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1. 능력자의 진화형 (2)
파파팟!
빛의 화살들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우박처럼 쏟아졌다.
‘몇 대 맞고 2차 각성을 할까?’
혜성은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어떤 적이 더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 일단 힘을 아낄 필요가 있었다.
“제게 맡기세요!”
막내는 뒷걸음질 치며 양손으로 크게 원을 그렸다.
물로 된 대형 방패가 우산처럼 펼쳐졌다. 퍼퍼펑, 방패는 엷은 무지개를 만들며 물방울이 돼 부서졌다.
혜성은 막내의 뒤에 숨어서 전방을 살폈다.
딜러는 약 30m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누군가와 크게 싸웠는지 옆구리가 파일 정도로 크게 다쳤지만, 고통은 못 느끼는 것 같았다.
“크하하하!”
딜러는 미친 듯이 웃으며 허공을 향해 활을 쏘았다. 에너지의 고갈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마비된 이성. 광기에 사로잡힌 붉은 눈.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육체.
‘광폭화인가?’
혜성은 그들이 했던 미쳤다는 말을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최상급 던전의 중심에는 광폭화, 디버프, 광역딜 등 다양한 특수 존(zone)이 나타난다는 보고를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광폭화도 종류와 증상이 다양했는데, 피아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는 것이 제일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광폭화 존 근처에 진입. B급 던전이라 방심하고 전진. 광폭화 감염 및 내분. 초승달 팀이 겪은 일련의 사건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고.”
한수호의 난감한 목소리가 들렸다.
딜러는 광폭화의 부작용으로 인해 몸이 한계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한수호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어디까지나 CIC 요원. 그는 차마 딜러를 죽이지 못하고 방어에만 급급했다.
“시간은?”
혜성은 시계를 힐끔 내려다봤다.
남은 시간은 2시간 남짓. 백팩, 신발 등의 부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갑옷이나 주요 장비 등은 아직 이상이 없었지만, 그것도 부식이 시작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광폭화 존은 딜러의 뒤에 있겠지? 그렇다면 방법은 하난데.’
혜성은 고민했다. 아직 아카데미를 졸업도 못 한 녀석에게 차마 짐을 지울 수 없었다.
“대협. 아니, 선배님.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제가 시간을 끄는 사이 던전의 핵을 파괴해 주십시오.”
한수호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혜성은 녀석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봤다.
녀석은 두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녀석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뭔가 단단히 결심한 눈치였다.
“너 혼자 괜찮겠나?”
“괜찮습니다. 막내 형이 먼저 용기를 보여주셨으니, 이젠 제가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녀석은 짐짓 밝게 목소리를 높였다.
“젠장, 조금만 버텨라. 금방 끝낼 테니까.”
혜성은 한수호의 어깨를 두드린 뒤 무릎을 살짝 굽혔다.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해!”
한수호는 NSA의 구호를 외치며 앞으로 내달렸다. 딜러 또한 빛의 화살을 쏘아대며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콰쾅!
물과 빛, 화살과 방패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지진이 난 것처럼 동굴 전체를 울리며.
“지금이다!”
물보라와 수증기가 딜러의 시야를 가린 순간, 혜성은 쏜살처럼 튀어 나가 딜러를 지나쳤다.
***
파팟, 독기를 머금은 시큼한 바람이 온몸을 스쳤다. 던전의 중심에 가까워진 것 같았다.
공기 중에 섞인 독기 특유의 역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젠장! 진입한 지 2시간이 넘었는데, 왜 아직도 지원이 없는 거야?”
혜성은 앞으로 내달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몇 차례 심호흡했다. 여러 사건을 겪은 탓일까? 마음은 급했지만, 머리는 곧 차가워졌다.
“적은 왜 하나씩 등장하는 거지? 혹시 우리를 떼어놓으려는 건가?”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성은 AA급 이상이나 마법 스킬을 지닌 몬스터만 가질 수 있었다.
여기 있는 뱀 인간들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놈들이 지성을 가진 것 같진 않았다.
5분쯤 달렸을 무렵.
마침내 동굴의 끝자락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보였다. 던전의 핵이 멀지 않았다는 표시였다.
“됐다!”
그는 이를 악물고 전속으로 내달렸다.
그때였다. 번쩍, 어둠 저편에서 노란 섬광이 번쩍였다. 전신의 털을 곤두서게 만드는 짜릿한 기운. 뇌전을 품은 검기였다.
혜성은 반사적으로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완전히 피할 수 없었다. 화끈한 통증과 함께 상처에서 피가 뿜어졌다.
콰당!
그는 관성을 못 이기고 몇 바퀴를 굴러 벽에 처박혔다. 오른쪽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통증을 느끼며.
“크윽!”
그는 어금니를 깨물며 상체를 일으켰다. 다행히 어깻죽지 일부만 베인 상태였다. 다만 처박힐 때 뒤통수를 세게 부딪친 탓에 머리가 좀 멍했다.
“크크크!”
정면에서 비릿한 웃음이 들렸다. ‘인사 대신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누구?”
혜성은 고개를 들었다가 표정이 일그러졌다.
붉은 눈동자의 박훈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반쯤 부러진 검을 들고. 그의 뒤로는 힐러, 버퍼, 그리고 수많은 몬스터의 시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살쾡이 길드원으로 추정되는 자들의 시체도 왼쪽 구석에 보였다.
“팀장님! 접니다!”
혜성이 크게 외쳤지만, 박훈은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눈에 서린 광기와 살기가 더 짙어졌다.
“젠장! 박 팀장마저 당한 건가?”
혜성은 어금니를 깨물며 주춤 물러섰다. 곧 등 뒤로 차갑고 딱딱한 벽이 느껴졌다.
설마 하던 최악의 상황.
던전에 생성되는 광폭화의 등급은 다양한데, 일반적으로 보스의 등급에 비례했다.
지금 광폭화에 걸린 박훈은 AA급 이상. 그렇다면 던전의 보스는 최소 AAA급 이상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정말 미치겠군. 이게 B급 던전이라고? 대체 어떻게 측정한 거야?”
혜성은 나직이 욕설을 중얼거리며 단검을 고쳐 잡았다.
***
“정말 미치겠네. 이건 완전히 개떼잖아?”
막내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뒷걸음질 쳤다. 얼굴이며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더는 물러설 곳도 없었다.
“크크크!”
서른 남짓의 몬스터들은 히죽 웃으며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 왔다.
숫자는 얼마 안 되지만 지옥 같은 화염 속에서 살아남은 놈들이었다. 다른 놈들보다 강하고 영악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쏠 수 있지? 한 방? 두 방?”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억지로 팔을 들었다. 자신의 팔이 아닌 것처럼 무거웠다.
“씨……”
그가 욕을 외치며 다시 화염을 만들려는 찰나였다.
“뭐야? 아직 살아 있었어?”
오른쪽 통로에서 돌연 젊고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
막내는 눈을 크게 뜨며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낯선 사내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느긋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반대로 몬스터들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슬그머니 물러섰다.
“네가 막내냐?”
그가 웃음기를 머금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CIC? NSA? 어디 소속입니까?”
그제야 막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내의 정체는 둘째 문제. 복장은 좀 이상했지만, 어쨌거나 그와 같은 사람이었다. 던전에서 멀쩡한 사람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됐다.
그사이 사내는 막내의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지금 혜성이 형이 안에……”
막내는 동굴 안쪽을 가리키다가 말을 멈췄다.
“왜?”
그는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배를 내려다봤다. 시퍼런 단검이 복부 깊숙이 박혀 있었다. 단검의 손잡이를 쥔 것은 사내.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사람이라고 다 같은 편은 아니잖아?”
사내는 단검을 빼고 막내를 걷어찼다.
“컥!”
막내는 배를 부여잡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흘러내린 피가 금세 작은 웅덩이를 이뤘지만, 비명을 지를 정신은 없었다. 고통보다 의문이 먼저 그를 사로잡았다.
“넌…… 누구냐?”
막내는 사내를 노려보며 쥐어짜듯 물었다. 시야가 가물거렸다. 의식을 완전히 잃기 전, 사내의 비웃음이 들렸다.
“누구긴? 당연히 네 적이지. 최종 타깃은 이혜성. 그때까지는 살려두마.”
이것이 막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
- 2시 방향!
머릿속에서 대수영의 다급한 경고가 들렸다.
“젠장!”
혜성은 바닥에 몸을 굴려 박훈의 검을 피했다. 체면이고 뭐고 따질 겨를이 없었다. 뇌전의 짜릿한 기운이 아슬아슬하게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박훈은 기다렸다는 듯이 오른발로 그를 걷어찼다. 퍼억, 혜성은뒹굴던 자세 그대로 데굴 굴러갔다.
“크어!”
혜성이 몸을 미처 일으키기도 전, 박훈은 괴성을 지르며 다시 달려들었다. 박훈의 손에 들린 검이 그의 명치를 똑바로 찔러오는 환상이 보였다.
‘씨발. 정신없군.’
혜성은 상체를 슬쩍 돌려 박훈의 검을 피했다. 동시에 단검을 든 왼손을 쭉 내밀어 상대의 오른쪽 어깨를 찔렀다.
그도 2차 각성으로 상대의 뇌전을 흡수한 상태. 손에 짜릿한 느낌이 왔다.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것도 잠시. 박훈은 왼발로 그의 옆구리를 무자비하게 걷어찼다.
쾅, 그는 다시 한참을 날아간 끝에 벽에 볼썽사납게 처박혔다.
암흑의 수호자가 등을 보호하는 형태로 변한 게 그나마 다행. 벽이 움푹 파이고 돌가루가 우수수 쏟아졌다.
“크아아아!”
박훈은 위를 올려다보며 길게 포효했다. 마치 승리를 자축하는 것처럼.
“고통을 못 느끼는 건가?”
혜성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으며 억지로 일어났다. 기본 능력치는 그가 위였지만, 번번이 낭패를 보고 있었다.
- 좀비냐?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이래선 예측해서 반격하는 의미가 없잖아?
대수영도 황당한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무통(無痛)에 광폭화까지. 환장하겠군.”
퉤, 혜성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침을 뱉었다. 누런 가래에 피가 끈적하게 섞여 있었다.
“저것들은 또 언제 몰려온 거야?”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둘의 앞뒤에는 어느새 새끼 몬스터들이 새카맣게 몰려 있었다. 다만 지금은 인간들끼리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상황. 놈들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제길. 핵이 바로 저기 있는데.”
혜성은 다시 왼쪽 통로로 시선을 돌렸다.
던전의 핵 근처. 푸르스름한 빛이 강해졌다 약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박훈의 광폭화에 반응하는 것처럼.
“크크크!”
포효를 마친 박훈이 비릿하게 웃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검에 서린 노란빛이 더 짙어졌다.
“역시 방법은 그것뿐인가?”
혜성은 던전의 중심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뭔가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혜성은 백팩 옆주머니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직경 5cm의 생체 연동형 기폭 장치였다.
“나도 이판사판이다.”
그는 기폭 장치를 갑옷 안, 왼쪽 가슴에 부착했다. 그리곤 반대편 백팩 주머니에 손을 넣고 더듬거려 지옥 염화의 스위치를 눌렀다.
‘기회는 한 번뿐.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그는 자세를 바로 하고 양손으로 단검을 잡았다.
폭탄의 반경은 약 100m.
막내와 한수호라면 던전이 붕괴되는 동안 탈출할 수 있었다.
- 이 또라이 새끼.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잖아. 그러니 혼자 죽을 수 없지.”
대수영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는 가볍게 무시했다.
“크아아!”
박훈이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돌진했다. 그를 단숨에 반으로 가르려는 것처럼.
“가자!”
혜성도 이를 악물고 마주 달렸다.
박훈의 장검이 머리 위로 떨어지기 직전, 그는 대각선 옆으로 몸을 날렸다. 검을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종아리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도 계획은 성공이었다. 그는 박훈의 뒤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던전의 핵까지 일직선으로 뚫려 있었다. 아마 광폭화 존도 그곳에 있을 터.
“눈에는 눈. 광폭화에는 광폭화다!”
혜성은 백팩을 벗어 광폭화 존 가운데로 던졌다. 동시에 눈을 질끈 감고 푸른빛에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