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2. 넌 누구냐? (4)
신촌역 1번 출구 근처.
“여긴가?”
강지영은 잠깐 걸음을 멈췄다.
10m 전방.
옅은 안개에 둘러싸인 커피숍이 보였다. 다른 상점들과 마찬가지로 조명은 나갔고, 출입문과 창문의 유리는 모두 깨져 있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도망친 뒤.
커피숍과 그 일대는 도심 한복판에 있는 유령의 마을 같았다.
강지영과 웅은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놈의 신호가 감지되는 곳은 커피숍 안. 그리고 정문 외에 다른 출입구는 없었다.
쾅, 웅이 문을 박차고 먼저 진입했다. 그때였다.
“왔어?”
가게 구석에서 낮은 목소리가 그들을 환영하듯 말했다.
둘은 인상을 찌푸리고 커피숍 왼쪽을 바라봤다. 한 사내가 다리를 꼬고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신촌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은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 물론 그것이 놈의 진짜 얼굴일 리는 없었다.
“크아!”
웅이 괴성을 지르며 다짜고짜 돌진했다. 그러나 세 걸음도 떼기 전.
“멈춰!”
뒤에 있던 강지영이 급히 그의 어깨를 짚었다.
웅은 뒤늦게 멈칫했다. 이미 늦었다. 발밑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는 울상으로 강지영을 돌아봤다.
“어이없군. 혹시나 해서 이것저것 깔아놨는데, 너무 쉽게 걸린 거 아냐?”
미스터리는 그들을 비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어쩔 거지? 카페 곳곳에는 폭발 아이템이 지뢰밭처럼 깔렸는데. 물론 그것들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건 나 하나뿐이고. 크크크.”
놈은 오른쪽 벽을 향해 손을 슬쩍 내밀었다.
쾅, 손바닥에서 뿜어진 섬광이 벽을 강타했다. 놈이 NSA에 잠입해서 최면술사를 제거했을 때 사용한 수법이었다. 콘크리트 벽에 손바닥만 한 구멍이 뚫렸다.
“어쩌긴? 널 체포해야지.”
강지영은 피식 웃으며 웅의 앞으로 나섰다.
“너 혼자?”
미스터리는 조금 놀랍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방금 그가 보여준 능력은 A급 이상. 혜성을 상대하던 복제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내가 약해 보이나? 아니면 웅이랑 같이 다녀서 그런가? 왜 다들 나만 보면 약하다고 생각하지?”
강지영은 한숨을 내쉬며 왼손을 허리 뒤로 가져가 뭔가를 꺼냈다. 한 뼘 크기의 권총이었다. 그러면서 오른손으로는 허리띠에서 흐느적거리는 검을 꺼내 들었다.
“밤안개의 제자냐?”
미스터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왜? 이제 좀 진지해졌어?”
그녀는 피식 웃으며 양손에 에너지를 주입했다.
철컹, 권총에 탄환이 장전됐다. 연검도 파르르 떨리더니 강철로 만든 것처럼 뻣뻣해졌다.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볼까?”
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강지영의 신형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
핏빛 게이트 아래.
“온다!”
사람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상공을 올려다봤다.
몬스터들의 강림. 그것은 언제 봐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하늘에 쉰 개의 작은 녹색 점이 나타났다. 처음엔 완만한 속도. 몬스터들은 마치 낙하산을 멘 것처럼 천천히 떨어졌다. 하지만 어느 지점부터는 낙하 속도가 점점 빨라졌고, 종국엔 무릎을 살짝 굽히며 날렵하게 착지했다.
“끄아아아!”
몬스터들의 괴상한 울음이 귀청을 찢듯 길게 울렸다.
“바람의 송곳니?”
막내는 몬스터들을 유심히 살피며 인상을 찌푸렸다.
녹색 피부를 지닌 인간형 몬스터.
중학생 정도의 작은 체구에 눈이 커서 언뜻 보면 귀엽기까지 했다. 특별한 스킬이나 무기는 무(無). 하지만 놈들은 엄연히 B급 몬스터였다. 작은 만큼 몸이 재빨랐고, 한번 기세를 타면 적을 사정없이 할퀴고 물어뜯었다.
“놈들이 여길 벗어나게 해선 안 됩니다.”
중앙의 막내가 시민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시민들은 어느새 15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대부분 군필자. 게이트와 던전의 시대가 열린 이후, 기초적인 대 몬스터 전투법은 군에서 필수였다.
“맡겨 두라고.”
“쫄 것 없어. 숫자는 우리가 훨씬 많아.”
시민들은 쇠파이프, 몽둥이, 식칼 등을 고쳐 잡으며 3중의 포위망을 형성했다. 물론 군에서 상대한 건 어디까지나 C급 이하의 조무래기들. B급은 처음이었지만, NSA의 영웅들이 함께한 탓인지 움츠러들지 않았다.
“좋았어. 이 기세로……”
막내가 검지를 들고 화염을 맺으려는 찰나였다.
쿵, 지면이 쩍쩍 갈라지는 가운데 마지막 몬스터가 나타났다. 바람의 송곳니치고는 큰 180cm의 체구.
AA급 보스 몬스터였다.
“젠장, 역시 AA급으로 소환했군.”
막내는 주춤 물러서며 오른쪽을 돌아봤다. 시민들도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며 막내의 오른쪽을 바라봤다.
“네 상대는 나다. 몇 배나 큰 적만 상대했는데. 오랜만에 비슷한 체급과 싸우는군.”
혜성이 큰 걸음으로 나와 보스의 앞을 막아섰다. 몇 분 정도 쉰 덕분에 체력도 약간 회복된 상태. 시민들은 혜성의 존재만으로 든든했다.
혜성이 완전히 자세를 잡기 전, 보스의 모습이 돌연 사라졌다. 순간이동만큼 빠른 움직임이었다.
“컥!”
혜성은 피를 뿜으며 삼겹살집 벽을 향해 날아갔다. 당당히 나선 것치곤 너무 허망한 결과. 유리와 잔해가 그의 머리 위로 우수수 쏟아졌다.
“맞았다!”
“그렇지!”
시민들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열광했다.
“제길.”
잠시 후, 건물 잔해를 헤치고 혜성이 나타났다.
은은한 서기와 황금빛 눈동자로 대표되는 2차 각성의 상태였다. 암흑의 수호자는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형태로 그를 감싸고 있었다.
“아니, 이 양반들이. 아파 죽겠는데, 지금 누굴 놀리나?”
혜성은 좋아하는 시민들을 둘러보며 쓰게 웃었다.
아직도 등줄기가 서늘했다. 가드를 조금만 늦게 올렸어도 즉사했을 터. 사령이 변신 전에 보여준 단검술도 빨랐지만, 지금 놈의 스피드에 비하면 굼벵이처럼 느렸다.
“끄륵?”
놈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사라졌다.
“흥!”
혜성의 모습도 좌우로 흐릿하게 사라졌다.
콰쾅, 이번엔 몬스터가 반대편에 처박혔다.
“뭐야?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도 몰라. 뭐가 저렇게 빨라?”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짧은 순간 동안 혜성이 고개를 살짝 움직여 놈의 스트레이트를 피하고, 거의 동시에 원투를 놈의 턱에 번개처럼 꽂는 장면을.
“이번 적은 스피드 스타인가? 이거 참 재미있는 능력이군.”
혜성은 어깨를 풀며 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
강지영 대 미스터리.
미스터리도 AA급 이상이었지만, 강지영의 현란한 공격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탕, 쇄액.
강지영의 손에 들린 권총과 검이 연달아 미스터리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제길!”
미스터리는 손발이 어지러워져서 물러서기 급급했다.
곳곳에 깔아둔 아이템은 무용지물. 강지영은 현란한 보법으로 아이템이 없는 곳만 골라서 움직였다. 마치 아이템이 어디에 있는지 훤히 보인다는 것처럼.
“이, 씨발 년이!”
마침내 미스터리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사라졌다.
“흥!”
강지영은 가볍게 코웃음 치며 놈의 왼쪽을 파고들었다. 놈이 화들짝 놀라며 뛰어오른 순간, 그녀의 총구가 재차 불을 뿜었다.
“큭!”
놈의 왼쪽 어깻죽지에서 피가 뿜어졌다.
그녀가 쫓아가며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놈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그녀의 앞에 던졌다.
콰쾅, 굉음과 함께 바닥이 움푹 파였다. 소형 폭탄이었다. 그녀가 잠깐 멈칫한 사이 놈은 공중제비를 돌며 멀찌감치 물러났다.
“씨발!”
미스터리는 강지영을 노려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어때? 이제 좀 상황 파악이 되나?”
강지영은 검을 거두며 놈을 비웃었다.
미스터리는 벽에 등을 붙이고 눈알을 좌우로 굴렸다.
커피숍 내부는 태풍이 휩쓸고 간 듯 엉망이었다. 입구 쪽은 웅이 지키고 있었고, 눈앞에는 차갑게 비웃고 있는 강지영이 있었다. 도망칠 곳이 보이지 않았다.
“훗! 아직 끝난 건 아니지.”
미스터리는 돌연 피식 웃었다.
강지영이 권총을 들려는 순간, 놈이 반 박자 빠르게 뭔가를 던졌다.
파앗, 환한 빛무리가 커피숍을 가득 메웠다.
“치잇!”
강지영은 눈을 찌푸리며 일단 물러섰다.
“크크크. 이건 어때?”
빛 속에서 놈의 웃음이 들렸다.
“뭐?”
잠시 후 다시 시야가 돌아왔을 때, 강지영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카운터. 테이블. 소파. 커피숍은 서른 명이 넘는 미스터리로 북적거렸다.
“어때? 우리 중에 누가 진짜일까?”
놈들이 일제히 웃으며 물었다. 얼굴, 표정, 옷. 모두 복사해서 붙여넣은 것처럼 똑같았다.
탕, 강지영은 대뜸 제일 가까운 미스터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허상이었다. 총알이 지나간 부위가 잠깐 일렁거렸지만, 놈은 아무렇지도 않게 히죽 웃었다.
“유심히 관찰했지. 네 총은 사용자의 에너지를 탄환으로 변환하는 것 같더군. 보기와 달리 에너지 소모가 클 테지. 어때? 내 말이 맞지?”
미스터리들은 동시에 이죽거렸다.
혜성이 상대했던 복제들과는 달랐다. 전투 능력이 없는 허상이었지만, 그 숫자는 서른이 넘었다.
“병신. 혼자만 잘난 척하더니 헛똑똑이군.”
1시 방향. 그녀는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총성이 길게 울려 퍼졌다.
***
게이트 아래.
바람 소리만 들릴 뿐, 혜성과 보스 몬스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쾅, 언제부턴가 전투기가 나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혜성의 움직임이 소리보다 빨라졌다는 뜻이었다.
몬스터 중 어리바리한 놈 하나가 멋모르고 접근했다가 풍압 때문에 갈기갈기 찢어졌다.
“저게 뭐야?”
“AAA급 이상이잖아.”
“다들 피해!”
시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조무래기 몬스터들도 둘의 대결에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콰쾅!
다시 요란한 충돌음과 함께 뭔가가 날아가며 반대편 벽이 허물어졌다. 보스 몬스터가 처박힌 것이다.
“와-아! 역시 이혜성!”
사람들은 혜성을 연호하며 함성을 질렀다.
“그렇게 맞고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니. 보기보다 맷집이 세군.”
혜성은 암흑의 수호자에 둘러싸인 채 놈을 내려다봤다. 말도 통하지 않는 몬스터였지만, 강인한 체력과 끈기는 그저 감탄이 나왔다.
“끄아아!”
보스가 게이트를 올려다보며 길게 포효했다. 잔뜩 화가 난 것 같았다.
“끼에엑!”
하급 몬스터들도 호응하듯 일제히 원숭이처럼 울어댔다.
다음 순간, 하급 몬스터들이 사방에서 혜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혜성을 숫자로 짓누르려는 것처럼.
혜성의 신형이 모두의 눈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그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뿌연 기운이 대포처럼 쏘아졌다.
콰쾅, 몬스터들은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몇 놈이 날아간 곳은 하필 시민들 근처.
“죽여!”
놈들을 향해 시민들이 기다렸다는 듯 매타작을 쏟아냈다.
하지만 보스 몬스터가 노린 건 바로 그 틈이었다. 혜성의 주의가 하급 몬스터들에게 분산된 순간, 놈이 바람처럼 사라져 혜성을 기습했다.
쾅, 이번에는 혜성이 타격을 받고 날아갔다. 관자놀이, 명치, 가슴 등.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 대를 얻어맞아 온몸이 부어올랐다.
“형!”
막내가 다급하게 외쳤다.
구경하던 시민들도 안절부절못하고 움찔거렸다. 2차 각성의 치명적인 약점. 혜성의 낮은 체력이 생각난 것이다. 그렇다고 함부로 끼어들자니 보스의 빠른 공격이 두려웠다.
잠시 후, 잔해를 헤치고 혜성이 나타났다. 암흑의 수호자 덕분에 치명상은 면한 상태. 그는 오른손을 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저 새끼. 부하들을 미끼 삼아 내 체력을 갉아먹을 생각이군. 한 방. 한 방에 보내야 한다.”
혜성은 보스 몬스터를 노려보며 다시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사이 보스와 하급 몬스터들은 혜성을 포위하고 2차 공격을 준비했다. 보스의 포효. 하급 몬스터들의 일제 공격. 그리고 다시 보스의 기습.
쾅, 혜성은 같은 상황이 돼 날아갔다.
“역시 우리도……”
“괜찮다니까!”
막내가 화염을 날리려는 찰나, 벽 너머에서 혜성이 크게 외쳤다.
“이런 감각이었나? 아니야. 그때는 좀 더 차분한 느낌으로……”
그는 묘한 말을 중얼거리며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뭔가가 떠오를 듯 말 듯. 주위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체 뭘 하려는 거야?”
막내는 초조한 표정으로 혜성을 바라봤다.
이상했다. 분명 수세에 몰린 건 혜성이었다. 그런데 걱정보다 정체 모를 기대가 앞섰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시민들도 그와 비슷한 표정으로 혜성만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막내는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혜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