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4. 밤안개 (1)
청문회 후.
혜성은 근신 1주일이라는 형식적인 징계를 받았다. 감시자가 붙은 건 아니었지만, 위치추적 장치가 부착된 스마트워치를 항상 착용해야 했다.
‘오랜만에 쉰다고 생각하자.’
처음엔 좋게 생각하려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혼자 있으니 오히려 생각이 많아지고 초조해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동생은 병원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누워 있었다.
부모님은 어딘가에서 죽은 사람처럼 숨어 있었고, 블랙의 마수가 언제 태호나 다른 지인들에게 뻗칠지 알 수 없었다.
“하아.”
그는 맥주 한 캔을 들고 창밖을 바라봤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건물들. 도로를 내달리는 자동차들. 어디론가 걷고 있는 사람들. 오피스텔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오늘도 그와 상관없이 생기가 넘쳤다.
“강지영은 어떻게 됐을까? 많이 바쁜가?”
그는 한숨을 내쉰 뒤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단지 그녀가 대한민국 제일의 미녀라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강지영이 협회를 움직인 건가? 그녀가 혼자 했을 리는 없고. 그녀의 배후에는 누가 있는 거야? 혹시 그녀는 처음부터 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게 아닐까?’
그녀를 만나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는 습관처럼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딩동, 문자 알람이 울렸다. 발신자는 강지영.
[지금 아래층 커피숍에 있어요.]
“강지영?”
그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모자를 눌러쓰고 나갔다.
커피숍은 한산했다. 취한 남녀 몇 쌍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종업원이 낯선 손님을 보고 잠깐 움찔했지만, 이내 그에게서 관심을 거뒀다.
‘저긴가?’
그는 구석에 혼자 앉아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모자를 푹 눌러써서 얼굴을 가렸지만, 길고 가느다란 목선이 눈에 띄었다.
“오랜만이군요. 연락 못 해서 미안해요. 파파라치 새끼들이 계속 따라붙었거든요.”
그녀가 고개를 들고 인사했다.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거친 입담도 여전했다.
“지금은 파파라치가 없습니까?”
혜성은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항상 있죠. 매니저 언니가 제 차를 끌고 나갔어요. 그 새끼들, 아마 여의도 어딘가에서 제 차를 신나게 추격하고 있을 거예요.”
그녀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려다가 움찔했다. [금연]이라는 문구가 벽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아 참. 청문회에서의 일은 감사했습니다.”
혜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저한테 감사할 필요는 없어요. 전 그냥 대리인이었으니까요.”
“대리인이요? 역시 지영 씨 배후에는……”
혜성이 본격적으로 질문을 쏟아내려는 찰나, 그녀는 손을 살짝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정체가 뭐냐? 어떤 스킬을 가진 능력자냐? 배후에 누가 있냐? 등등. 저한테 묻고 싶은 말이 많은 거 알아요.”
그러면서 그녀는 핸드백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순금으로 만든 명함이었다.
“이게 뭡니까?”
혜성은 고개를 갸웃하며 명함을 들었다. 낯선 이름이었다.
“혜성 씨의 의문을 풀어줄 곳. 그리고 혜성 씨의 복수를 도와줄 곳. 모든 절차는 다 끝내 놨어요. 그곳에 가서 명함만 보여주면 될 거예요.”
그녀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파라치를 따돌릴 수 있는 것도 한두 시간뿐이거든요.”
“이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겁니까?”
그도 그녀를 따라 엉거주춤 일어났다.
“이것 때문도 있고. 잠깐이나마 혜성 씨의 얼굴을 보고 싶기도 했고. 우린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거예요. 잘해 봅시다.”
그녀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혜성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자주 만나자는 말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짧은 만남은 여기까지. 잠시 후, 혜성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SJ 기획? 광고 회산가?”
그는 ‘SJ’라는 말을 반복하며 한참 동안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
다음 날 오전.
“여긴가?”
혜성은 고개를 위로 젖히며 눈을 찌푸렸다.
언뜻 봐도 20층이 넘어 보이는 높은 빌딩. 정문 옆에는 SJ 기획이라고 크게 쓰여 있었다.
“왜 여기로 가라고 한 걸까?”
그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재차 확인했다.
SJ 기획.
밤새 인터넷으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잘나가는 신생 기획사라고 했다. 강지영이 나오는 CF도 다수 제작했으며, 최근엔 코스닥 상장까지 준비 중이었다.
“가 보면 알겠지.”
그는 심호흡을 하고 건물 로비로 들어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제복을 입은 경비원이 문 앞에서 제지했다.
천면(千面) 여우의 가면은 청문회를 거치며 널리 알려진 상태. 혜성은 모자와 뿔테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이걸 보여주면 알 거라고 하던데요.”
그는 명함을 슬쩍 보여줬다.
“아!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경비원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는 안내 데스크로 달려간 뒤, 어딘가로 급히 전화했다. 혜성이 뒤따라가며 귀를 쫑긋 세우니 ‘VIP’라는 단어가 얼핏 들렸다.
잠시 후, 정장을 입은 여성이 종종 걸음으로 내려왔다. 무테안경을 쓴 미녀. 쉽게 말을 걸 수 없는 차가운 인상이었다.
“반갑습니다. 한수은입니다.”
“이혜성입니다.”
악수를 한 뒤, 그녀는 그를 구석의 전용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뭐지? 평범한 기획사가 아닌가?’
혜성은 그녀를 따라가며 주위를 힐끔 둘러봤다. 지나치게 많은 CCTV. 능력자처럼 눈이 날카로운 경비들. 잘나가는 기획사치고는 한산한 로비까지. 이상한 점이 많았다.
23. 24. 다시 23, 24.
그녀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몇 차례 반복해서 눌렀다. 마치 암호를 입력하는 것처럼.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띵,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23.5층.
정면에는 아무 문양이 없는 거대한 철문만 있었다.
“여긴 또 어딥니까?”
혜성은 경계하는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봤다. 몇 차례의 전투로 단련된 예감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문 너머에 뭔가 위험한 것이 있다고.
“그분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
혜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지만, 그녀는 가벼운 묵례로 대답을 대신했다.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문득 동생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오직 직진뿐. 물러설 시간이 없다!’
그는 어금니를 깨물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갔다.
***
“뭐야?”
혜성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을 찌푸렸다.
안은 온통 흰색으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너무 밝아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 외에 기둥이나 창문은 없었고, 천장에는 빛을 내는 구슬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여긴 뭐지? 공간 계통의 마법이 걸린 건가?’
발을 내디딘 즉시 이질감이 느껴졌다. 숨쉬기가 곤란하고 몸이 좀 무거운 것 같았다.
“자네가 요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이혜성인가? 만나서 반갑군.”
정면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혜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봤다.
흰 셔츠를 입은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큼지막한 선글라스를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어쩐지 낯이 익었다. 점잖고 지적인 이미지. 하지만 체격은 의외로 단단해 보였다.
‘누구지? 전에 만난 적이 있었나?’
혜성은 인상을 찌푸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생각이 날 듯 말 듯 했다.
“그렇……”
그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였다.
파팟, 사내가 다짜고짜 혜성을 향해 돌진했다. 현란한 수십 개의 잔상과 함께.
“젠장.”
혜성은 급히 뒤로 물러섰다. 왜 공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신중히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파지직, 뇌전을 담은 기운이 혜성의 주요 급소들을 노리고 쏟아졌다. AA급 이상의 공격. 주먹이 닿을 때마다 번개가 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2차 각성을 보여라!”
사내의 공격이 더욱 거칠어졌다. 주먹 하나하나에 살기가 실려 있었다.
“크흑!”
혜성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삭였다.
곧 그의 정면이 무방비로 노출됐다. 사내는 그의 턱을 올려치려는 듯 오른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마침내 사내가 마무리하려는 찰나.
“내 2차 각성이 그렇게 보고 싶나?”
혜성은 황금빛 눈동자로 상대를 쏘아봤다. 상대가 누군지는 둘째 문제. 본능적인 투쟁심이 고개를 들었다.
- 아래!
대수영이 경고했다. 암흑의 수호자 또한 머리와 상반신을 보호하는 형태로 스르르 변했다.
사내의 주먹이 슬로모션으로 보였다. 혜성은 고개를 살짝 돌려 사내의 주먹을 흘렸다. 동시에 오른손으로 카운터를 날려 사내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콰지직, 사내의 것보다 훨씬 거대한 뇌전이 그의 오른 주먹에 맺혔다.
“이크!”
사내는 상체를 젖히며 급히 물러섰다. 혜성의 주먹이 아슬아슬하게 사내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상황이 역전됐다. 혜성은 상체를 숙이고 사내의 품을 파고들었다.
“끝이다!”
그가 사내의 복부에 주먹을 날리려던 순간이었다.
펑, 사내의 왼손에서 뭔가 차가운 것이 날아왔다. 목표는 혜성의 턱.
“이 정도쯤은….”
혜성은 사내의 공격을 무시했다. 대신 암흑의 수호자가 턱을 이중으로 보호하는 형태로 변했다.
“으악!”
비명이 터졌다. 사내가 아니었다. 방금까지 밀어붙이고 있던 혜성이었다.
“제길!”
혜성은 주춤거리며 급히 뒷걸음질 쳤다. 2차 각성 전에 맞았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턱이 몸에서 떨어져 나간 줄 알았다.
‘물과 번개를 동시에? 듀얼 능력자? 아니면 아이템?’
혜성은 식은땀을 흘리며 사내의 두 주먹을 바라봤다.
오른쪽에는 노란색 구체가, 왼쪽에는 파란색 구체가 맺혀 있었다. 노란색은 뇌전이었지만, 문제는 파란색이었다. 번개와는 상극의 속성. 바로 수(水)의 기운이었다.
“지금 자네는 뇌전계 능력자가 됐네. 아마 온몸이 번개처럼 짜릿하겠지. 하지만 그 때문에 물에 의한 데미지는 크게 증폭될 거야.”
“…….”
“어떤가? 더 해볼 텐가? 물은 일정한 형체가 없는 터. 암흑의 수호자가 아무리 잘 막아도 그 빈틈을 파고들 거네.”
혜성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진 건가? 2차 각성을 하고도?’
이렇게 완벽하게 당한 건 처음이었다. 분노와 좌절, 그리고 허무의 감정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억지로 밀어붙여 볼까?’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법이 거칠었다면 사과하겠네. 자네의 약점. 말보다 몸으로 가르쳐주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뭐, 능력자로서 자네와 겨뤄보고 싶은 승부욕이 들기도 했고.”
사내는 가볍게 웃으며 주먹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던졌다.
혜성이 받은 건 알약 형태로 된 고순도의 힐링 팩터였다. 그는 사내를 노려보다가 약을 단숨에 삼켰다. 곧 통증이 가라앉고 2차 각성의 징후도 사라졌다.
“초면에 다짜고짜 주먹질이라. 당신은 누굽니까?”
혜성은 사내를 노려보며 물었다.
“다시 인사하지. 영상은 많이 봤지만, 이렇게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군. 내 이름은 박무영. 그냥 편하게 박 실장이라고 부르게.”
“박무영? 박무영이라.”
혜성은 사내의 이름을 곱씹다가 뒤늦게 눈을 크게 떴다.
코드명 밤안개.
아주 오래전, 임무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NSA의 전설. 지금도 베테랑 요원들은 술만 마시면 밤안개의 활약상을 입에 담곤 했다.
“당신은 죽었을 텐데?”
혜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상대가 유령으로 보이진 않았다.
“맞아. 난 분명 죽었지. 공식적으로는.”
박무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