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36화 (36/150)

# 036. 우상 (1)

잠실역 근처 N 오피스텔.

혜성을 중심으로 장진우와 막내가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조용했다. 다들 노트북과 연결된 벽면의 대형 TV만 바라봤다.

NSA의 특수 감옥.

“마스……”

홀쭉이가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 한 사내가 손을 뻗어 섬광을 쏘았다.

쿵, 홀쭉이는 입을 뻥긋거리던 자세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가슴에 구멍이 휑하게 뚫린 채. 사내는 CCTV를 힐끔 쳐다본 뒤 유유히 감옥을 빠져나갔다.

“아직 외부에 발표하진 않았네. 아니, 발표할 수 없었지.”

장진우가 무거운 신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막내는 노트북을 자기 쪽으로 돌려 키보드를 두드렸다.

뚱뚱이와 쥐방울도 비슷했다. 가슴에 큰 구멍이 뚫려 죽어 있었다. 이어서 CCTV에 비친 사내의 모습이 확대됐다. 40대 중반. 두툼한 뿔테 안경을 쓴 평범한 인상이었다.

“형도 알 거예요. 보안실 윤진성 실장이에요.”

막내는 화면을 바꿨다.

전원주택. 머리가 잘린 윤진성의 참혹한 시체가 나왔다.

“사망 추정 시간은 홀쭉이가 죽기 이틀 전. 약물이나 반항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지인에게 당한 것 같아요.”

“그럼 최면술사들을 죽인 건 누구야? 유령이냐?”

혜성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최면술사에게 접근하려면 홍채, 지문 등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거든요. 전부 틀림없는 윤 실장님이었어요.”

막내는 보안 절차를 간단히 설명했다. 최상위 등급. 윤진성 본인이 아니고선 절대 뚫을 수 없었다.

“블랙과의 연결 고리는 전부 끊어진 건가?”

혜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속단은 일러요. 제가 재미있는 걸 가져왔거든요. 다만 이건 위에도 보고를 안 한 건데.”

막내는 장진우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걱정하지 말게. 난 감사실 누구처럼 꽉 막힌 사람은 아니니까.”

장진우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는 백팩에서 은색 케이스를 꺼냈다. 케이스 안에는 던전용 특수 GPS 겸 기록 장치, 일명 하늘의 눈이 들어 있었다. 차성진과의 전투에서 혜성이 바꿔치기했던 아이템이었다.

“전 그날 마켓의 보안 통제실에 있었거든요. 혹시나 해서 거기에 있던 기록 장치를 하나 슬쩍했죠.”

막내는 아이템을 특수 소켓에 끼우고 노트북에 연결했다.

몇 단계 변환 작업을 거치자 진법 내부의 영상이 나왔다. 혜성은 패스. 막내는 홀쭉이의 영상을 TV에 띄웠다. 홀쭉이는 가부좌를 틀고 진법의 환상에 저항하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막내는 다시 영상을 변환했다. 잠시 후, 홀쭉이의 앞에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게 바로 홀쭉이가 두려워하던 거예요.”

확대, 선명도 향상, 이미지 변환 등의 작업을 거치자 그림자가 뚜렷해졌다.

낯선 얼굴. 회색 개량 한복을 입은 노인이었다. 언뜻 보면 동네 복덕방 할아버지 같았다.

“이 자가 마스터?”

혜성은 홀쭉이가 죽기 직전 남긴 말을 떠올렸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이 노인이 마스터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동시에 의식이 없는 동생이 아른거리며 새삼 분노가 치밀었다.

“그런데 좀 막막하군. 이자를 어떻게 잡지?”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이 이상 파려면 1급 데이터베이스 접근 권한이 필요해요.”

막내는 다시 난감한 표정으로 장진우를 쳐다봤다. 사실 그가 장진우의 앞에서 머뭇거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오케이. 여기서부턴 내가 맡지.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장진우는 핸드폰을 꺼내 노인의 사진을 찍었다.

“전 뭘 하면 됩니까?”

혜성도 핸드폰을 꺼내 노인의 사진을 찍으며 물었다. 마음이 급했다. 지금도 동생은 병실에서 호흡기에 의지하고 있었다.

“자넨 1주일간 근신이야. 머리도 식힐 겸 아카데미 좀 다녀오게.”

장진우는 대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카데미요?”

“그래. 굉장한 녀석이 있나 봐. 제2의 유수혁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더군. 우리하고 CIC, 백호 길드 등이 녀석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물밑에서 접촉 중인데, 녀석이 우리 쪽으로 오는 조건으로 자네를 걸었네.”

“네? 보모입니까? 하지만……”

혜성은 말끝을 흐렸다.

장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히 말을 잘랐다.

“자넨 그동안 너무 쉼 없이 달려왔어. 자네 친구가 잘 치료했지만, 부상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거든. 그러니 이번 기회에 일주일만 몸을 추스르게.”

“저도 같이 근신이라고요. 이번에는 제가 옆에서 24시간 붙어 있을 거예요. 절대 무모한 짓 하면 안 된다고요.”

막내도 혜성의 팔에 찰싹 달라붙어 말렸다.

“알겠습니다.”

결국 혜성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SJ 기획 소회의실.

“강지영의 일은 잘 처리했지?”

박무영은 서류를 훑어보며 물었다. 청문회의 사후처리 관한 보고서였다.

“이혜성이 우연히 만난 지하 브로커라고 했습니다.”

한수은은 다른 보고서를 내밀었다. 신분 세탁과 꼬리 자르기는 그들의 특기. 강지영과 그 배후까지 불똥이 튈 리는 없었다.

“수고했군. 그나저나 블랙도 점점 대범해지는군. 윤진성은 우리에게 하는 경고인가?”

이윽고 박무영은 쓰게 웃으며 다른 보고서를 열었다. 윤진성에 관한 자료였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미 점조직 형태로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한수은은 보고서를 힐끔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군. 블랙의 활동은 이제 시작. 내 예상이 맞는다면, 윤진성을 가장한 놈은 곧 혜성의 앞에 나타날 거야.”

박무영은 윤진성의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파주시 남쪽 야산.

렌터카 한 대가 털털거리며 비포장도로를 달려왔다. 차는 도로 왼쪽의 공터에서 멈췄다. 곧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 둘이 기지개를 켜며 차에서 내렸다. 혜성과 막내였다.

“아이고 허리야.”

막내 녀석은 허리를 두드리며 짐짓 엄살을 부렸다. 오는 길에 차가 막혀 좀 피곤했다.

“여기도 참 오랜만이군.”

혜성은 감회에 젖은 눈으로 산 중앙을 바라봤다.

큰 건물 2동이 배치된 기숙학교가 보였다. 이제 막 각성을 마친 아이들이 기초를 다지는 곳. 일명 아카데미였다.

솔직히 좋은 기억은 없었다. C급 각성자의 아카데미 시절이야 뻔했으니까. 그나마 태호를 만난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 만약 태호가 없었다면 정부의 전투 보조요원도 못 됐을 것이다.

“왜요? 오랜만에 오니까 옛날 생각이 나요?”

막내가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옛날 생각은 무슨.”

혜성은 무관심한 척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둘은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가까이서 보니 보안이 제법 삼엄했다. 높은 담, 고전압 철조망, 수십 대의 CCTV가 설치돼 있었다.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검은 정장을 입은 경비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NSA 이혜성입니다.”

혜성은 신분증을 꺼내 보여줬다. 막내도 지갑을 열어 내밀었다.

“아이고, 몰라봬 죄송합니다.”

경비는 급히 태도를 바꾸며 둘을 안내했다. 장진우가 미리 연락을 준 모양이었다.

5분 후. 누군가가 호들갑을 떨며 본관으로 마중 나왔다.

“구상철입니다.”

아카데미의 책임자가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혜성과 막내도 정중히 상대의 손을 맞잡았다.

구상철.

지금은 대머리에 배불뚝이 아저씨지만, 한때는 신중하면서도 꼼꼼한 요원으로 명성이 높았다. 다만 작전 도중 큰 부상을 입었고,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었다.

“한수호라고. 이제 열여섯인데 대단합니다. 원거리, 근거리, 딜러, 탱커를 따지지 않는 전천후 수(水) 속성 각성. 현재는 A급이지만, 잠재력은 최대 SS급입니다.”

구상철은 침을 튀기며 한수호에 대해 늘어놓았다.

‘천재 특유의 거만함이나 자만도 없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올곧은 아이다. 분명 혜성 씨도 그 아이가 마음에 들 거다.’ 등등 찬사 일색이었다.

이윽고 둘은 본관 옆의 실내 훈련장에 들어갔다. 시커먼 웜홀이 둥둥 떠 있는 가상의 던전이었다. 던전 옆에는 유리 칸막이로 된 통제실이 있었다.

“가시죠. 학생은 던전 안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구상철은 그를 통제실로 안내했다.

“열여섯짜리가 가상 던전 훈련을 받는다고?”

“가상 던전은 열아홉부터 시작하는 거 아니었어요? 3년을 월반한 건가?”

혜성과 막내는 웜홀을 힐끔 돌아보며 따라갔다.

“백 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죠. 어떤 학생인지 한번 보시죠.”

구상철은 묘한 웃음을 흘리며 기계를 조작했다.

윙, 낮은 기계음과 함께 가상의 웜홀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이어서 통제실 우측의 대형 모니터에 웜홀의 상황이 나타났다.

넓은 호수 한가운데.

검은색 체육복을 입은 남자애가 물 위에 서 있었다. 피부가 하얗고 키가 작은 탓에 실제보다 어려 보였다.

“저 애가 한수호입니까?”

혜성은 남자애의 손을 주목하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상대는 레드 스콜피온으로 설정했습니다. B~C급입니다만, 물속을 재빠르게 이동하기 때문에 좀 골치 아픈 놈이죠.”

구상철도 팔짱을 낀 채 모니터를 주목했다.

끼에에엑, 소름 끼치는 괴성과 함께 전투가 시작됐다. 수면 아래, 뭔가가 빠르게 움직이며 녀석의 주위를 맴돌았다. 길이는 약 1m. 숫자는 열 마리 이상이었다. 놈들의 살기가 모니터 밖까지 느껴졌지만, 한수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괴물들이 일제히 수면 위로 튀어 올라 한수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수호는 천장의 카메라를 힐끔 쳐다본 뒤, 제자리에서 오른발을 살짝 굴렀다. 퍼퍼펑, 그의 주위에서 폭발과 함께 물기둥이 솟았다.

전갈들이 독침을 쏘려는 찰나, 그가 다시 오른발을 굴렀다. 퍼퍽, 물기둥이 직경 3cm의 구슬로 변해 괴물들을 향해 날아갔다. 마치 물방울로 된 산탄총처럼.

“꾸에에엑!”

쾅, 놈들은 요란한 물보라를 만들며 도로 물속으로 들어갔다. 전신에 구멍이 숭숭 뚫린 채.

“허!”

“와!”

혜성과 막내는 입을 쩍 벌렸다.

물론 막내도 레드 스콜피온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방금 한수호가 보여준 것처럼 단숨에, 그리고 이렇게 깔끔하게 제압할 자신은 없었다.

“보셨죠? 괜히 조기 졸업 얘기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지금 당장 실전에 배속돼도 충분히 제 몫을 할 겁니다. 제 몫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에이스급이 될 테죠.”

구상철이 게이트를 조작하며 말했다.

웜홀의 색이 옅어졌다. 파스스, 던전의 호수와 몬스터들도 바람에 날리듯 서서히 사라졌다. 잠시 후, 던전이 있던 자리에는 한수호만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그들은 통제실 밖으로 나갔다. 혜성의 얼굴을 본 순간, 한수호는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졌다.

“이, 이, 이……”

한수호는 혜성을 응시하며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혜성이다.”

혜성이 웃으며 먼저 악수를 청했다.

한수호는 혜성의 손을 잡지 않았다. 아니, 감히 잡을 수 없었다.

“이 대협을 뵙습니다!”

녀석은 허리를 구십 도로 굽히며 큰소리로 외쳤다. 구상철이 없었다면 오체투지라도 할 기세였다.

‘이 대협?’

혜성은 순간적으로 닭살이 돋았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어서 한수호는 허리를 펴며 오른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힘차게 쳤다.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해……!”

이젠 혜성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구호였다.

혜성과 막내는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서울을 떠나기 전, 장진우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 아참. 그 애는 정신세계가 좀 독특해. 애가 어릴 때 혼자 중국에 가서 유학한 적이 있는데, 그 때문인 거 같기도 하고 말이야. 별명이 ‘흑염룡’이니까,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하하하.

중2병, 흑염룡.

그때는 농담으로 여겼는데, 인제 보니 농담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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