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3. 넌 누구냐? (5)
S 커피숍.
“크윽.”
미스터리는 양손으로 배를 감싸며 비틀거렸다. 카운터 옆에 서 있던 놈이었다. 놈의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머저리 새끼. 내가 널 어떻게 찾아왔을까?”
강지영은 총구에서 뿜어지는 연기를 훅하고 불었다. 승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커피숍에 가득했던 놈의 허상들은 그녀가 분 연기처럼 사라졌다.
“쯧쯧, 하필 상대가 나였다니. 뭐, 당장 죽이진 않을 거야. 우린 따로 할 말이 많거든.”
그녀는 혀를 차며 다시 권총을 들었다. 탕탕, 놈의 양발과 양어깨에 한 방씩.
“으아! 이 씨발년!”
미스터리가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는 인정사정 보지 않고 마무리했다.
“혜성 씨는 잘하고 있으려나?”
잠시 후, 그녀는 무기를 거두며 서쪽 하늘을 힐끔 쳐다봤다. 핏빛 게이트가 떠 있었다.
***
게이트 아래.
콰쾅, 갈라진 도로 틈에서 크고 작은 물줄기가 솟구쳤다.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싸움의 영향으로 지하 송수관이 터진 모양이었다.
시민들은 어깨를 움츠리며 비명을 질렀다. 주위는 폐허가 된 지 오래. 폭격기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설마 이혜성이 지는 건 아니겠지?”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나?”
“아니야. 그래도 이혜성인데.”
“맞아. 언제나처럼 멋지게 역전할 거라고.”
시민들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혜성을 바라봤다. NSA나 CIC, 군경은 감감무소식. 믿을 건 오직 혜성뿐이었다.
“크아아아!”
보스의 괴성과 동시에 하급 몬스터들이 일제히 혜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부하들의 돌진. 혜성의 반격. 그리고 보스의 기습적인 치고 빠지기. 어느덧 세 번이나 같은 패턴이 반복됐다.
쾅, 혜성은 도로변에 세워진 버스의 옆에 처박혔다.
“형!”
“선배님!”
막내와 한수호가 동시에 비명처럼 외쳤다. 시민들도 움찔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끄응, 혜성은 버스의 타이어를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게 아닌데. 그땐 좀 더 힘을 뺐던 것 같은데.”
그는 뜻 모를 말만 반복하며 다시 주먹을 올렸다. 머리 쪽을 너무 많이 맞은 상태. 눈두덩이가 부어오른 가운데 시야가 가물거렸다.
“형! 인제 그만 해요!”
“선배님!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막내와 한수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 너 왜 그래? 정신 차려!
대수영도 머릿속에서 계속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답답한 것 같았다.
“괜찮아. 거의 다 됐으니까. 이제 좀 알 것 같아.”
- 대체 뭘 알겠다는 건데?
“보면 알아.”
퉤, 혜성은 피가 섞인 침을 뱉으며 오른손을 살짝 들었다. 그리곤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잔뜩 부어오른 눈꺼풀 아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두두두, 하급 몬스터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 조심!
대수영이 짧게 외치며 놈들의 예상 경로를 미리 보여줬다. 수십 개의 공격이 중첩돼 있었다.
8시 방향.
놈들이 미처 커버하지 못한 미세한 틈이 보였다. 혜성은 그 틈을 따라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놈들의 긴 손톱이 그의 잔상을 아슬아슬하게 할퀴고 지나갔다.
‘왔다!’
돌진하는 보스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바람의 송곳니라는 이름답게 빠르고 날카로운 움직임.
‘놈도 마무리를 지을 생각인가?’
혜성은 놈의 손톱을 주목했다.
놈의 손톱들은 30cm 정도의 단검처럼 길어져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초진동 블레이드의 변형.
혜성은 이를 악물고 의식을 집중했다.
- 시발!
대수영이 욕설을 퍼부으며 놈의 공격을 보여줬다. 손톱들이 작은 그물처럼 그의 턱을 덮쳐오는 환상이었다.
암흑의 수호자가 턱을 이중으로 감쌌다. 하지만 암흑의 수호자가 막은 건 손톱에 실린 예기. 놈이 체중을 실어 담은 힘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쾅, 그의 고개가 수직으로 젖혀졌다.
“큭!”
혜성의 입에서 진득한 핏물이 뿜어졌다. 머리가 뽑히는 것처럼 아득한 통증이 밀어닥쳤다.
바로 그때, 놈이 물러나려는 찰나였다.
“어딜!”
혜성은 놈을 향해 왼손을 내밀었다.
놈은 급히 손을 움츠렸지만, 이번엔 그가 더 빨랐다. 그의 왼손은 놈의 오른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놈의 움직임이 멈췄다.
두근!
시간의 흐름이 어긋났다. 세상이 정지된 가운데 그 혼자만 움직이는 느낌. 그의 입에서 뿜어진 핏방울이 떨어지는 광경까지 또렷하게 보였다.
‘그래, 이거였어!’
그는 상체를 숙이며 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놈의 당황한 표정, 수축된 근육, 그리고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까지. 모든 게 생생하게 전달됐다.
“크아!”
놈이 당황하며 주먹을 날렸다.
그는 놈의 주먹을 머리 위로 가볍게 흘렸다. 그리곤 몸통을 왼쪽으로 틀고 놈의 가슴에 기대듯 밀착했다. 동시에 오른팔은 쭉 내밀어 손바닥을 놈의 명치에 붙였다.
끝으로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반사!”
번쩍, 그의 손바닥에서 빛이 뿜어졌다. 주위의 모든 사물을 침묵으로 집어삼키는 거대한 섬광이었다.
***
“뭐야?”
막내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급히 손으로 눈을 가리고 얼굴을 돌렸다.
몇 초 정도 지나자 시력이 돌아왔다.
빛이 희미하게 남은 도로 중앙.
혜성과 보스 몬스터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였다. 혜성이 놈의 품을 파고들어 명치에 손바닥을 갖다 댄 모습. 둘은 박제가 된 듯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혜성이 방금 뭘 한 거야?”
누군가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막내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한수호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멍한 표정으로 혜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하급 몬스터들도 공격을 잊고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혜성과 보스 몬스터를 감싸는 것처럼.
파스스, 보스 몬스터는 가루가 돼 서서히 흩날렸다.
“아!”
시민들은 순간적으로 탄성을 내뱉었다.
바닥에는 연기가 자욱하게 깔린 상태였다. 희미하게 남은 빛의 잔상이 조명처럼 혜성을 비췄고, 보스의 가루가 빛 알갱이처럼 흩어지며 주위를 감쌌다.
그야말로 혜성을 위한 독무대.
막내는 뭔가를 떠올렸다. 누적된 데미지를 상대에게 돌려주는 기술. 측정 불가의 파괴력을 지닌 혜성의 3차 각성이었다.
“하아, 죽겠다.”
혜성은 2차 각성이 해제돼 털썩 주저앉았다.
“맞죠? 3차 각성! 지하 마켓에서 보여줬던 필살기! 어떻게 한 거예요?”
막내는 혜성에게 달려가 부축하는 한편, 잔뜩 흥분해서 질문을 쏟아냈다.
같은 3차 각성이었지만, 그때와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그때는 외부의 버프를 받아서 얼떨결에 했지만, 이번엔 혜성이 의도적으로 한 것이었다.
“와, 정말 3차 각성이야?”
“AA급을 한 방에 가루로 만들다니.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사람들도 황당한 표정으로 웅성거렸다.
“나도 몰라. 어쩐지 될 거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
혜성은 자신의 오른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굳은살이 박인 평범한 손. 하지만 데미지가 폭발할 때의 감각이 남아 있었다.
‘만약 다시 해보라고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히 자신 없었다.
격전을 치르며 누적된 데미지.
그 덕분에 강해진 건 EF만이 아니었다. 기초 능력이 강화된 만큼 각성 후의 능력도 새로운 경지에 접어든 것 같았다. 게다가 3차 각성까지 왔으니, 이론상 4차나 그 이상의 각성도 가능했다.
‘순직하려면 장렬하게 죽어야 하는데, 죽으려고 데미지를 받으면 더 강해지는 아이러니라니.’
혜성은 한편으로 허탈한 기분도 들었다.
“씨발, 이건 축복이야, 저주야?”
생각은 여기까지. 조무래기들이 남아 있었다.
“이 새끼들, 다 죽여버려!”
시민들은 함성을 지르며 몬스터들에게 달려들었다.
“끼에엑!”
몬스터들은 비명처럼 울부짖으며 도망쳤다. 보스를 잃고 숫자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 놈들은 우왕좌왕하다가 시민들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다.
순식간에 전투 종료.
혜성과 막내는 나설 필요도 없었다. 상황이 진정된 후, 혜성이 벽에 기대 쉬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왔다. 상황을 중계하던 BJ였다.
“아까 가짜 혜성을 봤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아는 진짜 혜성이 맞습니까?”
BJ는 핸드폰에 담긴 혜성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시민 중 일부도 여전히 불안한 눈치였다.
“아니, 2차 각성한 걸 보고도 몰라요? 당연히……”
막내가 대신 대답하려는 찰나, 혜성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제가 누구냐고요?”
혜성은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어색하게 웃고 있는 태호가 제일 먼저 보였다. 막내와 한수호, 김유진과 김연우, 그 외 수많은 시민도 차례대로 보였다. 모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만 쳐다보고 있었다. 문득 그들의 얼굴에 CIC 팀장, 강철호의 얼굴이 오버랩됐다.
“최연소 팀장이라.”
혜성은 알 듯 말 듯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네? 뭐라고요?”
BJ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아닙니다.”
혜성은 웃음으로 얼버무린 뒤, 가슴을 펴고 당당히 말했다.
“소리 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의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 K-NSA가 항상 여러분 곁에 있겠습니다!”
이젠 혜성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멘트. 다만 평소와 달리, 그는 NSA라는 단어를 유독 강조했다.
***
정오 무렵, 강남역 S 커피숍.
“늦어서 죄송합니다.”
막내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김연우의 옆에 앉았다.
“또 회의냐?”
김연우가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를 줬다.
“무슨 소리야? 태호 형 병원에서 오는 길인데. 혜성이 형하고 수호 입원한 거 몰라?”
막내는 커피를 들어 목을 축이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참, 태호 씨는 좀 어때? 그날 상당히 안 좋아 보였는데.”
“큰 이상은 없어. 그냥 휴식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그런데 태호 형한테는 왜 관심이야? 씹다 만 오징어 같다더니.”
막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김연우의 눈치를 살폈다. 누나답지 않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분명 뭔가 있었다.
“관심이라니? 그냥 같이 싸웠으니까 걱정이 돼서 물어본 건데.”
“정말? 단지 그 때문이야?”
당황해서 얼버무리는 김연우와 의미심장하게 웃는 막내. 남매의 표정이 묘한 대조를 이뤘다.
이대로라면 남매의 만담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신촌에서 그 난리를 치르고 하루 반도 안 지났잖아요. 그보다 보고서가 쌓였을 텐데. 불러내서 죄송해요.”
맞은편에 앉은 김유진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끼어들었다.
“괜찮아요. 그나저나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신 거예요?”
막내는 김유진의 눈치를 살피며 진지하게 물었다. 감사 인사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문자나 전화로는 못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거든요.”
김유진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혜성 씨는 지금 어디에 있죠?”
“어디긴요. 태호 형 병원에 입원해 있죠. 눈에 보이는 부상은 나았지만, 좀 더 안정이 필요하대요. 병원 근처에 손님이 왔다고 했으니까, 아마 근처 커피숍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있을 거예요. 왜요?”
막내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CIC에 출입하는 후배한테 들은 뉴스가 있거든요.”
김유진은 주위를 쓱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뭔데요?”
“혜성 씨가 CIC로 옮긴다는 말이 있어요.”
“에이. NSA하고 CIC는 유명한 앙숙인데. 사설 길드에 스카우트되는 거면 모를까, CIC로 이적하는 건 말이 안 돼요.”
막내는 오른손을 내저으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웃어넘길 일이 아니에요. 최연소 팀장이라나? 아무튼 엄청 좋은 조건을 제시했대요. CIC 내부에서는 혜성 씨의 이적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눈치라고요.”
김유진은 무거운 표정으로 ‘팀장’이란 단어를 강조했다.
“최연소 팀장?”
그 순간, 막내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럼 막내하곤 어떻게 되는 거야?”
김연우도 어두운 표정이 돼 막내를 쳐다봤다.
CIC의 팀장.
체계가 좀 달랐지만, 공무원으로 따지면 3급 상당이었다. 사회적인 인식과 대우도 어지간한 길드장급 이상. 팀장이야말로 모든 국가 기관의 꽃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혜성 씨 개인적으로는 영광스러운 일이에요. 우리도 당연히 축하해 줘야 하고요. 하지만 CIC의 활동무대는 던전이잖아요. 지금처럼 둘이 같이 팀을 이룰 수는 없을 거예요.”
김유진은 막내의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다.
사실 그녀와 김연우는 혜성이 이적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었다. 시간만 맞으면 사적으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혜성의 그림자 같은 파트너, 막내였다.
막내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착잡한 표정으로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뇌전의 광견, 차성진의 예고 테러, 그리고 사령과 미스터리의 함정까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와 혜성은 함께 울고 웃으며 위기를 헤쳐나왔다. 이젠 한수호까지 포함해서 한 식구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혜성과 처음 만난 날.
- 가즈아아!
혜성이 미친놈처럼 가속페달을 밟던 모습은 절대 잊혀지지 않았다.
“그럼 형이 지금 만나고 있는 손님이……”
막내는 한숨을 내쉬며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