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3. 능력자의 진화형 (4)
“어라?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혜성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좌우에 반쯤 누워있는 막내와 한수호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눈부신 하늘, 맑은 연못, 짙은 녹음.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연못 옆의 공터였다.
“공간 전이?”
혜성은 고개를 갸웃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조금 전보다 호흡이 편했다. 딱 죽지 않을 정도. 누군가가 미약하게 힐을 걸었다는 뜻이었다.
“뭐야? 뻥이라더니……”
혜성은 놀리듯 웃으며 정면을 쳐다봤다. 막내와 한수호도 피식 웃었다.
셋의 정면. 사령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검붉게 충혈된 눈으로.
공간 전이와 힐. 모두 그의 솜씨였다.
“걸리적거리는 것 먼저 치워야겠군.”
그는 이를 부득 갈며 옆으로 걸어갔다. 40m쯤 떨어진 나무 아래, 폭탄이 활성화된 혜성의 백팩이 보였다.
멀리 던져버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확실하게 제거하는 편이 나았다.
“앞으로 5분 후. 살아있는 지옥을 보여주마.”
그는 혜성을 힐끔 노려본 뒤 빠르게 단검을 움직였다.
헤성은 여전히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놈이 폭탄을 해체하는 걸 지켜볼 뿐이었다.
***
던전 밖, 임시 통제실.
“이혜성의 좌표가 바뀌었습니다.”
노트북 모니터를 살피던 요원 하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현재 위치는?”
장진우는 요원의 어깨너머로 노트북을 살피며 물었다.
카메라가 없어 소리와 좌표에 의지하고 있었다. 레이더 영상처럼 모니터에 혜성과 요원들의 위치가 깜빡였다.
“현재 좌표 E-102,509. S-354,718.”
“우리 쪽에서 뚫은 통로와의 거리는?”
“직선으로 약 30m. 멀지 않습니다.”
“좋았어. 나와 강 팀장이 간다.”
장진우는 손뼉을 치며 옆을 돌아봤다. 얼굴에 모처럼 활기가 돌았다.
“직접 진입하는 건가? 우리 둘이서만?”
강철호는 반색하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직접 진입은 무리다. 락 다운 때문에 백도어고 뭐고 전부 막힌 상황이니까.”
장진우는 대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어쩌자고?”
“당신, 스킬이 거인의 힘이지? 당신이 억지로 차원의 틈을 벌리고 고정해. 그럼 내가 틈으로 요원들에게 힐링 팩터를 전송하겠다.”
“뭐? 타깃을 안 보고 전송하겠다고? 그것도 30m나? 그게 가능해?”
강철호는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황당했다. 다른 요원들도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장진우를 쳐다봤다.
“아직 해본 적은 없지만, 정확한 좌표만 알면 이론상 가능하다.”
장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좌표를 계산해 봤다. 현재 혜성의 위치는 cm 단위로 나온 상태. 원리는 전에 폭탄을 아공간으로 옮긴 것과 비슷했다.
“당신 공간 능력자라고 하지 않았어? 당신이 직접 들어갈 수는 없는 거야?”
“내 스킬은 공간 이동이지 공간 압축이 아니라고. 폭이 10cm라면 딱 10cm만 움직일 수 있다. 어쩔 거야? 도와줄 거야, 말 거야?”
장진우는 퉁명스럽게 재촉했다.
“좋다. 힘쓰는 건 내 전문이니까. 한번 같이해 보자고.”
강철호는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었다.
NSA와 CIC의 첫 번째 합동 작전이었다.
***
“이건?”
혜성은 움찔하며 좌우를 번갈아 쳐다봤다. 막내와 한수호도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들은 손을 뒤로한 상태였다. 갑자기 손바닥 위에 뭔가 짠하고 나타났다. 마치 지금 그들의 상황을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손으로 만져보니 주사제 형태의 힐링 팩터였다. 그것도 일반적인 사용량을 무시한 대용량이었다.
‘장 팀장님?’
혜성은 장진우를 떠올렸다. 이 정도로 정교한 전이술을 할 수 있는 건 단 한 명뿐이었다.
그들은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인 뒤, 망설임 없이 주사기를 손목에 꽂았다. 이내 체내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특히 혜성은 놈의 힐을 받은 상태. 힐링 팩터가 중첩되자 빠르게 힘이 돌아왔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쌍두 살모사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겁니까?”
한수호가 놈의 눈치를 살피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있던 동굴이 아무래도 쌍두 살모사의 배 속이었던 것 같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몬스터의 힘이 사라져서 석화된 거겠지.”
혜성은 어둡고 긴 동굴, 서서히 부식된 장비들, 그리고 자신의 탈색된 머리카락 등을 떠올렸다. 모두 소화액에 의한 산화작용의 전형이었다.
“에? 거기가 전부 몬스터의 내부였다고요? 그럼 대체 얼마나 큰……”
이번엔 막내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때였다.
“아니. 반만 맞혔군. 쌍두 살모사가 석화된 건 맞지만, 녀석의 힘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게 대부분의 힘을 빼앗기고 강제로 동면하게 된 거지. 최초에 B급 던전으로 측정된 것도 그 때문이고.”
사령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폭탄을 해체하면서도 귀는 계속 이쪽을 향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놈은 히죽 웃으며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폭탄을 제거한 백팩은 멀찌감치 집어던진 뒤였다. 셋은 즉시 입을 다물고 그를 쳐다봤다.
“외부에서 힐링 팩터라도 받았나? 그새 안색이 좋아졌군.”
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비아냥거렸다.
“……!”
얼굴이 굳어진 혜성.
놈은 그들 전부를 한꺼번에 전이시킨 능력자였다. 장진우의 스킬을 감지하지 못했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다만 놈은 그들의 회복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그들이 회복하길 기다린 것 같았다.
“내가 아까 말했을 텐데? 지옥을 보여주겠다고.”
사령은 어깨를 으쓱하곤 말을 이었다.
“아까는 내 힘을 제대로 보여줄 수 없었지. 내가 너무 강해서 쌍두 살모사의 내부가 무너질 수도 있었거든.”
사령은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눈을 하얗게 뒤집어 깐 가운데, 곧 양손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놈의 주위로 돌풍이 휘몰아쳤다.
“영광인 줄 알아라. 지금까지 이 모습을 본 건 딱 세 사람뿐이었으니까.”
놈은 섬뜩하게 웃으며 서서히 붉은 돌풍 속에 잠겼다.
“또 뭘 하려고?”
혜성은 놈의 변화를 보고 흠칫 놀랐다.
처음엔 옷이 갈기갈기 찢기며 덩치가 급속도로 커졌다. 이어서 피부가 살모사처럼 갈색 비늘로 뒤덮였고, 손톱과 발톱도 독기를 머금고 녹색으로 변하며 길어졌다.
동시에 이목구비는 점점 길고 뾰족해지더니 이내 뱀처럼 변했다.
“씨발. 인간적으로 이건 반칙이잖아.”
“인간이 몬스터로 변신하다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막내와 한수호도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키 5m, 체중 500kg이 넘어 보이는 몬스터.
대충 봐도 AAA급은 될 것 같은 뱀 인간이었다. 동굴에서 본 몬스터들이 떠올랐다. 놈들도 흉측하게 생겼지만, 사령에 비하면 귀여운 새끼였다.
“크아아아!”
놈은 긴 꼬리로 바닥을 쓸며 길게 포효했다. 던전 전체가 놈의 울음에 공명하듯 진동했다.
“다시 소개하지. 내 집에 온 걸 환영한다. 내가 이곳의 실질적인 주인, 사령이다.”
이윽고 사령은 뱀처럼 길고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사악한 마귀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몸에 무슨 짓을 한 거냐?”
혜성은 나무를 짚고 비틀거리며 억지로 일어났다.
솔직히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놈의 거대한 뱀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말했잖아? 쌍두 살모사의 힘을 뺏어 내게 이식했다고. 인간과 몬스터의 융합. 내가 바로 능력자의 새로운 진화형이다.”
놈은 뱀눈을 좌우로 움직이며 웃었다. 크게 벌린 입 사이로 녹색의 독 이빨이 번뜩였다.
“이런 미친 새끼.”
혜성은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인간이 몬스터로 변한다는 건 금시초문. 게다가 놈은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몬스터의 힘을 흡수한 것 같았다.
이런 허무맹랑한 융합 프로젝트를 개인이 추진했을 리는 없는 터.
‘대체 어떤 자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꾸민 거지? 블랙? 지하 마켓? 아니면 정부의 비밀 연구소?’
혜성은 당장 생각나는 대로 몇 곳을 떠올렸다. 어디가 됐든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 올 게 분명했다.
아무튼 미친놈에게는 매가 약. 그가 막 앞으로 나서려는 찰나였다.
“잠깐만요. 제가 먼저 나설게요. 형은 좀 더 회복에 집중하세요.”
막내가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막았다.
“뭐?”
“현재 선배님은 박훈 팀장의 능력을 카피한 상태입니다. 박훈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그의 능력으로 놈을 상대하는 건 무리입니다. 선배님이 새로 카피할 대상은 바로 저놈…… 사령입니다.”
한수호도 고개를 끄덕이며 혜성의 앞을 막았다.
“하지만……”
혜성은 무거운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우린 팀 아니었어요? 이번 한 번은 우리를 믿고 맡겨 봐요.”
“맞습니다. 언제까지 선배님께만 의지할 수는 없습니다.”
막내와 한수호는 혜성의 말을 자르며 앞에 나란히 섰다. 둘 다 혜성을 안심시키려는 듯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삐빅. 그들의 손목시계가 일제히 울렸다. 남은 시간은 30분. 그 안에 보스를 죽이고 던전을 나가야 했다.
“너희끼리는…… 하아, 알겠다.”
혜성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바꿨다. 대신 결연한 표정으로 둘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특히 막내와는 이미 숱한 고비를 함께 넘긴 사이. 그들 사이에 긴말은 필요 없었다.
“내가 회복할 때까지만 부탁한다.”
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 비틀거리며 숲으로 들어갔다.
힐링 팩터를 최대한 흡수하기 위해서는 조용한 곳에서 의식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사령은 혜성을 쫓지 않았다. 오히려 막내와 한수호의 결의가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우습군. 체력이 한 10%는 회복됐을까? 죽다 살아난 애송이 둘이서 뭘 하겠다는 거냐?”
놈은 긴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으며 둘을 비웃었다. 벌써부터 놈의 역겨운 독기가 코를 찔렀다.
쿵, 놈이 왼발을 앞으로 내밀자 주위의 초목이 스르르 말라비틀어졌다.
막내는 회색으로 변한 초목을 내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다. 시작도 전에 기가 죽어서는 안 됐다.
“내가 이래 봬도 A급 요원이거든. 네놈의 독기는 전부 태워주마.”
그는 사령을 향해 한 발 나가며 오른손 검지를 내밀었다. 화륵, 작은 불꽃이 검지 끝에 춤을 추듯 맺혔다.
“비록 어설픈 짝퉁이긴 하지만, 선배님의 카피 스타일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한수호는 뱀 이빨처럼 생긴 단검을 양손에 하나씩 들었다. 자신과 막내의 복부에 박혔던 단검이었다.
그는 자세를 낮추고 단검의 날을 자기 쪽으로 해서 잡았다. 상대를 마구 벨 것 같은 자세. 동굴에서 놈이 혜성을 벴을 때와 비슷했다.
“길어야 10분. 혜성이 형이 돌아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
“알겠습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놈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겠습니다.”
막내와 한수호는 자세를 낮추며 천천히 놈의 좌우로 갈라졌다.
***
던전 밖, 웜홀 입구.
“능력자와 몬스터의 융합이라니. 황당하군. 둘만으로 괜찮을까?”
강철호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던전 내부의 상황은 하늘의 귀를 통해 계속 중계되고 있었다.
“글쎄. 객관적인 전력으론 막내와 수호가 열세지만, 쉽게 무너지진 않을 거야. 조합이 좋으니까.”
장진우는 둘의 특기를 떠올리며 말끝을 흐렸다.
막내는 원거리 화염 딜러. 한수호는 근거리와 중간 거리를 오가는 만능형이었다.
한수호가 적의 시야를 교란하고, 막내가 틈을 봐서 딜을 넣는다. 작전은 괜찮았다.
변수는 놈의 독기. 안티 포이즈닝 약물이 얼마나 버티느냐가 문제였다. 그때였다.
쾅!
던전 내부에서 화염이 터졌다. 2 대 1의 전초전을 알리는 폭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