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45화 (45/150)

# 045. 능력자의 진화형 (6)

“나왔다!”

터질 듯한 함성. 사방에서 플래시가 경쟁적으로 번쩍였다.

혜성을 선두로 막내와 한수호가 웜홀에서 차례대로 나왔다. 다들 최후의 힘까지 전부 쏟아부은 상태. 걷는 것인지 기는 것인지 모호했다.

‘드디어 끝인가?’

혜성은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제일 먼저 보인 건 경찰의 통제선 밖을 가득 메운 시민들과 취재진이었다.

이어서 장진우를 비롯해 낯익은 요원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태호 녀석도 각종 치료 아이템을 양손에 들고 힐러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막내와 한수호는 한쪽에 마련된 구급차에 실려 갔다. 혜성도 다른 구급차에 반쯤 누워서 태호의 치료를 받았다.

“이 새끼야. 넌 왜 근신 중에도 걸레가 되는 거냐?”

태호의 악의 없는 욕설이 들렸다.

“또 잔소리냐?”

혜성은 녀석을 돌아보며 힘없이 웃었다. 조금 우습지만 녀석의 욕을 들은 다음에야 무사히 돌아온 게 실감됐다.

잠시 후, 장진우와 NSA 요원들이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왔다.

“그 치료제. 역시 팀장님이셨군요. 감사합니다.”

혜성은 억지로 상체를 일으키며 인사했다.

“내가 한 게 있나? 자네들이 다 한 거지. 아무튼 능력자와 몬스터의 융합체라니. 강적을 쓰러뜨렸군.”

장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저어 그를 도로 눕혔다.

“그런데 안의 상황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게다가 언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온 겁니까?”

혜성은 주위를 둘러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가진 하늘의 눈이 있잖나. 그걸 통해 알았네. 다만 문제는……”

“문제요?”

“자네의 통신을 변환하는 과정에서 미처 암호화를 하지 못했네. 그래서 자네들의 대화가 일부 BJ들의 통신망까지 들어갔고, 그게 사람들한테도 퍼졌네.”

장진우는 좌측의 BJ들을 힐끔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요즘엔 BJ도 카메라만 갖고 다니지 않았다. 능력자들이 쓰는 전문 장비나 아이템을 갖고 다니는 자들도 많았다.

“하아. 그럼 또 언론에서 난리를 치겠군요.”

혜성은 한숨을 내쉬며 막내와 한수호를 돌아봤다.

막내는 이제 언론의 노출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카메라를 향해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아마 가족이나 친구쯤 될 터.

문제는 한수호였다.

‘수호 녀석. 아직 애는 애군.’

한수호는 어색한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검은 늑대 때와는 언론의 주목도와 스케일이 다른 상황. 공중파 전국 생중계였기 때문에 긴장한 것 같았다.

“잠깐만.”

혜성은 손을 들어 태호를 뒤로 물렸다.

마침 막내와 한수호도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둘을 손짓해서 부른 뒤, 태호의 부축을 받아 통제선 앞으로 걸어갔다. 기자들과 카메라가 집중된 곳이었다.

- 던전은 처음인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 느낌이 어떠십니까?

- 앞으로도 계속 던전을 공략하실 건가요?

- 이번 승리의 원인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상대로 마이크 수십 개가 그를 향해 몰려들었다. 그는 일단 손을 저어 주위를 진정시켰다.

“오늘의 승리는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 아니라 팀. 이 둘이 사력을 다해 적과 맞서지 않았다면, 제 2차 각성도 없었을 겁니다.”

혜성은 막내와 한수호를 차례대로 소개했다. 둘의 어깨에 손을 걸친 채.

막내는 이미 유명인사였다. 능숙하게 소감을 말했다. 문제는 한수호였다.

“저……”

한수호는 카메라와 혜성을 번갈아 쳐다보며 머뭇거렸다. 공중파 생방송 인터뷰는 처음. 머릿속이 하얘진 것 같았다.

“괜찮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봐.”

혜성은 녀석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자신의 첫 인터뷰가 떠올랐다.

“전부터 사람들 앞에서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게 있습니다.”

“뭔데? 오늘의 영웅은 너다. 하고 싶은 거 다 해 봐.”

한수호는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푹 숙였다.

“뭐지?”

주위의 사람들도 잠시 말을 멈추고 한수호를 주목했다.

- 한수호. 한수호. 한수호.

몇몇은 손뼉을 치며 녀석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럼 해보겠습니다.”

한수호는 비틀거리며 혼자 살짝 옆으로 떨어졌다. 웃음을 거둔 진지한 표정.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혜성은 한수호의 우상이었다.

‘이 새끼 설마? 그걸 또 하려는 건 아니겠지?’

혜성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예상대로였다. 한수호는 혜성을 향해 거수경례하며 씩씩하게 외쳤다.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해……!”

역시. 녀석이 혜성을 처음 만났을 때 한 인사였다. 다만 지금은 수많은 카메라와 시민 앞.

아, 주위 사람들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해……!”

주위 사람 모두가 한수호를 따라 혜성을 향해 경례했다. 심지어 옆에 있던 막내마저도 놀리듯 웃으며 경례했다.

‘이 새끼가. 할 거면 혼자 할 것이지. 왜 나까지 끌어들여? 제발 좀 하지 마!’

혜성은 목까지 빨개졌다. ‘내가 처음에 왜 이 말을 했을까?’라고 뒤늦게 후회하며.

모든 사람이 경례하며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도 한수호를 향해 구호를 외치며 경례했다.

영광과 쪽팔림이 교차하는 순간. 혜성은 문득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

강남 R 호텔 VIP룸.

“캬아. 정말 눈물 나는 광경이군. 브라보!”

그는 손뼉을 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해.

벽에 걸린 대형 TV에서는 혜성이 시민들을 향해 거수경례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우측 상단에 LIVE라는 표시와 함께.

그는 혜성의 배경을 주목했다.

특수 지게차가 천으로 덮인 거대한 물체를 운반하고 있었다. 사령의 사체. 인간과 몬스터의 융합체였으니, 기관에서도 조사할 게 많았다.

“자신 있다고 설쳐대더니 꼴좋군. 뭐, 원하는 대로 선수를 양보했으니 여한은 없겠지.”

그는 입꼬리를 한쪽으로 말아 올리며 사령을 비웃었다.

테이블 위에는 CD처럼 생긴 아이템이 있었다. 손바닥을 갖다 대고 에너지를 주입하자 혜성과 사령의 전투 장면이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이혜성이 진짜 무서운 점은 2차 각성이나 카피가 아니야. 순간적인 판단력과 임기응변. 그러니 이혜성을 쓰러뜨리고 싶으면 머리를 써야 한다고, 머리를.”

잠시 후, 그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리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마침 벽에 대형 전신거울이 걸려 있었다. 그는 히죽 웃으며 거울 앞에 섰다. NSA의 윤진성이 웃고 있었다.

“쯧. 요원도 재미있었는데. 하지만 할 수 없지. 지금쯤이면 광고 회사 놈들도 내 꼬리를 잡았을 테니까.”

그는 아쉬운 듯 웃으며 눈가를 슬쩍 문질렀다.

이윽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거울 앞에는 30대 초반의 여자가 서 있었다. 윤진성과는 성별, 키와 체형, 이목구비가 전혀 다른 여자가. 입고 있는 옷도 짧은 원피스로 바뀌어 있었다.

“자, 나도 슬슬 이혜성을 사냥하러 가 볼까?”

그, 아니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

태호의 병원 근처 커피숍.

늦은 오전 무렵인 탓에 손님이 많지 않았다. 노트북을 켜고 공부하는 학생 둘, 평상복을 입은 강철호, 그리고 모자를 눌러쓰고 안경을 쓴 혜성이 전부였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혜성은 커피를 입에 가져가며 맞은편의 강철호를 흘깃 쳐다봤다. 자신의 연락처를 어떻게 알아냈는가는 둘째 문제. 이름만 아는 CIC의 팀장이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것 자체가 이상했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 인사를 못 했지? 그래, 몸은 좀 어떤가? 듣자 하니 한때 유망했던 힐러 친구를 뒀다던데.”

강철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다들 걱정해주신 덕분에 괜찮습니다.”

혜성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마찬가지로 어색하게 웃었다.

태호의 실력은 확실했다. 그가 병원에 실려 온 게 어제 새벽. 불과 하루 만에 외상은 거의 아물어 있었다.

- 이 새끼야. 사건이 널 부르는 거냐, 아니면 네가 사건을 부르는 거냐?

태호의 고마운 욕설에 아직도 귀가 좀 따가웠지만.

“CIC가 이번에 큰 빚을 졌네. 결국 도심에 나타난 AAA급 던전을 혜성 씨 혼자 클리어한 셈이니까.”

“저 혼자 한 게 아닙니다. 김 요원과 한 요원의 공이 컸습니다.”

혜성은 박무영을 떠올렸다.

상대의 속성과 약점을 공략하는 것. 바로 박무영의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강철호 앞에서 박무영을 언급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혜성 씨의 공이 제일 큰 건 사실이지. 그래서 CIC 내부에서는 혜성 씨에게 아주 큰 보상을 준비하고 있네. 기대해도 좋을 거야.”

강철호는 부드럽게 웃으며 ‘기대’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무슨 보상이지?’

혜성은 기대되면서도 한편으론 불안했다. 제일 좋은 포상은 역시 돈. 순직을 방해하는 특별한 장비나 아이템은 사양하고 싶었다.

“짐작은 하고 있겠지만, 사실 혜성 씨를 보자고 한 건 보상 때문만이 아니네.”

잠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뒤, 강철호는 미소를 지우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의 청문회를 봤네. NSA 내부에는 혜성 씨를 시기하는 무리가 있더군. 감찰의 그 개새끼 같은. 그동안 혜성 씨가 NSA를 위해 세운 공적이 얼만데. 너무 초라한 대우 아닌가?”

혜성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강철호의 목소리는 더욱 은밀해졌다.

“우리 CIC는 다르네. 혜성 씨 같은 인재에겐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지.”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CIC는 초승달 팀을 재건할 생각이네. 내부에서 최고의 인재들만 선발해서. 어떤가? CIC의 역대 최연소 팀장, 초승달의 이혜성이 되는 게?”

강철호는 혜성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네? 제가 팀장이라고요?”

혜성은 멍한 표정으로 눈만 멀뚱거렸다.

최연소 팀장.

생각만으로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스카우트 제의를 할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팀장급은 솔직히 의외였다.

팀장은 단순히 능력자로서의 등급이 높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능력은 물론 경험, 통솔력, 거기에 그동안의 업적들이 쌓여서 되는 것이었다.

“자네가 백호 길드의 백지 수표를 거절했다는 말을 들었네. 국가 대의를 위해 거절했다더군. 그러나 우린 NSA와 동급인 국가 기관. 자네가 추구하는 대의에 어긋나지 않을 거야.”

강철호가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럼 막내, 아니 김성후 요원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혜성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물론 김 요원도 그 나이대에 비하면 뛰어나지. 다만 자네처럼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재는 아니라는 게 우리 쪽 판단이네. 김 요원 대신 더 대단한 요원들이 자네의 팀원으로 붙을 거야.”

강철호는 몇몇 요원들의 이름을 언급했다. 얼음 주먹, 번개 발, 풍뢰검 등. 혜성도 들어본 적이 있는 CIC의 젊은 에이스들이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전 NSA의 소속입니다. 제 마음대로 소속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쪽은 신경 쓰지 말게. 중요한 건 자네의 의사. 자네만 동의하면 다음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하겠네.”

“…….”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게 아니네. 게이트와 던전. NSA와 CIC는 상대하는 적은 물론 조직 체계와 문화 등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으니까. 하지만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자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CIC의 역대 최연소 팀장, 이혜성.”

강철호는 최연소라는 말을 강조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CIC의 최연소 팀장.

이 말이 계속 혜성의 귓가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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