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2. 능력자의 진화형 (3)
‘여기가 어디지?’
한수호는 억지로 기억을 짜내기 위해 도리질했다. 뒤죽박죽. 술이나 약에 취한 듯 몽롱하고 혼란했다.
‘아, 맞다. 던전이었지. 핵 근처에 특수 존이 있는 지랄 같은 던전.’
그제야 뭔가 떠올랐다.
침입자가 들어오면 내분을 유도, 자멸시킨다. 그리고 요행히 살아남은 놈은 하급 몬스터들이 몰려들어 처리한다. 간단하면서도 얄미울 정도로 영악했다.
출혈이 심했다. 한기를 느끼는 가운데 의식이 가물거렸다. 그는 의식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계속 생각했다.
광폭화.
인간은 누구나 내면에 잔인한 폭력성이 잠재돼 있는바, 광폭화란이것을 외부로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이성이 마비되고, 에너지 소비가 일시적으로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종국에는 다 타버린 촛불처럼 스르르 사라지는 저주.
‘그래, 마치 저 사람처럼 말이야.’
한수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면을 주시했다.
광폭화에 젖은 사내가 몬스터들을 마구 찢어 죽이고 있었다. 부상 따윈 아랑곳하지 않은 채. 충혈된 눈, 흠뻑 뒤집어쓴 피, 그리고 야수처럼 거친 몸놀림.
누가 인간이고 누가 몬스터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크아!”
누군가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사내와 마찬가지로 광폭화에 걸린 것 같았다. 놈은 부러진 검을 휘둘러 뇌전의 검기를 만들었다.
사내는 검기를 무시했다. 오른손으로 적의 검을 움켜쥠과 동시에 왼손으로 적의 옆구리를 거칠게 할퀴었다. 퍼억, 검을 든 자의 갈비뼈가 그대로 드러났다.
“크아아!”
검을 든 자를 벽에 집어던진 뒤, 사내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길게 포효했다.
‘아, 이 대협!’
한수호는 뒤늦게 사내의 정체를 떠올렸다. 일렁이는 검은 갑옷에 둘러싸인 혜성. 조금 전에 옆구리를 뜯긴 자는 박훈이었다.
“크윽.”
한수호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기 위해 발버둥 쳤다.
복부에 깊이 박힌 단검 때문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움직일 때마다 출혈이 심해져서 정신이 더 아득해졌다.
“이건 좀 의왼데? 스스로 광폭화 존에 뛰어든 건가?”
그의 앞에서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흡족한 어투였다.
한수호는 오른쪽 앞을 곁눈질했다. 딜러와의 대결이 거의 끝났을 무렵, 느닷없이 나타나 그의 복부에 단검을 꽂은 자였다.
놈은 자신과 막내를 양손에 하나씩 잡아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사내는 막내와 한수호를 동굴 구석에 내동댕이쳤다.
“자, 이제 슬슬 마무리해볼까?”
놈은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천천히 혜성에게 다가갔다. 혜성도 상대의 등장을 감지했는지 눈에 불을 켜고 놈을 노려봤다.
***
막내도 가물거리는 시야 속에서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으으. 혀엉.”
그는 쥐어 짜낸 목소리로 혜성을 불렀다.
혜성은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크아아아!”
그는 괴물처럼 울부짖으며 사내를 향해 돌진했다. 따로 무기가 필요 없었다.
2차 각성에 광폭화가 겹친 상태. 왼팔을 수직으로 휘두르자 거친 뇌전의 검기가 쏘아졌다.
“쯧쯧. 그런 몸으로 뭘 하겠다는 건지. 발악인가?”
사내는 뒷짐을 지고 서서 혀를 찼다.
둘의 거리는 약 10m. 검기가 막 그의 몸을 좌우로 쪼개려는 찰나, 그는 오른발을 슬쩍 내밀고 몸을 비틀었다.
마치 뱀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팟, 혜성의 검기는 그의 잔상을 자르고 허공을 갈랐다.
“아!”
막내와 한수호는 동시에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파팟, 사내는 몸을 낮추고 혜성의 품을 파고들었다. 양손에는 독사의 어금니처럼 길고 휘어진 단검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막타 치는 것 같아서 좀 미안한데?”
사내의 비웃음과 함께 단검들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뭐야?”
막내가 비명처럼 외쳤다.
한수호도 마찬가지. 황당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렸다.
정확하게 몇 번을 벤 건지 보지 못했다. 시간이 정지된 가운데, 두 자루의 단검에서 빛이 번쩍인 것만 같았다.
“아직 죽이진 않겠다.”
이윽고 사내는 단검을 거두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파앗, 그제야 혜성의 전신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어깨, 목, 옆구리, 배. 온몸에 칼자국이 낭자한 채.
그는 한참 동안 서서 피를 뿜다가 쿵하고 무릎을 꿇었다.
“형!”
“대협!”
막내와 한수호가 동시에 발버둥 치며 외쳤다.
퍽, 사내는 혜성의 가슴을 걷어찼다. 혜성은 붕 떴다가 멀리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쾅, 종유석들이 부서지며 그의 머리와 어깨 위로 쏟아졌다.
“쿨럭!”
혜성은 피가 섞인 마른기침을 해대며 고개를 들었다. 안색은 창백했지만, 눈빛은 보통 때로 돌아왔다.
앞서 살쾡이 길드원이나 초승달의 탱커와 비슷했다. 죽기 전에야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다만 겨우 숨을 몰아쉬는 게 전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암흑의 수호자 또한 스르르 움직여 본래의 정장 형태가 됐다.
“너, 넌 누구냐?”
혜성이 기침을 토해내며 쥐어짜듯 물었다. 그의 몸 상태는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이대로라면 얼마 안 있어 과다출혈로 죽을 게 뻔했다.
“코드명 사령(蛇靈). 그냥 뱀 귀신이라고 불러라.”
사내는 혜성을 내려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사령? 뱀 귀신?”
혜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한수호와 헤어지고 혼자 전진할 때 들었던 의문들이 문득 떠올랐다.
“블랙인가?”
“블랙은 아니지만, 아주 관계가 없다고도 할 수 없지.”
“그럼 네가 이 던전을 만든 거냐?”
“내가 던전을 만든 건 아니지만 그와 비슷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난 이 던전을 열었을 뿐, 애초에 여길 창조한 것은 다른 사람이니까.”
사내는 빙글거리며 대답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런가? 역시 내가 목적이었나?”
혜성은 다시 피를 토해낸 뒤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목적이면 그냥 죽일 것이지, 왜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쓴 거냐?”
“널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라는 의뢰가 있었거든.”
사령은 혜성의 가슴을 자근자근 밟았다.
“크윽!”
혜성은 어금니를 깨물고 비명을 삼켰다. 전신은 땀으로 흥건. 안색은 곧 죽을 것처럼 창백했지만,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
“오? 참는 거냐? 제법 독한 놈이군.”
한참 후, 사령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발을 뗐다.
삐빅, 혜성의 손목시계에서 알람이 울렸다. 사령은 혜성의 시계를 힐끔 쳐다봤다.
남은 시간 0:59. 그러고 보니 혜성의 머리카락이 연하게 탈색돼 늘어져 있었다.
“이제 슬슬 마무리하자. 내 위에 계신 분께서 네 머리를 원하셨거든.”
사령은 단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안 돼!”
막내와 한수호가 동시에 다급하게 외쳤지만, 그들도 마음뿐이었다. 그때였다.
“크크크크!”
혜성은 돌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상처가 벌어지고 출혈이 더 심해졌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뭐가 그리 재밌나?”
사령은 고개를 갸웃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내 셔츠 좀 풀어볼래?”
“뭐?”
“설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광폭화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혜성은 조금 전 사령이 보여줬던 비웃음을 그대로 돌려줬다.
사령은 단검을 수평으로 가볍게 휘둘렀다.
툭, 혜성의 셔츠 단추 2개가 떨어져 나가고 왼쪽 가슴이 드러났다.
심장 위. 직경 5cm의 원형 판이 붙어 있었다. 생체 파동과 연결된 기폭 장치.
그의 호흡이 약해지는 것과 비례해서 빨간불이 빠르게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뭔지 알지? 지옥 염화의 기폭 장치다. 박훈의 손에 죽으나 광폭화에 걸려서 기력이 다해 죽거나. 죽는 건 매한가진데 나 혼자 죽는 건 억울하더라고.”
혜성은 히죽 웃은 뒤 힘주어 말했다.
“내가 죽으면 바로 폭탄이 터질 거야. 그래도 명색이 국가의 영웅인데, 죽더라도 던전은 닫고 죽어야 하지 않겠어?”
“이 미친 새끼.”
이번엔 사령의 얼굴이 질려서 굳어졌다.
“폭탄은 어디 있나?”
이젠 고개를 돌릴 힘도 없었다. 혜성은 푸른빛이 감도는 광폭화 존을 눈짓했다. 백팩은 푸른빛 한복판에 떨어져 있었다.
“난 박훈과 몬스터들을 죽이기 위해 광폭화에 뛰어든 게 아니라고. 핵에 던진 폭탄이 활성화될 때까지 시간이 좀 필요했지.”
혜성은 쿨럭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미 활성화는 끝났어. 강제로 제거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걸?”
“이 또라이 새끼. 어디서 뻥카를……”
사령이 이를 갈며 단검을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크크크. 혜성이 형이 지금 거짓말하는 거 같아?”
반대쪽 벽에 기대 있던 막내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끼어들었다. 막내는 한참 웃은 뒤 피를 토해내고 말을 이었다.
“혜성이 형은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또라이라고.”
“맞다. 이 대협은 말만 앞세우는 분이 아니시다. 한다면 정말 하는 분이시지.”
막내의 옆에 앉은 한수호도 히죽 웃으며 거들었다.
“이, 이 새끼들이……”
사령은 같은 말만 반복하며 이를 갈았다.
“뭐 해? 빨리 날 죽여! 이번 기회에 장렬히 순직 좀 해보자!”
혜성은 가슴을 쭉 내밀고 마지막 힘을 다해 외쳤다.
***
던전 밖, 임시 통제실.
대원 십여 명이 일렬로 앉아 특수 장비들을 만지고 있었다. NSA, CIC 소속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바빴다. 전장을 방불케 하는 긴박감이 가득했다.
“락 다운은 아직도 못 풀었나?”
장진우가 대원들의 뒤에 서서 초조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강철호도 아랫입술을 깨물며 대원들의 어깨너머를 살피고 있었다.
“이제 조금 열렸습니다. 문으로 비유하면 2cm 정도 연 셈입니다.”
“우선 특수 통신 장치를 투입하겠습니다. 대원들과 통신은 할 수 없지만, 내부의 상황 정도는 알 수 있을 겁니다.”
요원들은 제어 장치들을 조종하며 대답했다.
벽에 걸린 모니터에 웜홀 근처의 상황이 나왔다.
요원 하나가 뱀처럼 긴 은색 케이블을 웜홀로 집어넣었다. 끝에는 ‘하늘의 귀’라는 작은 구슬이 달려 있었다.
통제실의 요원들도 더 바빠졌다.
“이혜성이 하늘의 눈 가져갔지? 그거 파형이 뭐야? P204 맞나?”
“S307이야. 빨리 외부 파형으로 변환해.”
“하지만 암호화를 거치지 않으면 도청의 위험이……”
“지금 그런 거 따질 때야? 일단……”
통제 요원들 사이에 욕설에 가까운 고성이 오갔다.
잠시 후, 스피커에서 지지직하는 잡음이 흘러나왔다.
주파수를 조절하자 잡음이 옅어지고 여럿의 목소리가 섞여 나왔다.
소리가 다소 뭉쳐 있었지만, 대략적인 키워드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 폭탄 …… 활성화 …… 거짓말 …… 진짜 기폭장치.”
그리고 누군가의 미친듯한 웃음이 들렸다.
“역시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던전을 잠근 거군. 악당이 폭탄으로 협박하는 상황인가?”
강철호는 신음을 내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온몸에 폭탄을 두른 테러범이 요원을 협박하는 영화가 떠올랐다.
“이혜성이야.”
장진우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상대가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폭탄으로 협박하는 건 이혜성이라고.”
장진우는 복잡한 표정이 됐다.
“그게 무슨 말이야?”
“요원이 테러범을 협박해? 그 반대가 아니고?”
강철호와 다른 요원들도 모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바뀌었다. 사건을 해결해야 할 특수 요원이 오히려 폭탄으로 악당에게 큰소리를 치고 있는 상황.
이걸 듣고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다들 난감했다.
“뭐 해? 빨리 날 죽여! 이번 기회에……”
혜성이 목소리를 더 높였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이, 이 새끼들이……”
악당은 같은 말만 반복했다. 아마 분노에 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터. 하지만 혜성에게 손도 못 대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악당을 더 자극하면 어떻게 해?”
누군가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장진우와 강철호의 안색도 창백해졌다.
다음 순간, 던전 내부의 에너지를 분석하던 요원이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고순도의 에너지 방출 감지! 타깃은…… 이혜성입니다!”
“혜성을 공격한 건가?”
장진우가 다급하게 되물었다.
“공격 파장이 아닙니다. 이건…… 공간 전이 스킬과 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