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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순직이 힘들다-31화 (31/150)

# 031.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 (3)

혜성은 연신 뒷걸음질 쳤다. 두 팔은 교차시켜 상체와 주요 급소를 보호했다.

‘나와 싸우는 상대는 이런 느낌이었나?’

답이 안 보였다.

현재 그는 마켓 가드들의 바람 속성을 카피한 상태. 그런데 또 다른 자신도 바람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증폭해 카피하는 스킬 탓인지 같은 바람 속성이라도 그보다 훨씬 강했다.

- 오른쪽!

머릿속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경고했다.

오른쪽에서 바람의 펀치가 훅처럼 날아왔다. 파공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머리를 살짝 숙여 피하고 놈의 품으로 파고들려 했다.

쾅!

시야가 아득해졌다. 놈의 오른손 어퍼컷이 어느새 그의 턱을 강타한 것이다. 눈앞이 캄캄한 가운데, 머리가 뽑힐 듯 뒤로 젖혀졌다.

“제길!”

그는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다시 양팔을 올려 가드했다. 소용없었다. 놈의 펀치는 가드를 비웃듯 좌우에서 빈틈을 노리고 쏟아졌다.

이후로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가 대수영으로 한 수 앞을 예측하면, 놈은 두 수 앞을 내다보고 반격했다.

암흑의 수호자가 변화하며 보호한 덕분에 겨우 버티고 있을 뿐.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놈이 호흡을 고르려는 듯 잠깐 공세를 멈췄다.

“이 새끼가!”

혜성은 이를 악물고 돌진했다.

- 진정해! 속임수다!

대수영의 다급한 경고가 울렸다.

혜성은 무시했다. 2차 각성의 전의로 불타오르는 상태. 그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놈을 쓰러뜨리겠다는 일념만이 가득했다.

결국 대수영의 말대로였다. 놈은 오른발을 뻗어 그의 복부를 강타했다. 카운터.

“커헉!”

혜성의 몸이 새우처럼 굽어졌다.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아래에서 위로 놈의 펀치가 쏟아졌다.

쾅, 혜성은 크게 얻어맞고 날아갔다.

“왜? 이젠 힘이 없나 보지?”

녀석은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천천히 다가왔다.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이대로 끝인가?’

자포자기. 혜성은 2차 각성을 경험한 이래 처음으로 절망에 사로잡혔다.

- ……형. 혜성이 형!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다 됐나 보군. 이젠 막내의 목소리까지 들리다니.’

환청이나 착각이 아니었다. 막내의 목소리는 점점 크고 또렷해졌다.

- 빨리 일어나!

“뭐?”

- …… 인사동 …… 시민들 위험 …… 절망. 남은 시간 3분 …… 반드시 진법을 파괴 …….

경황 중에서도 주요 키워드는 어렴풋이 들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혜성은 쓰게 웃다가 눈을 번쩍 떴다.

시민들 위험. 절망.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 단어가 떠올랐다. 이젠 그의 본능이 된 목표였다.

순직!

혜성은 허우적대며 억지로 일어났다. 체력은 거의 바닥났지만, 정신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맑았다.

“뭐야? 아직도 힘이 남은 건가?”

놈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혜성은 놈의 눈가를 주목했다. 눈꺼풀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흠칫 놀란 것 같았다.

- 나는 네 불안, 혼란, 두려움, 공포다.

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거였나? 진법을 깨뜨리는 방법이.’

혜성은 씨익 웃었다. 역시. 그의 웃음과 반비례해 놈의 여유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 세상에 무적의 진법은 없다.

진법 이론서 첫 장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진법의 파훼법은 이론적으로 진법의 반대 속성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사신의 축복이라고 했지?’

그는 진법의 특성을 떠올렸다.

상대의 불안과 공포, 특히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는 암흑 속성. 따라서 진법을 깨뜨리는 방법은 간단했다.

“너.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알아? 그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채 헛되게 죽는 거야.”

퉤, 혜성은 피가 섞인 가래침을 뱉고 놈을 노려봤다.

“…….”

묵묵부답. 놈의 얼굴이 굳어졌다.

“반대로 내 목표는 누군가를 지키다가 장렬하고 명예롭게 죽는 거지. 지금처럼 말이야.”

혜성은 놈을 향해 한발 다가갔다. 미친놈처럼 히죽 웃으며.

“흥! 그런 허세가 어디까지 통할 것 같나?”

놈은 차갑게 비웃었다. 하지만 말과 달리 질린 표정으로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네가 그렇게 강해? 그럼 어디 한번 나 좀 죽여줘 봐. 이 기회에 순직 좀 해 보자.”

혜성은 순직을 강조하며 놈을 향해 돌진했다. 방어 따위는 무시. 일격을 날리기 위해 주먹에 온 힘을 실었다.

***

중앙 광장 분수대 근처.

주위는 마치 유령의 도시 같았다. 다른 이들은 전부 대피한 상태. 강지영만 10m쯤 떨어진 골목 어귀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진법에 무슨 변화가 생긴 건가?”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수대 앞, 혜성과 사람들을 삼킨 거대한 구체가 보였다. 처음에는 짙은 보라색이었지만, 지금은 반투명한 하늘색이었다.

“진법이 저절로 저렇게 될 리는 없고. 누군가가 외부에서 진법에 영향을 준 건가? 대체 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법이 더욱 불안정해졌다. 금방이라도 깨질 듯 진동하는 가운데, 내부의 여러 상황이 동시에 보였다. CCTV의 분할화면이 연상됐다.

가드들은 비쩍 마른 시체가 돼 있었다.

그녀는 우측 중앙을 주목했다. 웅이 웅크리고 앉아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녀석은 덩치는 크지만 지능에 문제가 있는 아이. 특히 스트레스에 둔감한 편이었다.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최면술사들은?”

그녀는 좌측 상단을 주목했다.

홀쭉이와 뚱뚱이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뭐라고 주문을 외우며. 최면술사답게 고전하면서도 잘 버티는 눈치였다.

“혜성 씨는 어디 있지?”

찾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중앙 상단을 주시했다.

혜성은 환영하고 싸우듯 혼자 허우적대고 있었다. 말없이 진행하는 일인극 팬터마임을 보는 것 같았다. 다행히 진법의 혼란에서 벗어난 것 같았지만, 문제는 체력이었다.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져 있었다.

“이대로는 위험해.”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론적으로 외부에서 진법 내부에 술법을 펼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외부의 영향 때문에 진법의 공간과 현실이 중첩된 상태였다. 그녀의 스킬이 통할 수도 있었다.

“포텐티아 오리스(Potentia oris).”

그녀는 수인을 맺고 주문을 외웠다. 대상의 잠재력을 개방하는 스킬.

부웅, 그녀의 주위에서 푸른 기운이 일렁거렸다. 뱀들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기운은 그녀의 곁을 잠시 맴돌다가 진법 안의 혜성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수스키탄스(Suscitans)!”

그녀는 수인을 풀며 짧게 외쳤다. 각성 주문이었다.

“후우!”

그녀는 숨을 길게 내뱉으며 눈을 떴다. 웅에게 버프를 걸 때보다 몇 배는 힘들었다. 얼굴과 전신이 땀으로 흥건했다.

과연 혜성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2차 각성과는 조금 달랐다. 은은한 황금빛 서기 대신 하얀 후광이 뿜어졌다. 조금 더 차분한 느낌이었다.

이때 혜성은 다시 뭔가를 향해 돌진하던 찰나. 자신의 몸에 생긴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 혜성 씨는 2차 각성이란 단단한 껍질에 둘러싸인 상태. 내 버퍼를 받아 그 껍질을 깨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녀는 잔뜩 흥미가 동한 표정으로 혜성의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

쾅!

혜성은 놈과 동시에 오른손으로 펀치를 주고받았다. 망치에 관자놀이를 맞은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큭!”

그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강해진 게 아니었다. 놈이 눈에 띄게 약해져 있었다. 놈도 그와 비슷한 충격을 받은 듯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그는 다시 오른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사이 시간이 흘러 남은 건 2분 남짓. 마음이 급해졌다.

“크아아!”

혜성이 괴성을 지르며 주먹을 크게 휘두르는 도중이었다.

두근!

시간의 흐름이 느려졌다. 심장 박동은 터질 듯 쿵쾅거렸고, 혈액은 빠르고 강하게 전신을 돌았다. 감각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곤두섰으며, 동시에 놈의 움직임은 하품이 날 정도로 느리게 보였다. 2차 각성과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좀 차분한 느낌이었다.

‘뭐지?’

혜성 본인도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처음이지만 낯설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지만, 한동안 잊고 있었던 친구를 오랜만에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그는 무의식에 몸을 맡겼다. 자신의 몸이면서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놈의 품을 파고든 뒤. 그는 본능적으로 왼손바닥을 내밀어 놈의 명치에 붙였다.

쾅!

그의 내부에 쌓인 무언가가 손바닥을 통해 한순간에 폭발했다. 그리고 눈부신 섬광이 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

지하 마켓 통제실.

“어? 저거 뭐야?”

쾅, 막내는 제어장치를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탄성을 질렀다. 김유진도 놀라 눈을 부릅떴다.

진법 외부에서 푸른빛이 스며들어 흡수된 직후, 혜성의 상태가 달라졌다.

푸른빛은 버프의 전형적인 징조. 비록 일회성이긴 하지만, 버프의 영향으로 2차 각성을 뛰어넘었다는 뜻이었다.

“혜성이 형이 다차 각성자라는 말을 듣긴 했는데. 설마…… 버프를 받아 3차 각성을 한 건가?”

막내는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뜬금없이 누가 버프를? 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어올랐다.

더 놀라운 건 조금 전 혜성이 선보인 스킬이었다. 그가 손을 앞으로 뻗고 의식을 집중하자, 눈부신 섬광과 함께 강한 폭발이 일었다.

콰지직, 진법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거미줄 같은 실금이었다.

하지만 이내 얼음처럼 쩍쩍 갈라지더니 산산조각 부서졌다. 이대로라면 몇 초 안에 진법이 소멸할 터.

“형이 적을 한 방에 보낸 건가?”

막내는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진법의 균열. 혜성이 무엇과 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일격으로 상대를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다는 뜻이었다.

“위력은?”

막내는 급히 설비 상단의 에너지 수치를 확인했다. 파괴력 수치 999,999. 혜성의 타격 에너지가 측정 한계치를 넘은 것이다.

“말도 안 돼. 측정 불가라니.”

막내는 말도 안 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참고로 그의 파괴력 최고치는 약 300,000. AA급 능력자라도 측정의 한계치를 뛰어넘는 건 불가능했다.

유수혁 같은 최상위 능력자가 전력을 다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방금 무슨 스킬이었죠? 뭔가를 모았다가 한꺼번에 터뜨리는 느낌이었는데.”

김유진이 멍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혜성이 형이 3차 각성을 한 것 같습니다. 다만 위력이나 여러 정황으로 봤을 때……”

꿀꺽, 막내는 마른침을 삼켰다. 말이 안 되는 건 알지만, 이것 외에는 조금 전 혜성의 스킬을 설명할 수 없었다.

“네? 그게 뭔데요?”

김유진도 덩달아 긴장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형의 3차 각성은 누적 데미지를 한곳에 모아서 반사하는 능력 같습니다. 그것도 몇 배로 증폭해서.”

막내는 혜성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을 맺었다.

누적 데미지의 증폭 반사.

혜성의 3차 각성이 처음 선을 보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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