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1. 넌 누구냐? (3)
H 백화점 앞 대로변.
짙은 안개가 대부분 걷혔지만, 현장은 아직도 난장판이었다. 금이 간 도로, 부서진 차량,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진 부상자들이 몬스터가 휩쓸고 간 뒤의 끔찍함을 대변해 주었다.
도로 한쪽, 버스에 기대앉은 한수호도 그중 하나였다.
“누나. 누나는 혜성 선배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요?”
한수호가 마른기침을 토해내며 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김유진은 손수건으로 그의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창백한 안색과 비 오듯 흐르는 땀. 한수호의 상태는 갈수록 나빠졌다.
“감동? 존경? 아니요. 선배의 영상을 인터넷에서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전 선배를 원망했어요.”
한수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어쩐지 쓸쓸한 표정이었다.
“선배 같은 영웅이 좀 더 일찍 나타났다면, 그래서 그 빌어먹을 SN-0754 게이트를 막아줬다면, 제가 지금처럼 아카데미에서 아등바등 훈련을 받을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요.”
“……”
“왜 능력자들은 하나같이 돈과 명예에 눈이 멀었지? 왜 이혜성 같은 슈퍼 히어로는 진즉에 나타나지 않았지? 이런 원망 말이에요.”
한수호의 시선은 김유진의 뒤로 향했다. 아직 도망가지 않은 청년들이 둘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다시 물어볼게요. 혜성 선배의 청문회에서 누나를 봤어요. 누나가 겪은 혜성 선배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정말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 후배를 뒤에서 기습하는 파렴치한이었나요?”
쿨럭, 기침이 심해졌다. 김유진이 놀라 뭐라 말을 하려 했다. 한수호는 오른손을 들어 괜찮다는 시늉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전 아직도 모르겠어요. 혜성 선배가 왜 저를 공격한 건지. 형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다만 한 가지, 선배가 위기에 빠졌다는 건 알겠어요.”
조용했다. 시민들은 복잡한 표정으로 한수호만 바라보고 있었다.
“전 혜성 선배를 믿어요. 아니, 믿고 싶어요. 조금 답답할 때도 있지만, 혜성 선배야말로 우리가 기다리던 슈퍼 히어로라고. 그리고 선배 같은 능력자들이 하나둘씩 많아지면, 언젠가 이 세상도 다시 순수와 정의를 되찾을 거라고.”
입술이 갈라져 말할 때마다 피가 흘렀다. 여기까지. 한수호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핸드폰을 들었다. 술 한잔 걸친 것 같은 20대 초반의 남자였다. 다행히 통신망이 일부 복구됐다.
“야, 지금 어디냐? 멀리 도망 안 갔지? 빨리 튀어와, 새끼야. 대피소에 있는 다른 애들하고.”
주변이 조용해진 탓에 그의 통화 내용은 모두에게 똑똑히 들렸다.
“……어떤 중삐리가 몬스터하고 싸우다가 다쳤거든. 그런데 내가 어떻게 도망쳐? 대한민국 육군 병장 체면이 있지. …… 아, 나도 몰라. 잔말 말고 일단 튀어와.”
이윽고 그는 통화를 거칠게 끊고 한수호를 내려다봤다.
“어린놈이 말은 잘하네. 하긴, 내면에 흑염룡 한 마리씩 키울 나이니까. 너 평소에 이런 거 상상하며 연습했지?”
그는 피식 웃으며 악의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신촌은 젊음과 혈기가 넘쳐나는 거리.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를 타자,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곧 다른 이들도 핸드폰을 꺼내 여기저기 연락했다.
“혜성 씨가 어디 갔는지 알아?”
잠시 후, 김유진이 한수호를 부축하며 물었다.
“그야 당연히 우리가 처음 만나기로 했던 장소겠죠.”
한수호는 멀리 게이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삼겹살집 근처였다.
***
인적이 사라진 신촌 밤거리.
“시민 여러분, 저는 지금 신촌……”
한 사내가 카메라를 힐끔거리며 다급한 목소리로 멘트를 날렸다.
우연히 현장 촬영을 나온 BJ였다. 본래 장르는 신촌의 밤거리를 중계하는 일상물이었지만, 게이트가 생성된 다음에는 스릴 넘치는 액션물로 장르가 바뀌었다. 물론 바뀐 분위기만큼 실시간 구독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싸늘합니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서 꽂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발은 몬스터보다 빠르니까요.”
그는 표절 냄새가 나는 멘트를 신나게 떠벌렸다.
솔직히 그도 싸움에 휘말리는 게 무서웠다. 하지만 그는 구독과 좋아요에 죽고 사는 BJ. 이런 대박 아이템을 눈앞에 두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는 카메라를 오른쪽으로 옮겼다. 약 20m 전방. 연기가 짙게 깔린 삼겹살집에서 싸움이 한창이었다. 누가, 왜 싸우는지는 모르겠지만, 연기 속에서 혜성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좀 더 가까이 가 보겠습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삼겹살집으로 다가갔다.
혜성 대 혜성의 싸움이 한창이었다. 자욱한 연기와 빠른 움직임 탓에 정확한 상황 파악이 어려웠다. 다만 핏방울이 사방에 튄 것으로 보아, 혜성 중 한 명은 상당한 데미지를 받은 것 같았다.
- 끄아아아!
하늘에서 괴수의 포효가 들렸다.
BJ는 안색이 창백해져 고개를 들었다. 게이트가 서서히 벌어지고, 그 안에서 괴상한 그림자가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낌새를 보니 게이트가 완전히 열리기까지 남은 시간은 20분 남짓. 놈의 살기에 공명하듯 게이트 주위의 대기가 뿌연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이것이 제 마지막 영상이 될 수도……”
그가 자못 비장하게 멘트를 날리던 참이었다.
콰쾅, 귀청이 찢어지는 것 같은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뭐야?”
그는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리고 왼쪽을 돌아봤다.
삼겹살집 옆 주점에서 화마가 일렁이고 있었다. 신촌 일대에는 식당과 술집이 밀집돼 있었다. 사람들이 도망치는 와중에 가스 누출 등에 의한 사고가 발생한 것 같았다.
“사람 살려! 살려 주세요!”
불길 너머에서 취객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망가지 않고 숨어 있다가 변을 당한 것 같았다.
“아, 내부에 누군가가……”
BJ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다시 2차 폭발이 일었다. 폭발의 연쇄 반응으로 삼겹살집과 옆 가게의 천장이 반쯤 내려앉았다.
삼겹살집 안의 혜성들은 잠깐 멈칫했다. 콰콰쾅, 폭발의 강도나 크기가 갈수록 커졌다.
그때였다. 혜성 하나가 주저 없이 화염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악! 안 돼!”
BJ는 왼손으로 입을 막고 비명을 길게 질렀다.
빌딩처럼 큰 화마가 시뻘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후끈한 열기가 멀리까지 전해질 정도. 아무리 혜성이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BJ는 입만 뻥긋거릴 뿐, 멘트를 잇지 못했다. 그런데 잠시 후, 불길 속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렸다.
“찾았다!”
NSA 김성후 요원, 일명 막내의 희열에 찬 외침이었다.
***
“아무리 복제들이라도 화염 속으로 달려드는 건 주저할 수밖에 없지. 죽음에 대한 공포. 그건 본능이거든.”
일렁이는 화염 속, 막내가 검지를 좌우로 까딱이며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차!”
가짜 혜성들은 뒤늦게 가게 구석을 살폈다.
혜성에게만 너무 정신이 팔린 상태. 언제부턴가 막내는 물론 태호와 김연우 등도 보이지 않았다. 얼빵하게 생긴 BJ만 핸드폰을 든 채 멀뚱거리고 서 있었다.
“장난은 여기까지.”
딱, 막내는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중지를 튕겼다.
영상을 거꾸로 재생한 것 같았다. 이글거리던 화염은 막내의 손으로 스르르 빨려 들어가 소멸했다.
이어서 혜성도 옷을 툭툭 털며 나타났다. 암흑의 수호자는 아직 정장 형태. 2차 각성 전이었다.
“설마 나로 변신해서 나타날 줄이야. 기가 막히는군.”
혜성은 막내와 나란히 서서 가짜들을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자신과 똑같았다. 김유진과 한수호가 오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솔직히 자신도 누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짜들은 자기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그러나 당황은 잠시.
“제법이군. 그런데 이제 어쩔 셈이지?”
가짜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혜성은 눈가를 찌푸렸다. 이제 확실해졌다. 복제는 셋이었지만, 그것을 조종하는 적은 한 명이었다.
가짜들은 좌우로 갈라져 혜성과 막내를 포위했다.
“젠장. 다른 요원들은 왜 안 오는 거야?”
막내는 욕설을 내뱉으며 하늘을 힐끔 바라봤다. 게이트의 선명도가 더 짙어졌다.
“아마 안 올 거야. 아니면 상황이 다 끝난 다음에 오거나. 내가 놈이었다면 사전에 NSA의 통신망을 마비시키고, 신촌까지 오는 주요 길목을 차단했을 테니까.”
혜성은 재차 가짜들을 돌아보며 쓰게 웃었다.
“맞아. 역시 똑똑하군. 사령이 당할 만해.”
“사령? 역시 네가 사령의 뒤에 있었나?”
“글쎄. 그건 네 상상에 맡기지.”
가짜들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이죽거렸다.
혜성은 막내와 눈빛을 교환한 뒤 다시 전투 자세를 취했다. AA급 게이트는 열리기 직전. 숫자는 여전히 2:3이었고, 혜성은 조금만 더 데미지가 쌓이면 2차 각성으로 진입할 터였다. 놈들의 말대로 여전히 그들이 불리했다.
“나도 끼지.”
태호가 혜성에게 합류하려다가 다리가 풀려 비틀거렸다. 김연우가 급히 부축한 덕분에 넘어지는 것만 겨우 면했다.
“쯧쯧. 이젠 널 도와줄 사람도 없는 것 같군.”
가짜들은 짐짓 안타까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제길.”
혜성은 주먹을 움켜쥐고 이를 갈았다.
예전에 해골 병사를 상대할 때 같았으면 진즉에 2차 각성을 하고도 남았을 터. 그동안 격전을 치르며 강해진 덕분에 겨우 버티고 있었지만, 이것도 곧 한계였다. 가짜들 손에 죽거나 약하게 2차 각성을 해서 몬스터의 손에 죽거나.
‘이번엔 진짜 순직인가?’
그는 피식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두렵지는 않았다. 다만 블랙과 같이 죽지 못하는 게 원통했다.
“자, 빨리 끝……”
그런데 가짜들이 움직이려는 순간.
“도와줄 사람이 없다니?”
“그럼 우린 다 허수아빈가?”
뒤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혜성과 막내, 가짜 혜성들은 동시에 가게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건장한 시민들 수십 명이 기세등등하게 가게를 포위하고 있었다. 숫자는 최소 50.
어디서 구했는지 쇠파이프나 몽둥이를 하나씩 들었고, 어떤 이들은 두꺼운 옷을 갑옷처럼 껴입었다. 게다가 지인들에게 연락하고 있는지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이게 뭐야?”
혜성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다들 낯선 얼굴이었다.
시민들을 헤치고 뒤에서 누군가가 등장했다. 김유진과 다른 시민의 부축을 받은 한수호였다.
“어? 네가 어떻게?”
“선배님이 말씀하셨잖습니까? 우린 팀이라고. 한 번 팀은 영원한 팀. 아까 일은 진짜가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한수호는 가슴을 펴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누가 말했죠? 눈에 보이는 게 진실이란 법은 없다고. 오해해서 미안해요.”
김유진도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덧붙였다.
혜성은 대번 전후 사정이 그려졌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혜성 선배님의 행동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동안 혜성 씨가 사람들을 지켜줬듯이 이번엔 우리가 혜성 씨를 믿고 지켜줘야 합니다.”
한수호와 김유진은 아마 이렇게 시민들을 설득했을 것이다.
“적이 큰 착각을 한 것 같은데요? 국민 영웅 이혜성이 그깟 장난질에 무너질 리 없죠.”
막내는 웃으며 혜성의 어깨를 툭 쳤다.
“선배님은 잠깐 쉬십시오. 형의 상대는 저런 허깨비들이 아니라 곧 나타날 몬스터입니다.”
막내는 제법 늠름하게 말하며 좌우의 시민들을 돌아봤다.
건장한 체구의 사내들이 하나둘씩 앞으로 나왔다.
“개새끼들. 다구리에는 장사 없다는 명언 알지?”
“이혜성을 패는 것 같아서 조금 떨떠름하지만, 일단 좀 맞고 시작하자.”
시민들은 몸을 풀며 천천히 포위망을 좁혔다. 당연히 일반인은 능력자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일반인의 숫자가 능력자보다 수십 배 많다면 얘기는 달라졌다.
“이 새끼들이, 죽고 싶어?”
가짜 혜성이 눈을 치켜떴지만, 분위기는 이미 막내와 시민 연합에 넘어간 뒤였다. 오히려 시민들은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우리는 팀이라고?”
혜성은 쓰게 웃으며 슬그머니 물러났다.
평범한 시민들이 위기에 빠진 영웅을 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다. 분명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이번에도 순직은 실패인 것 같았다.
***
“빙고, 잡았다!”
강지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눈을 떴다.
“뭐야? 이 새끼들, 갑자기 어디로 간 거야?”
“순간이동이라도 한 거야?”
삼겹살집 근처는 혼란스러웠다. 막내와 시민들이 달려들려는 찰나, 가짜 혜성들이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그야말로 연기처럼. 안개 속에서 가짜 혜성이 한수호를 공격하고 슬그머니 사라진 것과 같은 수법이었다.
하지만 강지영이 웃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복제 셋을 한꺼번에 회수하려면 소모되는 에너지도 3배. 누구보다 민감한 그녀가 그 신호를 놓칠 리 없었다.
“가자! 몬스터는 이혜성에게 맡기고, 우린 미스터리하고 놀자고.”
강지영은 웅의 손을 잡아끌고 자리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