고, 팀 훈련까지 마치려면 실전 배치가 되는 건 최소 6개월 후. 생각해 봤는데, 6개월이나 현장을 떠나 있는 건 무리더라고.”

혜성은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웃었다.

막내와 다른 이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하긴, 형은 가끔 죽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이니까. 그래도 겨우 6개월인데? 팀장 다는 게 얼마나 힘든진 형도 잘 알잖아요.”

막내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혜성이 남는 건 좋지만, 한편으론 조금 실망한 표정이었다.

“겨우가 아냐. 무려 6개월이라고. 그리고 너희가 말했잖아. 우리는 팀이라고. 한 번 팀은 영원한 팀. 내가 너흴 두고 어디로 가겠냐?”

혜성은 막내와 한수호의 사이로 걸어가 어깨동무를 하고 나란히 섰다.

“형.”

“선배님.”

막내와 한수호는 감동한 표정으로 혜성을 바라봤다. 주위에 다른 눈이 없으면 포옹이라도 할 기세. 특히 한수호는 눈물을 삼키려는 듯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럼 이건 어쩌죠?”

김연우는 벽과 천장을 힐끔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형형색색의 풍선과 색종이. [축, 영전!]이라 쓰인 작은 현수막. 테이블이 휘어질 정도로 준비된 음식과 주류. 잘 포장된 선물들까지. 이만저만 준비한 게 아니었다.

“뭘 어째? 삼겹살집 회식이 엉망이 됐으니까. 오늘 다시 하는 셈 치고 그냥 우리끼리 즐기면 되지.”

훅, 혜성은 촛불을 불고 재차 크게 웃었다.

왁자지껄.

모두가 모처럼 웃고 떠드는 가운데, 한 사람만 예외였다. 지금까지 한마디도 안 하고 구석에 혼자 서 있던 태호였다.

“겨우 6개월이라고?”

태호는 쓰게 웃으며 캔맥주를 땄다.

***

자정 무렵.

오피스텔에는 혜성과 태호, 둘만 남았다. 다른 이들은 잔뜩 취해 돌아간 뒤. 오피스텔에는 빈 병과 쓰레기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당분간 현장을 떠나야 해서 거절했다고. 정말이냐?”

태호가 소파에 쓰러지듯 앉으며 물었다. 못 하는 술을 억지로 마신 탓에 얼굴이 발그레했다.

“그래. 내겐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리고 이번 사건에서 느낀 게 많았어.”

혜성은 녀석의 맞은편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때 누군가가 내게 말했지. 그래도 우린 이혜성을 믿는다고. 그 말을 듣는데 가슴에서 뭔가 울컥하더라.”

그때를 떠올리자 새삼 가슴이 뭉클해졌다. 하마터면 친구 앞에서 쪽팔리게 눈물을 보일 뻔했다.

CIC와 NSA.

두 곳 모두 순직이 가능했지만, 그 과정은 전혀 달랐다. CIC는 던전에서 임무 중 순직. 반면 NSA는 보통 도심에서 시민들을 지키다가 순직했다.

“그래. 이왕이면……”

혜성은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주황빛이 가득한 밤거리. 세상은 오늘도 활기 넘쳤다.

“내 오진일 수도 있잖아. 지금이라도 다른 병원에 가 보는 게 어때?”

태호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같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혈액 샘플을 채취해서 다른 병원에 몰래 보내 봤어. 결과는 동일하더라고.”

“…….”

“어떤 책에서 봤는데, 사람은 자신이 불치병임을 알게 되면 크게 4단계를 거친다더라. 처음엔 분노, 다음엔 원망, 그러다가 자포자기와 체념, 마지막으로 인정과 순응. 뭐, 사람마다 차이가 크지만 말이야.”

혜성은 독백처럼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내가 그래. 이젠 죽음이 내 운명처럼 느껴진다고 할까?”

“혜성아.”

태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혜성의 이름을 불렀다. 미안했다. 자신이 혜성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과 다름이 없었다.

혜성은 태호를 돌아보며 화제를 돌렸다.

“그때 신촌에서 BJ가 내게 물었던 거 기억해? 당신은 누구냐고. 그때는 NSA 멘트로 마무리했지만,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대답은 그게 아니었어.”

혜성은 BJ와 시민들의 눈을 떠올렸다. 불안과 기대가 공존하던 눈빛들. 그것이 안경 너머 태호의 눈동자와 오버랩됐다.

“아까 가짜 혜성을 봤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아는 진짜 이혜성이 맞습니까?”

태호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때 BJ의 말을 재현했다. 마이크를 쥔 것처럼 빈 주먹을 내밀며.

혜성도 입가에서 미소를 지웠다. 그리곤 인터뷰에 응하는 것처럼 분명하고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이름은 이혜성.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장렬히 순직하고 싶은 남자. 그 전까진 죽어도 못 죽는 남자입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

SJ 기획, 소회의실.

“NSA 쪽은 잘 처리했나?”

박무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물었다.

테이블 위에는 신문 사설들이 널려 있었다. 이번에도 영웅 이혜성이 사건을 해결했지만, 언제까지 소수의 영웅에게 기댈 수는 없었다.

사건이 종결된 이후 나타난 NSA에 대한 질타, 게이트 경보 시스템과 통신망에 대한 보완책 강구, 신촌역 일대 재건 계획 등. 사설의 논조는 전에 없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방금 NSA 국장과 얘기가 끝났습니다. 이번 사건은 NSA와 이혜성의 양동 작전. 이혜성이 신촌에서 적의 이목을 끄는 동안, NSA의 회색 여우 팀이 뒤에서 테러 조직을 일망타진했다. 이렇게 입을 맞췄습니다. 내일 공식 브리핑이 나갈 겁니다.”

옆에 있던 한수은이 신문들을 힐끔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물론 회색 여우팀이 잡았다는 테러 조직은 가짜였다.

“수고했군.”

박무영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번 사건은 외부에서 보는 것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NSA, CIC, 해외 첩보 기관 등 여러 이해관계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바, 이것을 매끄럽게 정리하고 수습하는 게 바로 한수은의 역할이었다.

“강지영은?”

“당분간은 조용히 연예 활동에 집중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미스터리는……”

한수은은 두툼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미스터리의 분석 자료였다. 예상대로 놈은 변신과 자기 복제 능력자. 사이코닉 배리어 때문에 심문이 쉽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정신 계통 능력자를 총동원했습니다. 놈의 무의식에서 단서를 하나 찾았습니다만, 그게 조금 뜻밖이었습니다.”

“그래?”

박무영은 보고서를 내려놓고 고개를 갸웃했다. 한수은의 입에서 뜻밖이란 말을 듣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한수은은 잠깐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유수혁. 그가 블랙과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인천공항 입국장.

“연예인이라도 오나?”

행인들은 잠시 발을 멈추고 근처를 두리번거렸다. 게이트 주위는 기자와 팬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잠시 후, 입국장 게이트가 열렸다.

“꺄아아아!”

팬들의 높은 환호성이 들렸다. 기자들도 플래시를 터뜨리며 전쟁을 벌였다.

깔끔한 회색 정장을 입은 젊은 사내가 게이트 앞에 나타났다. 머리는 옆으로 단정하게 빗어 넘겼다. 옷매무시, 헤어스타일, 표정, 동작 하나하나까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 유수혁!”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졌다.

대한민국 능력자 서열 7위. 백호 길드의 얼굴. 대한민국의 차세대 에이스. 그의 칭호는 온통 찬사 일색이었다.

- 공해에서 최초의 한, 중, 일 협동 작전을 수행하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십니까?

- 최근 백호의 해외 진출설이 돌고 있는데……

기자들은 커다란 마이크를 앞다퉈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자세한 건 오늘 저녁에 공식 브리핑을 통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일단 휴식을……”

매니저로 보이는 사내가 유수혁의 앞을 막았다.

유수혁은 카메라 앞에서 잠깐 손을 흔든 뒤,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밖으로 나갔다. 김준수가 검은색 세단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뒷좌석에 앉자 세단은 기자들과 팬들을 뒤로하고 떠났다.

“수고했네. SS급 던전 클리어라니. 덕분에 길드 주가도 연일 상한가야.”

옆에 앉은 김준수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유수혁은 상대의 손을 맞잡으며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 한 달 만인가요? 역시 한국이 좋군요. 그동안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까?”

“이혜성이라고. 그 이름처럼 혜성처럼 등장한 능력자가 있었네.”

김준수는 파란색 서류철을 건넸다.

“맞으면 강해지는 남자라. 재미있는 타입이군요. 기회가 된다면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유수혁은 흥미가 동한 표정으로 서류를 대충 훑어봤다. 혜성의 사진과 간단한 신상정보가 담겨 있었다.

“사실 내가 직접 2번이나 스카우트를 제의했네. 보기 좋게 거절당했지만.”

“백호의 제안을요?”

“그래. 계약금만 20억을 제시했는데, 꿈쩍도 않더군. 돈이나 명예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사명감 때문에 싸운다나?”

김준수는 스카우트 일화를 짧게 설명했다. 새삼 쓴웃음이 나왔다.

“참, ‘아이덴티티’는 어떻게 됐습니까? 송도 연구소에서 제작 중인 제 시그니처 아이템 말입니다.”

잠시 후, 유수혁은 혜성의 서류를 덮으며 물었다.

“그게 좀…… 곤란하게 됐네. 테스트를 위해 경주로 이송 중 사고가 발생했거든. 그 와중에 아이덴티티가 잠깐 깨어나 멋대로 파트너를 정해버렸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건 제 전투 경험을 베이스로 제작된 것 아닙니까? 제가 아니면 누가 주인이란 말입니까?”

유수혁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이템의 자가 학습을 위해 자의식을 부여하지 않았나? 그 때문에 주인이 바뀐 것 같네.”

김준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아이덴티티의 주인이?”

유수혁은 손에 든 서류철을 다시 열었다. 중간쯤, 혜성이 이송 작전 중 벌인 전투에 관한 자료가 보였다.

“맞네. 이혜성. 그가 아이덴티티의 새로운 파트너야.”

김준수는 유수혁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유수혁의 자존심은 유명한 터. 자신의 물건을 다른 이에게 빼앗기고도 웃어넘길 사람이 아니었다.

“제가 이혜성을 만나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요. 그가 정말 아이덴티티에 어울리는 자인지, 제가 직접 판단하겠습니다.”

유수혁은 혜성의 사진을 노려보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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