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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순직이 힘들다-30화 (30/150)

# 030.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 (2)

“여긴 어디지?”

혜성은 우두커니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 공간이었다. 방향감각은 마비됐고, 몸은 물에 빠진 것처럼 무거웠다.

“진법에 갇힌 건가?”

그는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웅이 달려들려는 찰나, 보라색 구체가 생성됐다. 그리고 그와 웅, 가드들, 홀쭉이와 뚱뚱이는 반항하다가 구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왜 진법이 늦게 발동된 걸까? 진법을 컨트롤하는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웅과 다른 이들은 어떻게 된 거지?”

의문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때였다. 우측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겨우 C급이야? 넌 안 돼. 차라리 다른 직업을 찾아보는 게 빠를 거야.”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상대의 형체가 흐릿하게 보였다. 얼굴은 잘 안 보였지만, 그는 목소리만으로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카데미 시절의 담당 교수. 그에게 능력자로서 사형선고를 내렸던 자였다.

“지금 무슨 소릴……”

그가 뭐라고 반박하려는 순간, 이번에는 좌측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NSA라고? 그 실력에 운이 좋네.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그의 첫 번째 팀장이었다.

“세상이 공평하다고 생각해?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따를 거 같지? 천만에. 너처럼 평범한 놈은 평생을 노력해도 내 발끝도 따라올 수 없을 걸?”

다시 우측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카데미 시절에 잘나가던 후배였다.

그 외에도 여럿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 넌 안 돼! 넌 안 돼! 넌 안 돼!

그들은 어둠 속에서 히죽 웃으며 그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를 비웃는 음성들이 합창처럼 울려 퍼졌다.

“침착하자. 이건 진법이다. 진짜가 아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크고 또렷하게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마치 그를 옭아매는 것처럼. 심장의 박동은 점점 빨라졌고, 피는 점점 뜨거워졌다.

“이 개새끼들아!”

어느 순간, 혜성은 괴성을 지르며 정면을 향해 돌진했다. 눈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

“지금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혜성 씨에게만 환각이 보이는 건가요?”

김유진은 벽면의 모니터를 응시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혜성은 뭔가에 홀린 듯 우두커니 서 있다가, 곧 괴성을 지르며 마구 주먹을 날렸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적과 싸운다기보다는 악에 받쳐 발악하는 것 같았다.

다른 곳의 상황도 비슷했다. 머리를 감싸 쥐고 통곡하는 웅, 겁에 질려 발악하는 가드들, 그리고 미친 것처럼 웃으며 허공을 찢어발기는 홀쭉이와 뚱뚱이까지. 반응은 다양했지만, 모두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막내는 엉거주춤 서서 제어장치를 만지며 대답했다.

“아카데미 때 진법 이론서에서 본 적이 있어요. 아마 지금은 페이즈 원. 대상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단계일 거예요.”

“트라우마?”

“네. 형의 무의식 속에 있던 두려움, 공포, 불안, 좌절 등. 주로 부정적인 기억을 되살리는 거죠.”

“지금이 겨우 일 단계라고요? 그럼 다음도 있나요?”

김유진은 막내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돌리고 물었다. 막내의 손가락은 키보드와 설비를 미친 듯이 두드리고 있었다.

“네. 페이즈 1, 2에서는 적이 평소 가까웠던 사람들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대상의 멘탈을 흔들기 위한 사전작업이죠.”

“그래도 환각 아닌가요?”

이혜성이라면 극복할 수 있을 거다. 김유진은 그렇게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글쎄요. 이 진법이 무서운 건 환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걸려들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환각이니까. 게다가 진법에는 광폭화처럼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키는 마법까지 걸려 있고요.”

막내는 잠깐 손을 멈추고 모니터를 쳐다봤다.

혜성의 발악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아니야! 난 실패하지 않았다고!”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절규했다.

“진짜는 페이즈 3부터. 어떻게든 그 전까지 진법을 멈춰야 해요.”

막내는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바쁘게 제어장치를 조작했다.

***

“개새끼들. 사람을 뭘로 보고.”

혜성은 소매로 땀을 훔치며 주위를 둘러봤다. 호흡이 거칠었다.

메아리 같던 목소리는 사라진 상태. 대신 참혹하게 찢긴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사방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 진정해라. 너 평소와 많이 다른…….

머릿속에서 대수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젠 너까지 잔소리냐? 시끄러워! 주인은 나니까!”

혜성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 뭐?

대수영은 다시 뭐라고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주위가 커튼처럼 수직으로 일렁였다. 현기증이 나 비틀거린 찰나, 공간이 바뀌었다. 이번엔 태양처럼 눈부신 순백의 공간이었다.

“또 뭐야?”

혜성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을 찡그렸다. 환한 빛무리 속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보였다.

“누구……”

그는 중간에 말문이 막혔다.

창백한 피부, 야윈 얼굴, 호흡기와 각종 센서. 환자복을 입은 혜진이가 그를 향해 흐느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게 다 오빠 때문이야. 말해봐. 왜 그랬어?”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뭐?”

혜성은 당황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너만 아니었으면. 그때 그 사고만 아니었으면. 난 지금쯤 대한민국에서 손꼽는 힐러가 돼 있을 텐데.”

태호 녀석이었다. 5년 전, 녀석이 느꼈던 절망과 좌절, 분노가 생생했다.

“시답잖은 영웅 놀이를 하니까 좋니?”

“일, 친구, 가족. 네 그 영웅 놀이 때문에 우린 모든 걸 잃었어.”

좌우에서도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렸다. 부모님이었다. 눈에서 붉은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점점 많아졌다. 친구, 은사, 친한 선후배. 평소 그의 편이라고 생각했던 자들이 원망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포위했다.

-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그들은 저주처럼 외치며 천천히 포위망을 좁혔다.

혜성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피가 맺혔다. 핏방울이 떨어졌지만, 통증을 느낄 틈도 없었다.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는 양손으로 귀를 막고 비틀거렸다. 아니라는 말만 반복하며.

소용없었다. 그들의 말은 소리의 형태가 아닌, 그의 뇌에 직접 파고드는 것이었다.

그들의 저주 같은 목소리가 절정에 달한 순간, 한 가닥 남았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씨발, 왜 다들 나한테만 그래?”

그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절규했다.

콰콰쾅, 그를 중심으로 거대한 녹색 회오리가 솟구쳤다. 그리고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비명을 지르며 돌풍에 갈기갈기 찢겼다.

***

“혜성 씨 상태가 이상한데요?”

모니터를 주시하던 김유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야! 나 때문이 아니라고!”

혜성은 고함을 지르며 회오리바람을 만들고 있었다.

“컥!”

그는 이내 비틀거리며 핏물을 토해냈다. 정신적 타격의 육체적 전이 현상이었다.

그녀는 혜성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붉은 눈동자. 마구잡이 공격. 그리고 이성 상실까지. 능력자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전형적인 광폭화의 증상이었다. 이대로라면 혜성의 정신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다 됐어요!”

막내가 마지막으로 제어기의 실행을 누르며 외쳤다.

파직, 보라색 수정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갔다. 동시에 모니터 속의 공간도 지진이 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성공인가요?”

김유진이 반색하며 물었다.

“네. 성공인 것……”

웃으며 대답하던 막내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제어판 상단, 각종 에너지 수치가 큰 폭으로 증감을 반복했다. 계획대로라면 에너지 수치가 서서히 낮아지는 게 정상이었다. 뭔가 불안정하다는 뜻이었다.

“젠장! 당했다!”

막내는 수치와 제어기를 확인한 뒤, 주먹으로 키보드를 내려쳤다.

“왜 그래요?”

김유진도 덩달아 불안한 표정이 됐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요. 뭘 먼저 듣고 싶어요?”

막내는 울상을 하고 김유진을 바라봤다.

“좋은 소식은 뭔데요?”

“혜성이 형이 있는 진법에 진입했어요. 진법을 깰 수는 없지만, 진법의 발동을 단축할 수는 있게 됐어요. 지금 혜성이 형은 페이즈 2. 중간을 건너뛰고 곧장 마지막 7단계로 진입하는 거죠.”

막내는 최종 단계로의 진입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혜성의 멘탈리티는 페이즈가 진행될수록 떨어질 터. 중간 단계를 건너뜀으로써 그의 멘탈을 최대한 보호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최종 단계만 깨면 진법도 무너지는 건가요?”

“그렇죠.”

막내는 고개를 크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럼 나쁜 소식은 뭔가요?”

“저 새끼들. 외부에서 강제로 진법에 침입할 때에 대비해 함정을 파 놨어요. 이제 곧 진법의 공간 제약성이 무너질 겁니다.”

“공간 제약성?”

김유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진법은 일정한 구역에서만 활성화되죠. 형은 진법의 영향권에 있지만, 구경꾼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게 그 예입니다. 그런데 강제로 7단계로 진입하는 바람에 진법의 활성화 범위가 수백 배로 넓어졌어요.”

“이해가 안 되는데요.”

“쉽게 말해 저 진법이 인사동 전역에 퍼진다는 뜻입니다.”

막내는 난감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네? 인사동에 사람이 한둘도 아닌데. 그 사람들이 전부 진법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제야 김유진도 황당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죠. 남은 시간은 앞으로 5분. 형이 그 안에 최종 보스를 깨지 못할 경우, 저와 누나는 물론이고 인사동의 모든 이들이 죽음의 환각을 경험할 겁니다.”

막내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허!”

김유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인사동 지하.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행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만약 그들이 멘탈을 흔드는 환각을 경험한다면? 생각만으로 몸서리쳐졌다.

“그래도 이제 외부에서 형에게 연락하는 게 가능해요. 이 사실을 빨리 형에게 알려야 해요.”

막내는 제어판 구석의 소형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

“하아, 하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혜성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양손을 내려다봤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팔, 다리, 몸통. 갈기갈기 찢긴 신체의 조각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저주를 퍼붓던 가족과 친구의 얼굴도 보였다. 자신이 직접 찢어낸 흔적들이었다. 살육의 감각이 아직도 손에 생생했다.

“뭘까?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문득 오한을 느꼈다. 처음에는 손끝에서 떨림이 시작됐지만, 곧 몸 전체가 흐느끼듯 떨렸다.

“뭐야? 이제 와 후회하는 거야?”

등 뒤에서 불쑥 차가운 비웃음이 들렸다.

혜성은 힘겹게 상체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곧 눈을 부릅뜨고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가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서 있었다. 그와 반대로 한껏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

사내는 혜성을 놀리듯 히죽 웃었다.

“넌…… 누구냐?”

혜성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나? 알면서 왜 물어? 나는 네가 느끼는 불안과 혼란, 공포와 두려움이다.”

상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검은 정장. 약간 마른 듯하면서도 단단한 체형. 놈은 또 다른 이혜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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