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7. 우상 (2)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
‘아, 정말 어색하네.’
혜성은 백미러로 뒷자리에 앉은 한수호를 곁눈질했다.
녀석은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이었다. 작은 백팩을 꼭 끌어안고, 부동자세로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운전석의 막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야. 너……”
막내가 입을 열자마자 녀석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한수호! 인식 번호……”
관등 성명을 하듯 자동으로 인식 번호를 외치려 했다.
“그만해라.”
막내는 급히 녀석의 말을 잘랐다. 조금만 더하면 NSA의 복무헌장 10조도 전부 외울 기세였다.
“알겠습니다!”
녀석은 혜성을 힐끔 쳐다본 뒤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이고, 골치야. 몇 가지 주의사항이 있다.”
혜성은 손가락으로 양 관자놀이를 지그시 문지르며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첫째, 대협이니 뭐니 이상한 말 쓰지 마라. 밖에서는 그냥 형이나 선배라고 불러.”
“네? 제가 어떻게 감히……”
한수호는 혜성을 쳐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막내야, 차 돌릴까?”
혜성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선…… 배님.”
그제야 녀석은 쭈뼛거리며 말했다. 여전히 어색했지만 한결 나아졌다.
“좋아. 둘째, 가급적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마라.”
“아. 요원은 신변노출을 하면 안 된다. 이 말씀입니까?”
“뭐, 비슷하지.”
혜성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한수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팩에서 뭔가를 꺼냈다. 태블릿이었다.
‘또 뭐 하는 거야?’
혜성은 뒤를 힐끔 곁눈질했다. 녀석은 조금 전 혜성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적고 있었다.
“넌 평범한 친구 없냐?”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없습니다.”
“그럼 학교는?”
“일반 학교는 다닌 적이 없습니다.”
“아, 그래서 말투나 행동이……”
그제야 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취미는?”
“없습니다.”
“하다못해 게임도 안 해? 그럼 시간 있을 때 뭐하냐?”
“수련합니다.”
한수호의 대답은 군인처럼 짧고 절도 있었다. 앳된 얼굴과 군인 같은 말투. 적응하기 어려웠다.
“부모님은 뭐하셔?”
이번엔 막내가 물었다. 녀석은 잠깐 멈칫했다.
“어릴 때 게이트에 휘말려 돌아가셨습니다.”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혜성과 막내는 내심 아차 싶었다. 녀석의 정보를 대충 보고 넘긴 것이다.
“미안하다.”
혜성이 대신 사과했다.
“오래전 일입니다. 괜찮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침묵 속에서 한참을 달리다 저녁 무렵에야 서울에 접어들었다.
“뭐 먹고 싶어?”
혜성은 대로변의 식당들을 살펴보며 물었다. 솔직히 그는 저녁 생각이 없었다. 막내도 장시간 운전한 탓에 피곤해 보였다.
“저……”
“뭔데?”
“피자하고 콜라를 먹고 싶습니다.”
한수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래? 이건 좀 애답네.”
혜성은 피식 웃었다.
마침 우측에 프랜차이즈 피자집이 보였다. 막내는 그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사람이 많았지만, 다행히 구석에 자리가 있었다.
역시 애였다. 피자집의 메뉴판을 보는 순간 녀석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뭐, 매일 맛없는 아카데미의 음식만 먹었겠지.’
혜성은 얇은 피자와 스파게티, 샐러드, 탄산음료 등을 주문했다.
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혜성은 피자와 음료를 녀석의 앞으로 밀었다. 대신 샐러드만 조금 깨작거렸다. 입맛이 없었다.
“왜 안 드십……?”
한수호는 혜성을 빤히 쳐다보다가 곧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뭐가?”
“식단 조절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신 거 아닙니까? 기름진 음식은 피하라. 말보다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시다니……”
또 감동. 녀석은 샐러드를 먹으며 태블릿을 꺼내 메모했다.
“하아, 이놈 갈 때까진 집에서 라면도 못 먹겠네요.”
막내가 들릴 듯 말 듯 작게 투덜거렸다.
혜성도 재차 한숨을 내뱉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나가자.”
“어디 가십니까?”
“가보면 알아.”
혜성은 음식을 밀어두고 녀석의 손을 잡아끌었다.
***
혜성이 한수호를 데려간 곳은 근처의 VR 게임방이었다. 청소년은 청소년답게. 게임이라도 같이 할 생각이었다.
“여긴 왜……?”
한수호는 처음에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몬스터 잡이]라는 게임 타이틀과 그 앞에 놓인 모형 총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 벌써 훈련입니까?”
“뭐?”
이번엔 혜성이 당황했다.
“게임은 처음입니다만, VR 훈련은 자신 있습니다.”
녀석은 총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곧 준비를 마쳤다.
더 놀라운 건 그다음이었다. 분명 녀석은 게임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참 후 녀석이 총을 내려놓았을 때, 최고 스코어는 녀석의 이니셜로 바뀌어 있었다.
“이 새끼, 어리바리한 척하는 거 아니에요?”
막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혜성의 귀에 속삭였다.
“목마른 데 뭐 좀 마시자.”
혜성은 녀석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였다. 윙, 그의 스마트워치와 핸드폰이 작게 진동했다. 주위에 있던 다른 이들도 화들짝 놀라며 핸드폰을 꺼냈다.
[사당역 인근 B급 게이트 생성]
긴급 재난경보였다. 장소는 그들이 있는 곳에서 100m쯤 떨어진 건물의 옥상. 등급은 낮지만 급속 게이트였다. 최대한 신속히 가까운 벙커로 대피하라는 단서가 붙었다.
한수호는 감탄한 표정으로 혜성을 쳐다봤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설마 게이트가 나타날 것까지 예측하신 겁니까?”
“뭐?”
혜성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녀석은 주먹을 불끈 움켜쥔 뒤, 결연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혜성이 순직을 각오했을 때 보이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연습은 실전같이. 대협…… 아니, 선배님의 뜻에 따라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
“하아, 정말 미치겠네.”
혜성은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어느 건물의 옥상이었다. 5m쯤 위에는 검은색 게이트가 둥둥 떠 있었다.
게이트 근처에는 방송국의 드론 수십 대가 떠 있었다. 냄새를 맡은 BJ들도 근처의 다른 건물 옥상에 숨어 상황을 중계했다.
“정말 혜성 씨였어?”
곧이어 NSA의 지원팀이 도착했다. 전에 같이 근무했던 과장과 직원들이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팀원들은 하던 대로 전투 준비를 했다. 메인 헌터는 꼬맹이.
혜성과 다른 요원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대기했다. 물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인근을 몇 겹으로 포위했지만.
“쟤야? 그 천재 꼬맹이?”
과장은 옥상 중앙을 힐끔 곁눈질했다. 한수호가 주먹을 쥔 채 게이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혜성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잡담은 여기까지였다.
끄으으으, 게이트에서 괴상한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숫자는 하나인 것 같았지만, 거친 야성미가 느껴졌다.
쿵, 게이트에서 뭔가가 낙하했다.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녀석을 중심으로 바닥에 실금이 갔다.
검은 늑대.
키 2m, 몸무게 150kg의 인간형 B급 몬스터. 특별한 스킬은 없지만 거칠면서도 빠른 공격이 위협적인 놈이었다. 안 그래도 작은 한수호는 녀석의 앞에 서자 더 작아 보였다.
“검은 늑대? 첫 실전치곤 좀 어려울 텐데요.”
막내가 난감한 표정으로 혜성에게 속삭였다.
“일단 지켜보자. 레드 스콜피온도 간단히 때려잡는 놈이니까.”
혜성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덤벼라.”
한수호가 녀석에게 어그로 아이템을 던졌다.
펑, 붉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라 녀석을 자극했다.
“크아아아!”
검은 늑대는 한 차례 길게 포효한 뒤 한수호를 향해 돌진했다.
한수호는 뒤로 살짝 물러났다. 몸놀림이 가벼웠다. 검은 늑대는 그를 집요하게 따라가며 때리고 할퀴었다.
“뭔가 이상한데? 긴장했나?”
얼마 후, 막내는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한수호는 공격 한 번 못 하고 계속 피하기만 했다. 하지만 전부 피할 수는 없었다. 놈의 손톱이 한수호의 몸 곳곳을 할퀴었다.
“저러다가 큰 사고라도 나겠는데요? 제가 나설까요?”
막내가 혜성의 옆구리를 찔렀다.
“글쎄. 좀 더 지켜보자.”
혜성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이 터졌다.
쾅, 검은 늑대의 주먹이 한수호의 가슴을 강타했다. 한수호는 양손을 교차시켜 막았지만 멀리 튕겨 나갔다.
다행히 혜성과 막내가 서 있는 방향이었다. 막내가 재빨리 손을 뻗어 한수호를 받았다.
“그만해. 실전은 연습과 달라.”
혜성이 녀석을 옆으로 밀치며 앞으로 나서려는 찰나, 한수호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아닙니다. 선배님을 따라 해본 건데…… 역시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이제 다 끝났습니다.”
한수호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뭐?”
“선배님께서도 초반에 맞고 시작하지 않으셨습니까? 적을 파악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놈의 패턴을 파악하기 위해 좀 맞았습니다.”
한수호는 다시 검은 늑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혜성이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크아아!”
검은 늑대도 녀석을 향해 덤벼들며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흥!”
한수호는 검은 늑대의 팔목을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히 쳐냈다.
검은 늑대가 오른발로 그를 걷어차려 했다. 그는 왼발로 검은 늑대의 무릎을 밀쳐 차단했다. 상대 공격의 예측과 사전 차단. 혜성의 수법이었다.
“저놈 뭐야? 천재야?”
“형보다 나은 거 같은데요?”
혜성과 막내는 물론, 주위의 요원들은 모두 입을 쩍 벌렸다.
쾅, 이윽고 한수호의 주먹이 검은 늑대의 목젖에 꽂혔다. 컥컥, 검은 늑대는 숨을 헐떡이며 물러섰다.
그 순간, 한수호의 주먹이 속사포처럼 놈의 급소 곳곳을 강타했다. 퍼퍼퍼퍽, 마치 산탄총이 터지는 것 같았다.
상황 종료.
쿵, 검은 늑대는 곧 큰 대자로 뻗었다.
그제야 한수호는 손을 털며 주위를 둘러봤다. 조용했다. 다들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렸다. 녀석이 혜성을 향해 묵례한 다음에야 함성이 터졌다.
숨어 있던 BJ들이 요원들의 포위를 뚫고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이름이 뭡니까?
- NSA 어디 소속이시죠?
- 방금 대체 뭘 하신 겁니까? 어디서 그런 걸 배웠습니까?
한수호를 향해 플래시와 질문이 쏟아졌다.
“별거 아닙니다. 사실 방금 제가 보여드린 건 제 스승님의 특기입니다.”
녀석은 대답 대신 어딘가를 응시했다.
카메라들은 자연스럽게 그가 응시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모자를 푹 눌러 쓴 혜성이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제 스승님은…… 이 대협, 이혜성 님이십니다.”
한수호는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 역시 이혜성. 언제 제자를 키웠대?
- 본인도 엄청난데 이젠 그 제자까지?
- 이러다가 나중에 이혜성과 아이들로 군단까지 나오는 거 아냐?
기자들, BJ들,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네티즌까지 모두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야, 인마. 그만해.’
혜성은 억지로 웃으며 모자를 벗었다.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목소리가 더 커졌다.
“아,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이지?”
막내는 그 모습을 차마 끝까지 못 보고 고개를 돌렸다.
***
강남 S 클럽 VIP룸.
흥청거리는 EDM, 비명 같은 함성이 방음벽을 뚫고 희미하게 들렸다.
룸 중앙에는 두 명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왼쪽은 편한 캐주얼. 반면 오른쪽은 세미 정장에 짙은 선글라스를 써서 마치 정부 요원 같았다.
“요청한 자료다.”
요원 같은 사내가 두툼한 서류 봉투를 건넸다.
“벌써? 빠르군.”
다른 사내는 웃으며 봉투 안의 자료를 슬쩍 확인했다. 이혜성의 사진과 신상 정보가 언뜻 보였다.
“수고했군. 그런데 언제까지 그 얼굴로 다닐 거야? NSA 행세하는 게 그렇게 재밌나?”
그는 서류 봉투를 백팩에 넣으며 피식 웃었다.
“이중 스파이. 재밌잖아.”
요원 같은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은 뒤 되물었다.
“왜 하필 이혜성이야? 이혜성에게 덤볐다가 골로 간 게 한둘이 아닌데 말이야.”
요원 같은 사내는 다리를 꼬고 반쯤 누우며 되물었다.
“내 위에 계신 분이 화가 아주 단단히 나셨거든.”
“위에 계신 분?”
“그래. 뇌전의 광견이 놈에게 당한 건 그렇다 쳐. 하지만 이번에 인사동까지 와서 깽판을 친 건 용서가 안 되지. 인사동이 폐쇄되는 바람에 ‘그분’의 피해가 꽤 크거든. 그렇다고 너희처럼 깽판친 걸 돈으로 물어준 것도 아니고 말이야.”
캐주얼의 사내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요원 같은 사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말하는 ‘그분’이 누군지 대충 짐작됐다. 지하 마켓의 거물.
“구체적으로 어떻게 놈을 공략할 생각이지?”
“지금까지 놈의 패턴을 분석해 봤지. 이혜성 본인도 까다롭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훼방을 놓는 놈들이 있더군. 일단 놈의 주위부터 청소할 거야.”
캐주얼의 사내는 소리 죽여 짧게 설명했다.
아, 요원 같은 사내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또라이. 이혜성 같은 놈이 설마 또 있겠어?”
캐주얼의 사내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