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9. 넌 누구냐? (1)
파팟, 거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거추장스러운 변장은 내던진 지 오래. 혜성은 숨이 턱에 찰 정도로 내달렸다.
두 번째 게이트가 열린 장소는 H 백화점 근처였다. 게이트가 가까워질수록 안개가 짙어졌다.
“젠장! 역시 블랙이었나?”
숨을 헐떡이는 와중에도 절로 욕이 나왔다.
오픈이 빠른 변종 게이트를 이용한 테러. 차이점은 짙은 안개가 추가된 것뿐이었다.
‘이렇게 짙은 안개 속이라면 정상적인 사람도 시야와 판단력이 흐려질 수밖에 없지.’
혜성은 인상을 찌푸리며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김유진은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자신을 대했다. 게다가 몬스터들의 시체는 많았지만, 정작 몬스터를 죽인 능력자는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개새끼. 이번엔 나로 변신한 건가?”
가짜 윤진성이 NSA의 보안을 뚫은 것에서 알 수 있듯 놈은 단순히 비슷한 얼굴로 변신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지문과 홍채마저 위조하는 최고 능력자. 자신으로 변장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사이 두 번째 게이트에 도착했다.
퍼퍼펑, 짙은 안개 속에서 전투의 소음이 크게 울렸다.
첨벙, 물이 바닥에 흥건했다.
“수혼가? 막내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지?”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안개의 중앙으로 들어갔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주위를 경계하며 몇 분쯤 걸었을 무렵.
“끄으윽.”
왼쪽에서 귀에 익은 신음이 들렸다.
“수호?”
혜성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너진 벽 아래, 한수호가 피투성이가 돼 기대앉아 있었다.
***
SJ 기획, 소회의실.
“미스터리가 특수 광역진을 펼친 것 같습니다. 일부 지역의 게이트 경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한수은은 갖고 온 태블릿을 벽면의 모니터에 연결했다.
신촌역 일대의 지도. 그중에서 삼겹살집을 중심으로 검은 음영이 표시돼 있었다.
“경보 시스템의 마비라. 그럼 막내나 다른 이들은 게이트가 생성된 것도 아직 모르겠군.”
박무영은 음영 지역을 주목했다. 막내 등의 핸드폰 신호가 그 가운데에 있었다.
“그렇습니다. 근처에 대기 중이던 요원이 발로 뛰며 알리고 있습니다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방금 영상 팀의 위성자료 분석이 끝났습니다.”
“수고했네.”
박무영은 깍지를 껴서 턱을 받치며 모니터를 응시했다.
“으아악! 살려줘!”
비명과 절규가 스피커를 찢을 듯 울렸다. 이어서 다소 흐릿한 영상이 나왔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시민들이 상당수인 것 같았다. 몬스터를 피해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느라 아비규환이었다.
“문제는 여기부터입니다.”
한수은은 몬스터가 등장하는 영상 초반부를 건너뛰었다.
잠시 후, 안개를 뚫고 이혜성이 등장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도 그의 얼굴은 알아볼 수 있었다. 변장은 벗어던진 상태. 그는 괴성을 지르며 몬스터에게 돌진했다.
“이혜성! 이혜성이다!”
“신이시여! 이제 우린 살았다!”
시민들은 환호를 지르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혜성은 시민들의 요청을 무시했다. 오히려 시민들이 본의 아니게 미끼가 된 사이, 몬스터들의 뒤를 공격했다.
한수은은 혜성을 클로즈업했다.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 몬스터를 찢어 죽이는 난폭함. 누가 사람이고 누가 몬스터인지 구별이 안 됐다.
“흠.”
박무영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나왔다.
한수은은 시민들 쪽으로 영상의 각도를 바꿨다. 희망은 순식간에 절망으로 변했다. 다들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며 도망갔지만, 쓰러지고 밟히는 통에 피해만 더 커졌다.
영상은 여기까지. 잠시 후, 가짜 혜성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진짜 혜성이 허겁지겁 나타났다.
“미스터리 녀석. 사령보다 훨씬 똑똑하군. 혜성으로 변신해 동료들을 기습하고, 대중적인 이미지 실추까지 노린다. 이혜성의 공략 포인트를 제대로 짚었어.”
박무영은 쓰게 웃으며 한수은을 돌아봤다.
“하나 묻지. 솔직히 이혜성보다 화려하고 강한 능력자는 많아.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유수혁 등의 랭커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왜 유독 이혜성만 신드롬처럼 인기를 끌었다고 생각하나?”
“기존의 능력자와 다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맞아.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르지?”
한수은은 말문이 막혔다.
“기존의 능력자들은 대부분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웠지. 그들이 몬스터를 공략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게 돈이 되기 때문이었거든.”
박무영은 혜성이 등장하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뉴스의 반은 능력자들의 마약, 탈세, 그 외 각종 위법 행위에 관한 소식들이었다. 던전에 들어간 능력자들이 아이템 때문에 동료의 뒤통수를 치는 건 공공연한 비밀.
정부는 몬스터들 때문에 어느 정도 그들을 눈감아주고 있었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이혜성은 달랐지. 그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몇 번이나 몸을 던졌으니까. 우직할 정도의 정의감. 때론 답답하게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게 바로 이혜성만의 매력이야.”
그는 모니터 속의 혼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조금 전 이혜성이 보여준 행동은 어땠지? 시민들의 안전은 무시. 몬스터를 잡는 데에만 열중했지. 기존의 다른 능력자들처럼 말이야. 그럼 그걸 본 시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박무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멈췄다.
혜성은 너무 단기간에 성장했다. 그러나 기대가 큰 만큼 실망 또한 큰 법. 혜성에 대한 열광이 실망으로 변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카메라 앞에서만 착한 척하는 가식덩어리.”
“시민의 안전보다 몬스터 사냥이 더 중요한 미치광이.”
시민들이 혜성에게 뱉은 욕설이 아직도 둘의 귓가를 맴돌았다.
“강지영은 아직인가?”
“신촌이 너무 넓습니다. 현재 혜성을 미행하며 탐지 스킬을 총동원하고 있습니다만,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알겠다. 서둘러라.”
둘 다 표정이 어두웠다.
박무영은 한숨을 내쉬며 신음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다음 타깃은 막내와 한수호겠지. 서둘러라, 이혜성.”
***
“수호야!”
혜성은 슬라이딩하듯 몸을 날려 한수호를 안았다.
땀에 젖은 얼굴과 머리카락. 피투성이가 된 상체. 거칠고 가는 호흡. 녀석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정신 차려! 왜 너만 여기에 있는 거야? 막내나 다른 사람들은?”
혜성은 녀석의 상처를 살피며 질문을 쏟아냈다.
상처들이 가늘고 길었다. 몬스터 때문에 생긴 상처가 아닌, 인간의 단검 등에 당한 흔적이었다.
“쿨럭!”
녀석은 피가 섞인 마른기침을 하며 혜성을 바라봤다. 시야가 가물거리는 듯 눈을 깜빡거리며.
“왜 저를……?”
녀석이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내 물었다. 고통은 둘째 문제. 녀석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뭐?”
혜성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개새끼! 시치미 떼는 거냐?”
뒤에서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숨어 있던 시민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었다.
말을 한 사내는 잠깐 움찔했다. 혜성의 눈빛에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둘러본 뒤.
“내가 봤다고! 안개 속에서 저 애를 기습하는 거 말이야!”
그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맞아. 나도 봤어. 어떻게 제자처럼 자기를 따르는 애를 공격할 수 있지?”
“안개가 끼었다고 안 보일 줄 알았나?”
시민들은 혜성을 손가락질하며 동조했다. 몇몇은 콘크리트 파편을 무기 삼아 들고 흉흉하게 혜성을 노려봤다.
“제가 왜 수호를 공격합니까?”
혜성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항변했다.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럼 뭐야? 이혜성이 둘이라도 된단 말이야?”
퉤, 이번엔 다른 시민이 가래침을 뱉으며 비웃었다.
“그렇……”
혜성은 그렇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다들 표정이 싸늘했다. 무슨 말을 해도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하긴, 사람은 누구나 눈으로 직접 본 것을 제일 신뢰하는 터. 이상하다는 생각은 잠깐 하겠지만, 결국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혜성의 시선이 문득 우측으로 향했다. 뒤늦게 도착한 김유진이 핸드폰을 들고 서 있었다. 동영상 촬영을 하는 것 같았다.
“씨발.”
혜성은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너무 기가 막힌 탓일까? 화도 나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된 한수호. 그의 손에 묻은 피. 주위 사람들의 고함. 이건 빼도 박도 못 하고 뒤집어쓰게 생겼다.
삐-익, 사람들의 핸드폰이 동시에 높고 길게 울렸다. 세 번째 긴급재난 문자였다. 이번에도 변종 게이트 생성. 위치는…….
“젠장!”
혜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음 타깃은 삼겹살집이었다.
“어차피 지금은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겠죠. 수호를 부탁합니다.”
그는 김유진에게 다급하게 말하고 삼겹살집으로 달려갔다.
“가서 뭘 하려는……”
뒤에서 김유진이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지금은 차분히 전후 사정을 설명할 때가 아니었다.
‘이제 놈의 의도를 확실히 알겠군. 놈은 몸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능력자. 나를 공격하기에 앞서 내 주변인들을 먼저 정리하려는 거다.’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술집의 해프닝도 놈이 계획한 건가?’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제발 내가 갈 때까지 무사해라.”
혜성은 그야말로 나는 듯이 내달렸다.
***
삼겹살집.
혜성이 등장하자 대번 분위기가 밝아졌다. 김연우와 다른 이들도 말이 많아졌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다 같이 따뜻한 곳에서……”
김연우는 혜성을 힐끔거리며 크리스마스 계획에 관해 이야기했다.
“크리스마스까진 아직 몇 달이나 남았는데요. 너무 빠른 거 아닙니까?”
혜성이 술 대신 탄산음료를 입가로 가져가며 물었다.
“빠르다뇨. 분위기 좋은 펜션이라도 잡으려면 지금 예약해야 한다고요.”
이번엔 막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누나를 거들었다.
그는 혜성의 옆을 힐끔 쳐다봤다. 태호만 아까부터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문득 밖에서 시끄러운 고함이 들렸다. 그들이 있는 곳은 식당에서도 제일 안쪽 밀실. 창문도 없어 바깥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아까부터 뭐가 이렇게 시끄럽지? 온다는 사람들도 연락이 없고.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막내는 고개를 갸웃하며 문가로 시선을 돌렸다.
“신경 꺼. 어디에서 싸움이라도 났나 보지. 이 시간에 조용하면 그게 신촌인가?”
혜성은 음료수를 내려놓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뭔가 이상해요.”
막내는 고개를 갸웃하며 핸드폰을 꺼냈다. 신호 강도는 정상. 김유진과 한수호의 메시지는 없었다.
그때였다.
“야, 비상! 비상이야! 빨리 도망쳐!”
“아이고,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외부의 소란이 더 또렷해졌다. 거친 소음 가운데 ‘게이트’라는 단어가 들렸다.
“게이트?”
“긴급재난 문자도 없었는데?”
막내와 태호는 동시에 반사적으로 일어섰다. 김연우도 당황하며 허겁지겁 일어났고, 혜성만 한쪽에 벗어둔 재킷을 챙기느라 조금 지체했다.
“빨리 가서……”
막내가 문을 열려는 찰나였다.
“꺄악!”
김연우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비명을 길게 질렀다.
막내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단검을 든 혜성이 보였다.
“형이 왜?”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피 묻은 두 손이 단검을 잡고 있었다. 손에서 나온 피는 단검의 날을 타고 떨어져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막내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의 주인은 태호. 태호는 단검을 꽉 움켜쥔 채 혜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태호는 오른발로 혜성을 걷어찼다. 혜성은 단검을 놓고 잽싸게 뒤로 물러섰다.
“쳇, 어떻게 알았지?”
혜성이 가래침을 뱉고 히죽 웃으며 물었다.
태호는 왼쪽을 힐끔 돌아봤다. 김연우가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다리를 후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김연우를 자신의 뒤로 잡아끌었다.
“이혜성이 남을 의식하지 않는 건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몇 달이나 남은 크리스마스 계획에 들뜬다고?”
태호는 가짜 혜성을 노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혜성에게 남은 시간은 5개월 남짓. 녀석에게 이번 크리스마스는 없었다.
“얼굴이나 목소리는 틀림없는 이혜성인데…… 누구냐, 넌?”
태호는 가짜 혜성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물었다. 안경 너머로 그의 눈이 날카롭게 번쩍였다.
“누구긴? 나 몰라? 나 이혜성이야, 이혜성.”
가짜 혜성은 어깨를 으쓱하며 ‘이혜성’이란 이름을 강조했다.
“역시 말로 해서는 안 될 것 같군.”
태호는 짧은 한숨을 내쉰 뒤 안경을 벗어 던졌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네가?”
혜성은 피식 비웃었다. 막내와 김연우도 조금 놀란 표정으로 태호를 쳐다봤다.
“괜찮아.”
태호는 손을 슬쩍 들어 괜찮다는 시늉을 했다.
“다들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나 이혜성하고 아카데미 동기야. 졸업 성적은 내가 훨씬 좋았을걸?”
그는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앞으로 한 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