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8. 우상 (3)
PM 10:13, 잠실역 인근 도로.
“어? 왜 이러지?”
운전석의 막내는 도로 좌우를 살피며 인상을 찌푸렸다. 빵빵, 경적이 요란한 가운데 차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어디서 사고라도 났나?”
혜성도 센터페시아의 내비게이션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기자들에게 두 시간 넘게 시달린 탓에 녹초가 돼 있었다.
오피스텔까지 남은 거리는 약 500m. 그런데 차가 점점 많아지더니 이젠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출퇴근 시간의 교통체증이야 고질병이었지만, 지금은 딱히 막힐 시간도 아니었다.
삐-익!
어디선가 요란한 호각 소리가 들렸다. 교통경찰들이었다. 그들은 바쁘게 뛰어다니며 차들을 좌우로 이동시켰다.
“역시 사곤가?”
막내도 일단 시키는 대로 옆 차선으로 차를 바싹 붙였다. 길이 열리자 군용 트럭들이 일렬로 지나갔다.
위-잉!
곧이어 사이렌과 함께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설마?”
혜성은 급히 핸드폰을 꺼냈다. 긴급재난 문자. 다만 평소에 접하던 것과 달랐다.
“어? 게이트가 아니라 던전이라고?”
“서울 한복판에서요? 인적이 없는 외곽이 아니고요?”
막내와 한수호도 핸드폰을 확인한 뒤 비명처럼 외쳤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혜성도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 가 보자.”
그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다만 주위에 보는 눈이 많아 모자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렸다.
한수호도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고 내렸다.
“잠깐만요. 우린 지금 근신 중이라고요.”
막내는 망설이다가 뒤늦게 백팩을 챙겨서 뒤따랐다.
***
- 도심 한복판에 던전이 나타났다.
이 짧은 문자 하나에 잠실, 나아가 송파구를 비롯한 서울 동남부 전역이 혼란에 빠졌다.
“서두르자.”
혜성은 군용 트럭이 지나간 길을 따라 종종걸음으로 이동했다. 사람들이 도망치는 것과 반대 방향이었다.
막내와 한수호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뒤따랐다.
“게이트와 던전은 뭐가 다르지?”
혜성은 한수호를 돌아보며 물었다.
“게이트는 몬스터의 차원과 이쪽 차원을 나누는 벽에 원인 모를 균열이 생겨 발생한 것입니다. 반면 던전은 몬스터의 차원과 이쪽 차원이 중첩되는 현상입니다.”
한수호는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장소입니다. 게이트는 몬스터들이 이쪽으로 쏟아지는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홈 경기인 셈입니다. 하지만 던전은 몬스터의 세계에서 싸우는 원정 경기입니다. 또한 던전에서는……”
녀석의 대답은 한참 동안 계속됐다.
“역시 모범생.”
혜성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교과서적인 대답이었다.
“좀 이상한데요. 왜 던전이 도심 한복판에 나타난 거죠? 초기에야 기술이 없어서 던전이 마구잡이로 생성됐다지만, 요즘은 던전 포인트를 컨트롤할 수 있지 않나요?”
막내가 끼어들어 의문을 제기했다.
“글쎄. 변종 게이트처럼 이젠 던전도 변종이 나타나는 건가?”
혜성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솔직히 그도 확실한 건 아니었다.
그들은 곧 S 빌딩 근처에 도착했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니 10시 20분을 지나고 있었다.
빌딩 앞 도로와 일대에는 군용 트럭과 바리케이드가 빙 둘러져 있었다.
군 장교들의 고함, 바쁘게 주위를 통제하는 군경, 그리고 어느새 벌떼처럼 달려든 BJ들까지.
한두 번 봐온 광경이 아니었지만, 여전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혜성은 사람들을 밀치고 바리케이드로 접근했다.
“죄송합니다만 민간인은……”
경찰이 짜증을 내려다가 멈칫했다. 혜성이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은 것이다.
“이, 이혜성!”
경찰은 자기도 모르게 크게 외쳤다. 혜성이 급히 검지를 입가로 가져갔지만 늦었다.
“뭐? 이혜성?”
“떴다! 이혜성이다!”
“근데 이혜성이 여긴 왜 온 거야?”
주위의 BJ들이 함성처럼 외치며 몰려들었다.
혜성은 쓰게 웃으며 바리케이드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등 뒤는 아수라장.
한발 늦게 도착한 BJ들, 그리고 통제선을 지키려는 군경들 사이에 한바탕 몸싸움이 일었다.
빌딩 앞, 직경 3m가량의 보라색 구체가 둥둥 떠 있었다. 몬스터와 인간의 세계를 잇는 웜홀이었다.
“여기 책임자는 누구……”
혜성이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려는 찰나였다.
“CIC 초승달 팀장 박훈이다.”
검은 가죽 갑옷을 입은 사내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깡마르지만 단단한 외모였다.
그 뒤에는 마찬가지로 특수 갑옷을 입은 대원 4명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NSA 이혜성입니다.”
혜성은 손을 맞잡고 인사하며 CIC의 요원들을 슬쩍 살폈다.
장검을 든 걸 보니 박훈이 물리 딜러. 그 뒤의 대원들은 각각 탱커, 마법 딜러, 버퍼, 힐러인 것 같았다.
던전용 고글을 비롯한 특수 장비만 아니었다면,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중세의 용사들이었다.
“조금 전에 방송에서 봤습니다, 이 대협.”
박훈은 혜성의 뒤에 서 있던 한수호를 흘낏 쳐다봤다. 비아냥이었다. 키킥, 뒤에 있던 대원들도 고개를 숙이고 실소를 터뜨렸다.
“거 초면에 농담이 좀……”
막내가 발끈하며 나서려는 찰나, 혜성이 오른손을 슬쩍 들어서 막았다.
NSA와 CIC.
게이트와 던전의 몬스터에 맞서 대한민국을 지키는 양대 축이자 라이벌.
특수 부대에 뿌리를 둔 NSA는 주로 게이트와 대외 임무를 맡았고, 정보국에 뿌리를 둔 CIC는 던전과 각종 비밀 임무를 맡았다.
전투 방식도 달랐다. NSA가 각개전투 스타일이라면, CIC는 상대적으로 포메이션과 팀워크를 중시했다.
이론적으로 두 기관은 부딪칠 일이 없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가령 블랙의 경우에도 서로 자신들이 수사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이었다.
“여긴 CIC가 처리하겠습니다. NSA는 던전이 처음일 테니, 옆에서 구경이나 하십시오.”
박훈은 막내를 한 차례 노려본 뒤 차갑게 몸을 돌렸다.
“개새끼들.”
막내가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뭐 인마?”
탱커 같은 놈이 발끈했다. 박훈이 슬쩍 눈짓하자 CIC 놈들은 가래침을 뱉고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참아. 여긴 우리 관할이 아니잖아.”
혜성도 팔짱을 끼고 가만히 놈들을 지켜봤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CIC 요원들은 던전 진입을 앞둔 탓에 분주했다. 안경을 쓴 버퍼가 특수 태블릿을 꺼내 웜홀의 파장을 재확인했다.
“자료대로입니다. B급 던전. 쌍두 살모사의 신호가 강하게 감지되고 있습니다. 고만고만한 작은 기운이 많은 것으로 보아, 놈이 상당히 많은 새끼를 거느린 것 같습니다. 지형은……”
버퍼가 던전에 대해 빠르게 설명했다.
박훈과 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한편, 각자의 무기를 점검했다.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난 듯 아주 능숙한 솜씨로.
준비 완료.
“가자! 사냥할 시간이다.”
박훈과 CIC 대원들은 차례대로 웜홀 안으로 사라졌다.
***
“역시 우리도 나서야 했나?”
혜성은 웜홀을 응시하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웜홀 너머, 몬스터들의 괴성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좋습니다.”
한수호가 들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해야 B급 던전이에요. CIC 애들한테 맡기자고요. 그리고 잊었어요? 근신 중인 거.”
막내가 혜성의 팔을 잡으며 초를 쳤다.
“그런가? 하긴, 던전은 아카데미 때 실습 이후로 간 적이 없으니까.”
혜성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수호도 대번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일단 대기하면서……”
혜성이 막 몸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긴급! 큰일 났습니다!”
누군가가 호들갑을 떨며 달려왔다. 사색이 된 얼굴로. 군 통제의 책임자급인 중령이었다.
“무슨 문제입니까?”
혜성도 덩달아 표정이 굳어졌다.
“혹시 회색 살쾡이라는 길드를 아십니까?”
“회색 살쾡이? 그런 길드도 있었나?”
혜성은 막내를 돌아봤다. 막내도 처음 듣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주로 경기도 쪽에서 활동하는 무허가 길드라고 합니다. 그런데 놈들이 백도어를 파고 던전에 먼저 들어갔습니다. A급 둘에, B급 여섯입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두 시간 전입니다. 저희가 백도어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는 그들이 이미 진입한 뒤였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연락이 두절됐습니다.”
“씨발.”
혜성은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던전 근처에 백도어를 파고 불법으로 잠입한다. 돈이 제법 되는 던전에서 종종 발생하는 일이었다.
특히 쌍두 살모사는 가죽이 질기고 단단해서 암시장에서 인기가 높았다.
“어쩌죠?”
중령은 난감한 표정으로 혜성의 눈치만 살폈다.
아무리 훈련받은 군인이라 해도 비 능력자. 게이트와 던전 앞에서는 민간인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A급 능력자들이 B급 게이트에 잠입했는데 연락이 끊겼다?”
혜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생성 자체가 조금 이상한 던전. 단순한 B급이 아닌 것 같았다.
“일단 CIC 본부에……”
혜성은 중령에게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뭔가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변종 던전. 그곳에 진입한 길드와 요원들의 위기. 이들을 구출하기 위한 고군분투.
그리고 마지막에 장렬한 순직까지. 일련의 과정들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그는 막내와 한수호를 곁눈질했다. 둘은 던전 입구를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 긴장한 것 같았지만, 몸을 떨지는 않았다.
‘문제는 매번 쓸데없이 감동해서 나서는 녀석인데.’
그의 시선이 막내에게 잠깐 머물렀다. 고마워해야 하나, 원망해야 하나. 참 애매한 녀석이었다.
던전은 광활한 공간. 적당한 기회를 봐서 막내와 한수호를 떼어놓아야 했다.
막내도 혜성과 눈이 마주쳤다.
“왜, 왜요?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녀석은 불안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왜긴. 네가 생각하는 그거지. 알면서 왜 물어봐?”
혜성은 짐짓 짓궂게 웃은 뒤, 중령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색이 된 중령과 울상이 된 막내. 둘이 묘한 대조를 이뤘다.
“던전용 장비 있습니까?”
“네, 예비용이 있습니다.”
중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상병을 시켜 백팩과 갑옷, 무기 등을 가져왔다.
“빠진 거 없는지 잘 확인해 봐.”
혜성은 백팩을 열어봤다.
공간 마법이 걸린 특수 백팩이었다. 겉보기와 달리 용량이 200L가 넘었다.
간단한 야영 도구, 비상식량과 약품, 무기, 기타 장비. 모두 이상 없었다. 게다가 그는 검은 정장의 형태로 된 암흑의 수호자도 입고 있었다.
“지옥 염화하고 기폭 장치도 잘 확인하라고. 그거 잘못 터지면 반경 100m는 초토화되니까.”
혜성은 직경 5cm의 기폭 장치를 꺼내 보이며 주의를 줬다.
지옥 염화.
유사시를 대비한 대 던전용 특수 폭탄. 물론 최상의 결과는 보스를 죽이고 던전의 핵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지옥 염화로 핵을 제거, 던전을 강제로 닫아야 했다.
“오케이.”
혜성은 백팩을 오른쪽 어깨에 멨다.
“CIC에 지원 요청하고 우린 여기서 기다리자고요.”
막내가 똥 씹은 표정이 돼 사정 조로 말했다.
혜성은 녀석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한수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수호는 신이 나서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정 안 되면 상부에 구두 보고라도……”
“지금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혜성은 막내의 말을 단호히 잘랐다.
“대협의 말씀이 옳습니다. 조국을 수호하는 데 소속이 어디 있습니까?”
한수호도 의젓하게 거들고 나섰다.
“형 하나도 벅찼는데…… 이젠 꼬맹이까지 둘인가? 역시 이 형하고 엮이는 게 아니었어.”
결국 막내도 투덜거리며 자신의 장비를 챙겼다.
“진입!”
혜성이 짧게 말하며 먼저 웜홀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막내와 한수호가 그를 따라 사라졌다.
이때, 혜성은 웜홀 너머의 세계에 첫발을 내디디며 문득 생각했다.
‘내가 돌아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던전이 생성됐다. 그것도 도심 한복판, 알려지지 않은 변종이. 설마…… 누가 날 노리고 인위적으로 만든 건 아니겠지?’
문득 블랙이 떠올랐다.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었지만, 마냥 터무니없는 추측만은 아닐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