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2. 청문회 (1)
“끝난 건가?”
혜성은 털썩 주저앉았다. 삭신이 쑤셨다. 3차 각성의 징조는 사라진 상태. 2차 각성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는 분수대에 기댄 채 양손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에 무슨 스킬을 쓴 걸까? 본인도 알 수 없었다.
“다음에 같은 상황이 돼도 이걸 해낼 수 있을까?”
문득 쓴웃음이 나왔다. 솔직히 다시 해 보라고 하면 해낼 자신이 없었다.
“끄응.”
그가 억지로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씨발. 우리가 이대로 죽을 거 같아?”
누군가가 분수대 왼쪽에서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혜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만신창이가 된 홀쭉이와 뚱뚱이였다.
안색은 창백했고, 입가에는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눈은 혜성을 향한 적개심으로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그래. 우리 사이엔 아직 못다 한 계산이 있지.”
혜성도 놈들을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인터리오렘 인스팅툼(Interiorem instinctum)……”
홀쭉이와 뚱뚱이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곧이어 놈들의 단전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각성의 근본이자 생명력을 쥐어짰다는 표시였다.
수백 명이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여러 목소리가 뒤섞여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크윽!”
혜성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크게 휘청거렸다. 기력이 다한 탓인지 대수영과 암흑의 수호자도 활동을 멈췄다. 다행히 분수대를 짚어 넘어지는 것만 겨우 면했다.
놈들을 향해 전진하려 했지만 힘겨웠다. 몇 초에 한 발자국씩 겨우 움직였다.
“이 새끼들이!”
혜성은 어금니를 악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
“형!”
막내는 혜성을 향해 달려들려 했다.
통제실에서 광장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뒤. 그는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김유진도 한참 뒤처져서 열심히 달려오고 있었다.
“잠깐만요.”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낯선 여자가 보였다. 옆에는 곰처럼 생긴 보디가드가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조금 기다려 봐요. 혜성 씨는 지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혜성을 응시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구……?”
막내는 뒤늦게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혜성의 모습이 마켓 천장의 대형 스크린에 비쳤을 때, 그 옆에 있던 여자였다.
‘형에게 버프를 건 것도 이 여자인가?’
막내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의 위아래를 살폈다. 목소리를 보니 자신과 비슷한 또래. 태도에 여유가 있었다.
“놈들이 지쳤기 때문입니까?”
그는 다시 혜성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마음이 더 급해졌다. 그사이 혜성은 놈들의 지척에 이른 상태였다.
“뭐, 그것도 있지만. 혜성 씨가 조금 전에 무슨 진법을 깼는지 잊었어요?”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과정이야 어찌 됐건 혜성 씨는 정신 계통 진법을 깼다고요. 그것도 탑급이라는 사신의 축복을.”
“아!”
“그리고 놈들의 최면술도 같은 정신 계통의 능력. 사신의 축복을 깬 이상, 혜성 씨를 정신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스킬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막내는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력은 신체 능력과 달리 측정이 어려웠다. 심리 상태, 상황 등 워낙 변수가 많은 까닭이었다.
다만 상위의 정신 계통 스킬과 싸워 이겼다면, 같은 속성의 하위 스킬에는 일종의 내성이 생긴다는 게 일반적인 이론이었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였다.
“으아아아!”
혜성은 괴성을 지르며 홀쭉이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느린 주먹이었지만 피할 수 없었다.
쾅, 홀쭉이는 분수대 안으로 나가떨어졌다. 요란한 물보라를 만들며. 곧이어 뚱뚱이도 그의 발에 걷어차여 같은 신세가 됐다.
혜성은 분수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광기에 사로잡힌 채. 싸울수록 힘이 넘쳤다.
놈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가운데, 그의 일방적인 구타가 한참 동안 계속됐다.
“봤죠? 놈들은 2차 각성을 한 혜성 씨의 상대가 될 수 없어요. 놈들이 강한 건 정신 능력일 뿐. 신체 능력 자체는 B급도 안 될 테니까요.”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위잉, 경찰의 사이렌이 길게 울려 퍼졌다. 막내가 열어둔 문을 통해 요원들과 경찰들이 마켓에 들이닥친 것이다.
경찰들과 요원들의 호각 소리, 마켓 상인들과 고객들의 비명, 쫓고 쫓기는 발소리 등이 요란했다.
“손님들이 왔군요. 그만 가야겠네요. 혜성 씨의 동생을 생각한다면, 이쯤에서 혜성 씨를 말리는 게 좋을 거예요. 저러다간 혜성 씨가 정말 놈들을 죽일 테니까.”
그녀는 웃으며 골목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지하 마켓답게 비상시를 위한 작은 대피로가 곳곳에 있었다. 상인들은 앞다투어 대피로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보디가드는 아쉬운 듯 혜성을 바라보다가 그녀를 뒤따랐다.
“당신은 누굽니까?”
막내가 그녀의 등에 대고 물었다.
그녀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저요? 혜성 씨의 조력자랄까?”
“네?”
“당신이 누군지는 알고 있어요. 저처럼 혜성 씨의 든든한 조력자더군요.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거예요.”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한 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이름이라도……”
막내가 손을 뻗으며 외쳤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젠장!”
그는 그녀와 혜성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혜성을 향해 달려갔다. 홀쭉이와 뚱뚱이는 혜성에게 멱살을 잡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놈들은 블랙과의 연결고리. 혜진의 최면을 깨기 위해서라도 놈들을 산 채로 체포해야 했다.
“조만간 다시 만날 거라고?”
막내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분수대로 뛰어 들어갔다.
***
저녁 8시, 병원 특수 치료실.
“야 이 새끼야. 넌 왜 맨날 걸레가 돼서 오는 거냐?”
태호는 욕을 한 바가지 퍼부으며 혜성을 치료기로 옮겼다. 언뜻 반신욕조 같았는데, 각종 영약과 아이템을 배합한 검은색 물이 가득 차 있었다. 혜성은 구급차에 실려 오는 동안 응급처치를 한 상태. 미라처럼 전신에 붕대를 칭칭 두르고 있었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 간호사 둘이 옆에서 거들며 혜성의 상태를 빠르게 설명했다.
“각종 에너지 파동 불안정. 일부 에너지는 벌써 역류 현상을 보이며……”
“사이코닉 수치 급감. 정신 데미지의 전이에 따라……”
최악의 상태. 육체적 데미지도 문제였지만, 정신 데미지가 더 큰 문제였다.
“태호냐?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혜성이 손을 허우적거리며 힘겹게 되물었다. 갑자기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눈은 반쯤 감겨 있었고, 의식은 오락가락했다.
“입 다물어, 새끼야.”
태호는 악의 없는 욕설을 내뱉으며 급히 치료를 시작했다.
“병원에 있는 힐링 팩터 전부 가져와.”
“과도한 힐링 팩터의 사용은 협회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쇼크의 위험도……”
“지금 절차 같은 거 따질 때야?”
“네, 네. 알겠습니다.”
태호의 고함. 바쁘게 움직이는 간호사들. 의료용 가위로 붕대 절단, 각종 호스와 센서 연결, 에너지 수치 확인 및 약물 투입.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막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하려는 찰나였다. 덜컹,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병원 관계자들은 아니었다.
“누구야? 내가 치료할 때는 들어오지 말라고……”
태호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려다가 움찔했다.
입구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 둘이 서 있었다. 어디 소속인지는 모르겠지만, 국가 요원들인 것 같았다. 치료실이 돌연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저, 그게…… 안 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이분들이……”
간호사는 둘의 뒤에 서서 난감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로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충 그려졌다.
“실례합니다. 감찰국에서 나왔습니다.”
우측의 사내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표정이며 어투가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뭐?”
태호는 황당한 표정으로 둘을 쳐다봤다. 하마터면 욕이 나올 뻔했다.
“내일 오후 3시. 본부 C-302호에서 이혜성 씨 청문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꼭 출두하시라는 명령입니다.”
이번엔 좌측의 사내가 얇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소환장. 태호의 이름도 하단의 참고인 명단에 있었다.
‘청문회? 그것도 내일 당장? 장난해? 이 새끼들아, 지금 환자 상태 안 보여?’
태호는 몸을 부르르 떨며 이 말을 겨우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사리 분별은 할 줄 알았다.
“씨발.”
태호는 누워 있는 혜성과 소환장을 번갈아 쳐다봤다.
최면술사들을 체포한 건 분명 훌륭한 공이었다. 그러나 허가 없는 단독행동, 지하 마켓의 출입 등은 부인할 수 없는 위법행위였다.
NSA의 내규대로라면 최소 정직. 최악의 경우에는 파면은 물론, 능력자로서의 모든 특권과 자격을 박탈당할 수도 있었다.
‘이혜성. 어쩌자고 이렇게 무모하게 나선 거냐?’
태호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허탈하고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
쾅!
“말도 안 돼! 이혜성의 청문회라고?”
김유진은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스탠드 아래, 청문회 관련 문서가 구겨져 있었다. 수신인은 그녀와 막내. 혜성의 청문회에 주요 참고인 자격으로 출석하라는 내용이었다.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막내였다.
“여보세……”
“누나! 소환장 받았죠? 이 개새끼들!”
다짜고짜 막내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뜬금없이 내일 당장 청문회라니.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김유진도 따지듯 목소리를 높였다.
“청문회가 갑자기 결정된 건 아니에요. 최근에 형이 계속 부각됐잖아요. 그 때문에 형을 안 좋게 보는 놈들도 생겨났거든요. 언론이 형에게 호의적이라 말은 못 하고 있지만, 꼬투리를 잡을 틈만 노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들도 준비할 시간이 없을 텐데. 내일 당장은 너무 촉박한 거 아니에요?”
“시간이 없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니까요. 준비가 좀 허술해도 이쪽에서 대비할 틈을 안 주려는 것 같아요.”
막내는 청문회의 절차를 간략히 설명했다.
명분은 있었다. 혜성은 엄연히 국가 기관 소속. 모든 일에는 절차라는 게 있었다.
아무리 큰 공을 세웠다고 해도, 사적인 일을 위해 지하 마켓에 출입한 것은 용납이 안 됐다.
“이번 사건의 수석 감찰관은 어떤 사람이에요?”
김유진은 소환장의 제일 하단을 살피며 물었다. 수석 감찰관 박성호. 낯선 이름이었다.
“감찰관 10년 차. 별명이 교수님인데, 엄청 깐깐한가 봐요.”
“교수님?”
“네. 감찰국에 있는 동기들에게 알아봤는데, 조직의 단결과 협동을 중요하게 생각한대요. 혜성이 형의 튀는 행동들로 인해 자칫 조직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 아마 이런 논지로 공격할 거예요.”
“아!”
그녀는 한숨 같은 탄식을 길게 내뱉었다.
청문회는 내일 당장. 정적들은 밤새 혜성을 공격할 자료들을 준비할 터. 반면 혜성은 청문회 준비는 고사하고 몸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참을 씩씩거린 뒤, 그녀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만요.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요.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마음이 급했다. 그녀는 막내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책상 위의 전화기를 들어 귀에 대고, 손으론 태블릿을 검색했다.
대상은 타 신문사와 방송국 기자들. 곧 전화기 너머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 선배. 저 유진이에요. …… 네, 네. 내일 NSA 본부에서 재밌는 일이 벌어질 거예요. …… 어때요? 대어 한번 낚아볼 생각 없어요?”
오케이. 그녀는 웃으며 전화를 끊은 뒤, 다른 기자의 번호를 누르며 중얼거렸다.
“좋아. 나 혼자서 이혜성을 돕는 게 무리라면…… 전 국민이 나서서 혜성 씨를 돕게 만들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