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7. 미스터리 (2)
금요일 저녁.
지하철 2호선은 오늘도 만원이었다. 신촌역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좀비 떼처럼 우르르 쏟아졌다.
막내와 김연우도 그 좀비 중 하나였다. 김연우는 오늘을 위해 아침부터 한껏 멋을 낸 모습. 반면 막내는 모자를 눌러써서 얼굴을 가렸다.
겨우 지하철역 입구를 나왔을 무렵이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신촌……”
BJ 한 명이 핸드폰을 들고 실시간 방송을 하고 있었다.
“하여튼 요즘은 어딜 가도 BJ들이 있다니까.”
막내는 혹시라도 핸드폰에 잡힐까, 잽싸게 고개를 숙이고 지나쳤다.
“야, 네가 무슨 연예인이야? 어차피 BJ도 너한테 관심 없을걸. 신경끄셔.”
김연우가 막내의 귀를 잡아당기며 핀잔을 줬다.
“이거 왜 이래? 나도 이제 스타잖아. 이혜성의 오른팔. 드라마로 치면 비중 있는 조연, 이인자 정도는 된다고.”
막내는 괜히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빈말은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소개팅 제안이 쏟아졌고, 팬레터와 선물도 기관으로 심심치 않게 도착했다.
“지랄한다. 방자처럼 생긴 놈이 뭐가 좋다고.”
김연우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티격태격. 현실 남매답게 대화의 반이 욕이었다.
“방자라니. 지금 남 말할 때야?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내가 뭘?”
“뭐긴. 쓸데없이 눈만 높잖아. 마침 오늘 형 친구도 온다니까 한번 잘 해봐.”
“누구? 태호라는 사람?”
김연우는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혜성이 전국구 스타가 된 후, 그의 지인들도 덩달아 종종 TV에 출연했다. 혜성이 사는 동네의 슈퍼마켓 아줌마도 인터뷰할 정도. 그중에서 태호는 혜성이 믿고 의지하는 힐러로 유명했다.
“그래. 유명한 힐러인데 모쏠이래. 옛날에는 아카데미에서도 촉망받는 인재였다던데?”
“야, 내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이 그런 샌님인 거 몰라?”
“왜? 몇 번 만나보니까 성격도 좋던데. 그만하면 인상도 괜찮고. 혜성이 형 전담으로 유명해져서 돈도 많이 번대.”
“닥쳐. 내 사랑은 오직 하나. 일편단심 혜성 씨니까. 어디서 그런 씹다 만 오징어 같은 놈이랑 엮으려고……”
김연우가 한창 열을 올리던 중이었다.
누군가가 막내를 툭 치고 앞으로 지나갔다. 야구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자였다.
“아, 죄송합니다.”
막내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꾸벅 묵례하고 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붐비는 신촌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아무튼 헛소리 그만하라니까.”
막내는 사내에게 신경을 끄고 누나에게 말을 이었다.
곧 삼겹살집에 도착했다. 룸으로 나누어진 퓨전 스타일이었다. 넓은 실내는 이미 만원이었다.
“예약했는데요. 김연우요.”
김연우는 손목시계를 힐끔 내려다보며 말했다. 6시 50분. 약속 시각까지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종업원이 둘을 제일 깊숙한 방으로 안내했다. 누가 먼저 왔는지 밖에 신발이 한 켤레 있었다.
“어, 벌써 누가 왔나 보네.”
막내는 신발을 벗으며 문을 열려고 했다.
“잠깐.”
“왜 또?”
“우리 혜성 씨가 왔을지도 모르잖아.”
김연우는 핸드백에서 거울을 꺼냈다.
“메이크업, 액세서리, 빨간 원피스. 오케이.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서 셀카 좀 더 찍는 건데.”
그녀는 흐뭇하게 웃으며 거울을 핸드백에 넣었다. 첫 만남이 삼겹살집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혜성에게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누가 우리 혜성 씨야?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군.”
막내는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 어?”
김연우가 먼저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려다가 굳어졌다.
“어라? 당신은……?”
막내도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눈만 깜빡거렸다.
“안녕하세요. 씹다 만 오징어입니다.”
은테 안경을 쓴 샌님, 태호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의 오른손에는 야구 모자와 마스크가 들려 있었다.
***
신촌역 근처 H 백화점.
“어머, 멋져요.”
여자 점원이 손뼉을 치며 조금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요?”
한수호는 배시시 웃으며 옷매무시를 바로 했다. 공중파 출연으로 얼굴이 많이 팔린 상태. 녀석은 두꺼운 뿔테와 약간의 변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네. 한번 보세요.”
점원은 그를 전신거울 앞으로 잡아끌었다.
한수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폼을 잡았다. 검은 정장, 흰 셔츠, 검은 넥타이. 꿈에 그리던 혜성의 시그니처와 같은 디자인의 정장이었다.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녀석은 거울을 보는 내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비록 암흑의 수호자처럼 특별한 기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녀석은 혜성과 같은 복장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잔뜩 흥분했다.
“요즘은 중학생 사이에서도 정장이 유행인가 봐요? 이혜성 때문인가?”
“중학생? 이혜성 같은 요원이 아니고?”
한수호는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말을 한 점원도 내심 아차 싶었다.
“괜찮네. 잘 어울린다.”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팔짱을 낀 채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혜성이었다. 그도 다른 사람이 알아볼까 변장한 상태였다.
“그래요?”
한수호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얼맙니까?”
혜성은 카운터에 가서 신용카드를 점원에게 내밀었다.
“네? 정말 사주시는 겁니까?”
한수호는 재킷에 붙은 가격표를 슬쩍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재킷 하나가 백만 원대. 싸구려 트레이닝복에 익숙한 그로서는 입이 쉽게 다물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 드릴까요?”
점원이 빼앗듯 잽싸게 카드를 받아들며 물었다.
“일시불이요.”
혜성은 펜을 들어 영수증에 이름을 휘갈겨 썼다. 한수호가 입고 온 트레이닝복을 쇼핑백에 담아달라고 덧붙이며.
“이렇게 비싼 걸 받아도 될지.”
한수호는 가격표와 혜성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괜찮아. 후배한테 옷 한 벌 사줄 능력은 되니까. 정 미안하면, 나중에 첫 월급 타서 맥주나 한잔 사든지.”
혜성은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가게를 나왔다.
“감사합니다, 대협!”
한수호는 쇼핑백을 안고 큰 소리로 인사했다.
“대협?”
“어디서 무협 영화라도 찍나?”
주위의 이목들이 일제히 둘에게 집중됐다.
‘아차!’
한수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무의식중에 또 대협이란 호칭이 나왔다.
“대협은 무슨.”
다행히 혜성은 피식 웃어 넘겼다.
삐빅, 손목시계의 알람이 울렸다. 혜성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일곱 시 정각. 약속 장소까지 사람들을 뚫고 가려면 30분은 걸릴 것 같았다.
“늦었다. 빨리 가자.”
혜성은 삼겹살집이 있는 방향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상하네. 대협이란 호칭을 싫어하시는 거 아니었나?’
한수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뒤따랐다.
***
신촌역 3번 출구 근처 커피숍.
김유진은 구석진 자리에 앉아 누군가와 인터뷰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녹음 앱을 켠 태블릿이 놓여 있었다.
“……이렇게 해서 사령을 물리치게 됐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번 던전 공략은 저 혼자만의 공이 아닙니다. 김성후와 한수호. 두 요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맞은편에 앉은 사내는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변장으로 얼굴을 가린 혜성이었다.
혜성은 가급적이면 김유진하고만 인터뷰했다. 쓰레기 기사와 기자가 넘쳐나는 시대. 이상한 보도 때문에 곤란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삐빅, 손목시계의 알람이 울렸다. 혜성과 김유진은 동시에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일곱 시 정각이었다.
“어머, 죄송해요. 인터뷰하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그녀는 부랴부랴 녹음기를 끄고 자리를 정리했다. 녹음된 인터뷰를 정리하고 기사화하는 건 내일 해도 충분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삼겹살집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요. 알아서 먼저 먹고 있겠죠.”
혜성도 빈 컵을 쟁반에 올려놓고 일어났다.
‘그런데 혜성 씨가 저렇게 달변가였나? 인터뷰의 프로처럼 말이야.’
김유진은 가방을 들고 나서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얼굴과 목소리는 틀림없는 이혜성.
‘하긴. 인터뷰를 많이 했을 테니까.’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
신촌역 삼겹살집.
기본 밑반찬과 고기가 세팅돼 있었지만, 아무도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어색한 공기만이 방 안에 맴돌았다.
“언제 오셨어요?”
“조금 전에요.”
“형은 언제 오나요?”
“몰라요. 곧 오겠죠.”
“왜 늦는대요?”
“약속이 있대요.”
단답형 대답이 이어졌다. 자기소개는 하는 둥 마는 둥. 막내가 억지로 웃으며 이것저것 물었지만, 태호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아까 일은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우리 누나가 좀 주책이긴 해도 악의는 없거든요.”
막내는 김연우의 옆구리를 찔렀다. 김연우도 우물거리며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전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태호는 짐짓 모르는 척 되물었다. 말과 달리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 아니었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
“하아. 혜성이 형은 언제 오려나?”
막내는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김연우는 목까지 빨개져서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혜성이었다. 뿔테와 수염, 가발 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의 상징인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형!”
“왔냐?”
“어머, 오셨어요?”
셋은 동시에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세주라도 만난 표정이었다.
“어라? 이거 분위기가 왜 이래?”
혜성은 문가에 서서 잠깐 당황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태호와 김연우, 둘 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자기 옆에 앉으라고 텔레파시라도 보내는 것처럼.
혜성은 김연우의 시선을 모른 척하고 태호의 옆에 앉았다. 김연우의 대각선이었다. 태호와 김연우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했다.
“이쪽은 김연우. 방을 형 사진으로 도배한 푼수 누나예요. 자칭 이혜성 팬클럽 회장이라던데. 그리고 여긴 알죠? 슈퍼 히어로 이혜성.”
막내가 과장되게 웃으며 둘을 소개했다.
“팬클럽은 무슨. 아무튼 우리 막내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혜성 씨가 많이 도와주신다고요.”
김연우는 막내를 슬쩍 흘긴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드럽고 교양 있는 숙녀. 오늘의 컨셉이었다.
“도와주긴요. 제가 늘 도움을 받고 있죠.”
“아니에요. 우리 막내가 아직 미숙한 게 많아요.”
김연우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서 빈 컵에 물을 따르고 혜성의 자리를 세팅했다.
“감사합니다.”
혜성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우리 사이에 감사는 무슨.”
김연우는 고개를 숙이며 수줍게 대답했다.
“컥!”
옆에 있던 막내가 마시던 물을 뿜으며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막내의 신호는 무시. 그녀는 입이 귀에 걸려 혜성만 힐끔거렸다.
“하아, 수호나 유진 누나는요?”
막내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화제를 돌렸다.
“나도 몰라. 애들도 아니고.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겠지.”
“강지영 씨는?”
이번에는 태호가 물었다.
“무슨 화보 촬영이 있다던데? 연락했으니까 알아서 오겠지.”
“너랑 같이 오는 거 아니었어?”
태호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스쳤다.
삐빅, 그때 혜성의 손목시계가 짧게 울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알람을 껐다. 7시 정각을 알리는 알람이었다.
“우리끼리 먼저 시작하자.”
혜성은 집게로 고기를 집어 불판에 올려놓았다. 김연우가 잽싸게 다른 집게를 들고 거들었다.
‘좀 이상한데? 형이 다른 사람한테 저렇게 무심했나? 수호나 유진 누나는 그렇다고 쳐도…… 강지영한테까지?’
막내는 순간적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의심은 잠깐. 상대의 얼굴과 목소리는 분명 이혜성이었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막내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책바가지 누나에게 관심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