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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순직이 힘들다-39화 (39/150)

# 039. 우상 (4)

웜홀은 마치 터널을 통과하는 느낌이었다. 잠깐 시야가 아득해지고 현기증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녹색 그림자가 가득한 숲 한복판에 서 있었다.

던전에서 제일 위험한 순간은 진입한 직후였다.

웜홀을 등지고 혜성이 정면, 막내와 한수호가 각각 좌우를 방어하는 포메이션을 구성했다. 손에는 날이 시퍼런 단검을 든 채.

그들은 몸을 낮추고 잠시 주위를 경계했다. 기분 나쁠 정도로 고요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군.”

이윽고 혜성은 단검을 거두고 경계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맞아요. 뭔가에 눌린 것 같다고나 할까?”

막내도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삐빅, 그들의 스마트워치가 동시에 짧게 울렸다. 혜성은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4:09에서 카운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앞으로 약 4시간. 그 안에 여길 소멸시켜야 해요. 안 그럼 어떻게 되는지 알죠?”

막내가 스마트워치의 알람을 끄며 주의를 줬다.

각 던전은 등급에 따라 최대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바, 스마트워치는 그 한계 시간을 자동으로 측정하는 기능이 있었다.

“너무 짧군. 초승달은?”

혜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주위에 다른 인간이 머물다 간 흔적은 없었다. 던전은 끊임없이 이동하는 차원의 중첩. 같은 웜홀을 이용해도 몇 분 차이에 따라 진입 포인트가 달라졌다.

“잠깐만요.”

막내는 백팩에서 야구공만 한 구슬을 꺼냈다. 손바닥을 통해 에너지를 주입하고 잠시 기다리자, 레이더처럼 녹색의 반투명한 빛이 뿜어졌다.

“어디 보자.”

막내는 눈을 지그시 감고 의식을 집중했다.

레이더의 북쪽. 붉은 점들이 나타났다. 다만 선명한 빨강이 아니었다. 어둡고 희미한 색이었다.

“우리하고 다른 포인트로 진입했군요. 북쪽 약 2km 지점. 생명력이 약해요. 목숨만 붙어 있는 정도예요.”

“벌써 당한 건가? 초승달이 우리보다 얼마나 빨리 진입했지?”

“글쎄요. 길어야 15분 정도?”

“맞다. 그리고 초승달은 AA급 팀이지. 그런 전문가들이 B급 던전에서 15분 만에 당했다? 이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혜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북쪽을 응시했다.

울창한 숲과 맑은 하늘. 다만 생명체의 흔적이 없어 으스스했다.

“가자.”

혜성은 막내와 한수호를 번갈아 돌아본 뒤 걸음을 옮겼다. 그가 중앙에서 선두로 나서고 막내와 한수호가 좌우에 서는 대형이었다.

숲은 잎이 큰 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명도와 채도가 다양한 수천 개의 녹색 그림자가 그들을 덮었다.

사사삭, 그들은 무릎까지 자란 잡초를 헤치며 빠르게 이동했다. 적이나 생명체의 흔적은 무(無). 개미 새끼 한 마리 볼 수 없었다.

약 십여 분 뒤.

“정지!”

혜성은 손을 들며 큰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파팟, 막내와 한수호도 날랜 몸놀림으로 좌우로 갈라졌다.

전방 200m, 지형이 바뀌었다. 숲은 끝났다. 대신 야트막한 언덕에 둘러싸인 넓은 호수가 나타났다.

“이상한데요? 초승달의 신호는 저 호수 아래에서 잡히고 있어요.”

막내는 아이템으로 위치를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물고기 밥이라도 된 건가?

“혹시 저기로 내려간 거 아닐까요? 쌍두 살모사는 습한 곳을 좋아하며, 땅속 깊숙한 곳에서 산다고 배웠습니다.”

한수호가 오른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색 바위가 드러난 언덕 중앙.

큰 동굴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호수로 연결된 듯 멀리서도 습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쩌죠?”

막내가 난감한 표정으로 물었다.

동굴은 시야가 제한적이고 도피가 불리한 지형. 던전에서 몬스터를 상대할 때 피해야 할 곳 1순위였다.

혜성은 손목을 들어 스마트 워치를 확인했다. 남은 시간 3:41. 게다가 초승달 팀원들의 생체 신호는 더욱 미약해져 있었다.

“할 수 없다.”

혜성은 백팩에서 작은 드링크를 꺼냈다. 독성을 중화시키는 약물이었다. 그는 뚜껑을 연 뒤, 시큼한 액체를 단숨에 목구멍 안으로 넘겼다.

그리곤 안티 포이즈닝 가죽 장갑을 꺼내 양손에 꼈다. 막내와 한수호도 그를 따라서 약물을 복용하고 장갑을 꼈다.

“가자!”

혜성은 단검을 왼손에 들고 동굴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막내와 한수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따랐다.

***

뚜벅, 뚜벅.

세 명의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동굴은 생각보다 길고 복잡했다. 폭은 약 3m, 높이는 약 7m.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끝이 보이지 않았고, 미로처럼 중간에 갈라지거나 굽어지는 길도 있었다.

“잠깐!”

혜성은 백팩에서 작은 구슬을 꺼내 앞으로 굴렸다.

파앗, 구슬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졌다. 빛으로 시야도 확보하고 동시에 그들이 지나온 경로를 표시한 것이었다.

뒤에도 약 30m 간격으로 구슬이 하나씩 떨어져 있었다.

빛에 반사된 혜성과 막내, 한수호의 그림자가 춤을 추듯 벽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은 제일 큰길을 따라 다시 이동했다.

“쌍두 살모사 자체의 능력은 별 볼 일 없지만, 문제는 놈의 독성이다. 놈들의 독기는 피부 접촉을 통해서도 전파될 수 있으니까. 만약 놈들과 마주치면 단숨에……”

혜성은 속삭이듯 주의를 상기시키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막내와 한수호도 거의 동시에 자세를 낮추고 전방을 경계했다.

세 갈래로 나뉘는 길목이었다.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릴 뿐, 적막했다.

쉬익,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왼쪽이냐?”

막내가 왼쪽으로 굽어지는 길목을 향해 오른손 엄지와 중지를 튕겼다.

퍼펑, 화염방사기처럼 거대한 불길이 왼쪽을 향해 쏟아졌다.

“끄에에엑!”

고기 타는 냄새가 나며 비명이 길게 메아리쳤다. 한두 놈이 아니었다. 최소 열 놈 이상.

곧 사람 형태의 그림자들이 왼쪽에서 쏟아졌다. 키는 150cm 남짓. 약간 마르고 구부정한 체형이었다.

여기까지는 인간과 비슷했다. 하지만 녀석의 어깨 위에는 사람의 머리 대신 보라색 뱀의 머리가 붙어 있었다.

“이번엔 제가……”

한수호가 놈들의 틈으로 난입하려는 찰나, 막내가 왼손을 들어서 막았다.

“이런 건 내 전문이지.”

막내는 히죽 웃으며 양손을 크게 교차시켰다.

퍼펑, 조금 전의 2배가 넘는 거대한 불길이 동굴을 휩쓸었다.

혜성은 급히 벽에 몸을 붙이며 화염을 살펴봤다. 10m쯤 떨어져 있는 그에게도 뜨거운 열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더 강해진 건가? 하긴, 나를 따라다니며 고생만 했으니까.’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론 조금 미안했다.

막내는 비명이 그치고 1분 정도 지나서야 불길을 거뒀다.

화르륵, 녀석이 손을 거두자 화염은 영상을 거꾸로 돌린 것처럼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숫자는 많지만 별거 아니네요. 독기까지 전부 태워버렸어요.”

녀석은 혜성과 한수호를 향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때였다.

“으아아악!”

오른쪽에서 긴 비명이 들렸다. 몬스터는 아니었다. 분명 사람이었다.

“누구지?”

혜성은 나머지 둘을 쳐다본 뒤, 오른쪽을 향해 내달렸다. 다만 언제 또 놈들이 기습할지 몰랐다. 막내가 조금 앞장서서 달리며 화염방사기처럼 불길을 뿜어댔다.

약 30m 전방.

한 사내가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아 있었다. 장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주위에는 뱀의 머리를 한 몬스터 여섯 마리가 반원형으로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쉬익, 몬스터들도 혜성과 일행들을 감지하고 시선을 돌렸다.

“젠장!”

막내는 잠깐 당황했다. 사내와 몬스터들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자칫하면 사내도 같이 불길에 휩쓸릴 터.

“걱정 말고 쏘세요.”

순간 누군가가 속도를 높여 막내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수호였다. 녀석은 사내를 향해 손바닥을 활짝 펴고 왼팔을 뻗었다.

부웅, 주위의 물방울들이 방어막처럼 사내를 감쌌다.

“지금이에요!”

한수호의 외침과 동시에 막내가 화염을 발사했다.

“크아아!”

몬스터들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허우적거리다가 쓰러졌다. 불과 2, 3초 만에 상황 종료.

혜성은 등에 멘 백팩에서 야광 구슬을 꺼내 던진 뒤, 사내의 옆으로 미끄러지듯 몸을 날렸다.

“괜찮나?”

사내의 뺨을 후려치며 물었다. 초승달 팀의 사람은 아니었다. 검은 갑옷의 왼쪽에 작은 살쾡이가 음각돼 있었다.

“크으.”

인사불성. 사내는 입에 게거품을 문 채 낮은 신음을 흘렸다.

“일단 여기서 벗어납시다.”

혜성은 그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부축하려다가 멈칫했다. 사내의 오른발이 흐물거리며 녹아내린 것이다.

“독?”

혜성은 반사적으로 사내를 팽개치고 물러섰다. 그리곤 급히 백팩을 열고 해독제를 찾았다.

“너무 늦었어요. 곁에 오래 있으면 형도 위험하다고요.”

막내가 혜성을 뒤로 잡아끌며 외쳤다.

녹아내리는 사지, 창백한 피부, 간간이 토해내는 핏물. 전형적인 중독 말기 증세였다. 이 정도면 특급 힐러가 와도 살릴 수 없었다.

“젠장!”

혜성은 불타고 있는 몬스터의 시체를 걷어차며 화풀이했다.

“제가 고통을 좀 덜어드리겠습니다.”

한수호가 사내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며 주문을 외웠다. 곧 바닥에서 맑은 물이 떠오르더니 사내의 입을 향해 스르르 움직였다.

꿀꺽, 사내는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물을 넘겼다. 세 모금쯤 마시니 그의 얼굴에 약간이나마 혈색이 돌아왔다.

“이제 정신이 듭니까? 이름은요? 다른 길드원들은요?”

혜성은 사내의 앞에 쪼그려 앉아 질문을 퍼부었다. 단, 사내의 뺨을 치는 등의 접촉은 삼갔다.

“으으으.”

사내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혜성을 비롯한 세 명이 자신을 바라보는 걸 인식한 모양이었다. 그는 마른기침을 해대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뭐라고요?”

혜성은 사내를 향해 귀를 가까이하고 외쳤다. 막내와 한수호도 귀를 쫑긋 세우며 상체를 가까이했다.

처음에는 불분명했지만, 이내 사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빨리 도망쳐. 여긴 전부 미쳤어.”

사내는 미쳤다는 말만 반복했다.

“뭐? 누가 미쳤다는 거야?”

혜성이 목소리를 높여 되물었다.

사내의 말은 여기까지.

파스스, 사내의 몸이 전부 녹아내렸다. 가죽으로 만든 고급 갑옷과 무기만 남긴 채.

“몬스터들은 기껏해야 B급인데. 대체 누가 미쳤다는 거지?”

혜성은 몸을 일으키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다른 길드원들은 다 죽은 건가?”

“감지기에 잡히지 않은 다른 몬스터라도 있는 걸까요?”

막내와 한수호도 불안한 음성으로 차례대로 물었다.

혜성은 시계를 내려다봤다. 남은 시간은 3:14. 위험한 걸 알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계속 전진하자.”

그는 어둡고 습한 동굴 너머를 응시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미쳤어.’라는 사내의 마지막 말이 묘하게 귓전을 맴돌았다.

***

콰콰쾅!

지축이 울리며 요란한 폭음이 들렸다.

“벌써 시작했나? 이혜성이 벌써 2차 각성을 했을 리는 없고. 막내라는 놈이 한바탕 휩쓸었나 보군.”

그는 잠깐 걸음을 멈췄다. 클럽에 가듯 한껏 멋을 낸 사내였다.

그의 시선이 정면의 호수로 향했다. 수면이 흔들리며 원형 파동을 만들고 있었다. 땅속에서 뭔가 거대한 폭발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지금쯤이면 놈들도 이곳이 평범한 던전이 아니라는 걸 알았겠지. 하지만 진짜는 이제부터. 지옥을 보여주마.”

그는 히죽 웃으며 다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를 사냥하기에 참 좋은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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