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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순직이 힘들다-35화 (35/150)

# 035. 밤안개 (2)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혜성과 박무영은 대화를 잠깐 멈추고 문가를 돌아봤다. 한수은이 꾸벅 묵례하고 들어왔다.

그녀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혜성에게 다가왔다. 혜성이 움찔하며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녀의 손은 휘어지듯 움직여 그의 오른 손목을 낚아챘다. 마치 뱀이 교묘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이건 또 무슨 수법이지?’

혜성이 당황하는 찰나,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의 몸을 5분 전으로 돌리려는 거니까. 힐링 팩터만으로는 부족하거든요.”

그녀의 손을 통해 따뜻한 기운이 전해졌다. 태호나 다른 힐러의 솜씨와 조금 달랐다. 태엽을 거꾸로 감는 느낌이었다.

‘내 몸의 시계를 뒤로 돌린다고? 그게 치료 아냐?’

혜성은 손을 빼려다가 눈을 감고 그녀의 기운을 받아들였다.

“치료하고 달라요. 어떻게 보면 당신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죠. 이게 어떤 의미인지 조만간 알게 될 거예요.”

그녀가 처음보다 부드러워진 어조로 덧붙였다.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아무튼 기분이 좋았다. 따뜻한 기운이 몸 구석구석 퍼져나가는 느낌. 곧 부기와 멍이 빠지고 혈색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박무영이 혜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알겠나? 내가 자네에게 뭘 말하고 싶었는지. 솔직히 객관적인 능력 수치는 자네가 나보다 위일 걸세.”

“제 약점, 혹은 공략법 말입니까?”

“그래. 자네는 분명 강하네. 재능도 있고, 잠재력도 풍부하지. 하지만 너무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어. 뭐, 어느 정도 수준까진 그게 통하겠지. 하지만 앞으로 자네가 상대할 진짜 강자들에겐 그것만으로 부족할 걸세.”

박무영은 잠깐 말을 멈췄다.

- 능력자의 등급은 절대적인 게 아니다.

혜성은 아카데미에서 제일 처음에 배운 말을 떠올렸다. 등급은 어디까지나 참고 수치일 뿐, 상황에 따라 낮은 등급이 높은 등급을 잡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지금 박무영이 하는 말도 바로 그것이었다.

“능력자끼리의 싸움은 산수처럼 등급의 고하로 승패가 결정되지 않네. 자네도 알겠지. 화(火) 대 빙(氷), 수(水) 대 뇌(雷), 풍(風) 대 토(土), 그리고 암(暗) 대 성(晟) 등의 8대 속성은 상성을 지닌다는 걸. 그리고 몬스터들도 저마다 약점이 하나씩 있지.”

“상대의 속성과 약점을 이용하라. 그 말씀입니까?”

혜성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2차 각성 이후 잊고 있었던 기초 상식이었다.

“그렇지. 상성이나 약점을 이용하면 자신보다 강한 등급의 적도 얼마든지 쓰러뜨릴 수 있네. 방금 내가 자네에게 했던 것처럼.”

박무영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 실장님께 졌다고 부끄러워하거나 화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자랑해야 할 겁니다. 박 실장님이 직접 나선 건 그만큼 혜성 씨를 인정한다는 뜻이니까요. 게다가 유수혁보다 오래 버텼고 말입니다.”

한수은이 그의 손목에서 손을 떼며 덧붙였다.

“유수혁이요? 유수혁도 여기에 왔습니까?”

혜성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유수혁.

대한민국 랭킹 7위이자 자타공인 차세대 에이스였다. 혜성도 한 번쯤 만나고 싶은 상대.

비록 대중적인 인기는 혜성이 높았지만, 순수한 능력은 유수혁이 몇 수는 위라는 게 대다수의 평이었다.

“글쎄요. 그건 상상에 맡기죠.”

한수은은 정확한 대답을 피했다.

“내 자랑이나 하려고 자넬 부른 건 아니네. 진지하게 일 얘기 좀 할까? 자네도 관련이 있는 일이네.”

박무영이 웃음을 거두고 화제를 돌렸다.

혜성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박무영의 입에선 그가 예상했던 이름이 나왔다.

“우리 공동의 적. 블랙에 관한 것일세.”

***

소회의실.

혜성과 박무영은 작은 회의용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한수은이 간단한 다과를 내왔지만, 둘 다 손도 대지 않은 채 서로만 바라봤다.

“자네도 알다시피 게이트와 던전이 출현한 이후, 인류의 적은 이계의 몬스터만이 아니게 됐네. 능력자들에 의한 범죄도 급증하게 됐지. 그 대표적인 게 바로 능력자들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을 꿈꾸는 국제 테러조직, 바로 블랙이네.”

박무영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운을 뗐다.

“NSA와 CIC가 있지만, 솔직히 그들만으로 능력자들의 범죄를 막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네. 특히 블랙은 점조직 형태로 은밀히 움직이며 사회 전반으로 파고들었지. 블랙처럼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놈들과 같은 비밀 조직이 필요한바. 그게 바로 우리, SJ 기획이네.”

혜성은 NSA의 전신인 국정원을 떠올렸다.

국정원이 [세기 문화사]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건 공공연한 비밀. 어떻게 보면 SJ 기획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셈이었다.

“그 때문에 작전 중 사망으로 처리된 겁니까?”

“그렇지. 나뿐만이 아닐세. 자네가 만났던 한 과장을 비롯해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주요 요원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유령들이네.”

박무영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그동안 자넬 면밀히 관찰했네. 대의를 추구하는 정의감. 무모할 정도의 과감한 행동력.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그리고 블랙에 대한 적개심까지. 자네야말로 우리에게 딱 맞는 인재라는 결론에 도달했지.”

박무영은 말을 잠깐 멈추고 혜성을 바라봤다.

“저도 여기에 합류하라는 말씀입니까?”

“그건 아닐세. 자넨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계속 NSA 소속이자 국민 영웅으로 남아야 하네. 공식적으로 우린 만난 적도 없는 거야.”

박무영은 즉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 의외였다.

“그럼 전 뭘 하면 됩니까?”

“블랙은 계속 자넬 노릴 걸세. 최면술사들이 막혔으니 더 집요해지겠지. 그리고 우리가 노리는 건 그 틈. 자네를 역이용해 놈들의 꼬리를 잡고, 나아가 놈들의 뿌리를 뽑아야 하네.”

“흠. 저더러 미끼가 되라는 말씀입니까? 블랙을 끌어내기 위해서?”

혜성은 쓰게 웃으며 되물었다.

“나쁘게 말하면 그렇지. 좋게 말하면 자네가 주연, 우린 뒤에서 자넬 돕는 스태프가 되자는 거고. 우린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없거든.”

박무영은 어깨를 으쓱한 뒤 덧붙였다.

“우린 블랙을 끌어내 줄 사람이 필요하고, 자넨 블랙에 맞설 정보와 조직이 필요하지. 어떤가? 이만하면 제법 잘 어울리는 동맹이 아닌가?”

“동맹이라.”

혜성은 박무영의 말을 곰곰이 되새겼다.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혼자만의 힘으로 블랙에게 복수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블랙을 잡으려면 그들 못지않은 힘과 정보력을 가진 조직이 필요했다. 눈앞에 있는 SJ 기획 같은.

“암흑의 수호자를 주신 것. 그리고 그동안 알게 모르게 저를 도와주신 것. 모두 박 실장님이십니까?”

“그렇네. 자네가 기대대로 성장하는 걸 보는 것도 즐겁더군.”

“감사합니다. 하나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가?”

“이곳의 제일 위에는 누가 있습니까?”

혜성은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분명 박무영은 자신을 ‘실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렇다면 그 위에 몇 명은 더 있다는 뜻이었다.

“그 질문을 왜 안 하나 했지.”

박무영은 피식 웃은 뒤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예상했지만 그래도 놀라운 이름이 언급됐다.

그걸로 충분했다. 사실 혜성도 이곳에 오기 전부터 뜻을 정한 터. 박무영과의 대화는 결정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였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잠시 후, 혜성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부우웅.

가솔린 엔진 특유의 소음이 낮고 규칙적으로 들렸다.

혜성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간은 어느새 자정 무렵. 화려한 빛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피곤하지 않아요?”

운전석에 앉은 한수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한 듯 무성의한 어조였다.

“괜찮습니다.”

혜성은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박무영과 대화가 끝난 뒤, 혜성은 스튜디오에서 광고를 촬영했다. 물론 국가 요원은 수익사업이 불가능한 터. 그가 찍은 건 상이용사들을 돕자는 공익광고였다.

“미안해요. 혜성 씨는 어딜 가든 항상 주목받는 존재거든요. 이렇게 진짜 광고를 찍지 않으면 다른 이들의 의심을 살 거예요.”

“이해합니다.”

“새로운 가면은 며칠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혜성 씨의 얼굴에 맞는 정교한 가면을 만들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앞으로는 강지영 씨가 우리를 대신해 혜성 씨와 접촉할 거예요.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강지영을 통해 요청하세요.”

“감사합니다.”

둘은 사무적이고 형식적인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한수은의 차가운 인상 때문일까? 아직은 그녀와 대화하는 게 조금 불편했다.

다시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혜성이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뭔데요?”

“SJ 기획의 설립 취지는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박 실장님이나 한 과장님의 입장에서 보면, 대의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한 셈 아닙니까?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후회라. 어려운 질문이군요. 후회해본 적이 없어서요.”

한수은은 그를 힐끔 돌아보며 되물었다.

“저도 하나 여쭤볼게요. 누군가가 혜성 씨에게 동생의 복수를 포기하면 10억 원을 주겠다고 제안했다고 칩시다. 그럼 혜성 씨는 복수를 깔끔하게 포기할 건가요?”

“절대요.”

혜성은 즉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 보세요. 누구나 가슴에 사연 하나쯤은 있어요. 독이 되리라는 걸 뻔히 알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집착이나 사연. 그게 바로 우리 SJ 기획을 지탱하는 힘이죠.”

그녀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혜성은 다시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사이 혜성의 오피스텔 아래에 도착했다. 그녀는 비상깜빡이를 켜고 승용차를 횡단보도 앞에 세웠다. 혜성이 고맙다고 인사하며 차에서 내리려는 찰나였다.

“오늘 일은 서로 잊기로 해요. 당신의 비밀은 지킬 테니까. 박 실장님께도 그건 비밀로 하겠어요.”

“네?”

“당신의 몸 말이에요. 아까 치료하면서 알았어요.”

움찔. 혜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치유만으로 당신의 상태를 알아낼 수 있는 능력자는 많지 않으니까요. 저나 강지영 정도면 모를까.”

한수은은 도어의 잠금을 풀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혜성도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차에서 내렸다.

곧 신호가 바뀌었다. 한수은의 차는 깜빡이를 켜고 그대로 떠났다.

“강지영도 내 상태를 알면서 모른 척한 건가?”

혜성은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다.

“아니지. 지금은 이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야.”

그는 심호흡하며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당분간은 블랙에만 집중할 때. 박무영의 정보에 의하면, 곧 블랙의 반격이 시작될 터였다.

“블랙. 내가 갈 때 가더라도 네놈들은 하나라도 더 데려간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며 새삼 전의를 불태웠다.

***

경기도 남부 외곽.

“네, 네가 왜……?”

홀쭉이는 눈을 부릅뜨고 상대를 쳐다봤다. 입을 열 때마다 핏물이 한 모금씩 쏟아졌다.

“마스터께서 말씀하셨을 텐데? 두 번의 실패는 용납할 수 없다고.”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곤 주위를 둘러봤다.

NSA의 특수 감옥이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요원들, 뚱뚱이, 쥐방울 등은 시체가 돼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하나같이 가슴이 뻥 뚫린 채.

“마스……”

다시 홀쭉이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사내가 오른손을 들었다. 펑, 하얀 섬광이 홀쭉이의 심장을 꿰뚫었다.

“멍청한 새끼들. 나까지 나서게 만들다니.”

사내는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출입문 위에 CCTV가 있었다.

“다음은 이혜성인가?”

그는 CCTV를 슬쩍 쳐다본 뒤 웃으며 유유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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