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9.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 (1)
지하 마켓 관리사무소.
“뭐지? 이거 누가 한바탕 크게 쓸고 간 거 같은데?”
막내는 주위를 둘러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곳을 지켜야 할 가드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문은 다 열려 있었고, 각종 장치에 걸린 암호도 다 풀려 있었다. 방어시설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 사이렌만 공허하게 울어댔다.
“밖에서 뭔가 사건이 터진 것 같은데요.”
김유진은 막내의 뒤를 바싹 따랐다. 참혹한 시체들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 와중에도 몰래 현장을 촬영하는 건 잊지 않았다.
남아 있는 가드는 조무래기들뿐. 몇 놈이 어설프게 달려들었지만, 막내의 화염 주먹 한 방에 전부 뻗었다.
얼마 후, 둘은 5층의 넓은 방에 도착했다. 대형 모니터와 각종 장치. 마켓 전체의 경비를 관장하는 통제실인 것 같았다.
두 사내가 앉아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었다. 쥐방울처럼 생긴 사내와 점퍼를 입은 사내였다.
“너 뭐야?”
쥐방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동시에 점퍼를 입은 사내가 단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기세는 요란했지만, 겨우 C급이었다. 퍽, 녀석은 막내의 발길질 한 방에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입구는 막내와 김유진이 막은 상황.
“어디에서 온 놈들이냐?”
쥐방울은 막내를 바라보며 주춤 물러섰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마켓의 가드나 매니저는 아닌 것 같고. 너흰……”
막내는 녀석에게 다가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눈을 크게 부릅뜬 채로. 그의 시선은 쥐방울 뒤쪽의 모니터로 향해 있었다.
모니터에는 광장의 상황이 나오고 있었다. 한 남자가 가드들과 싸우는 중이었다.
퍼퍼펑, 그가 손발을 휘두를 때마다 녹색 돌풍이 불어와 가드들을 날려버렸다. 문제는 숫자. 그가 가드들을 휩쓸고 다녔지만, 가드들의 숫자는 오히려 계속 늘어났다.
막내는 사내의 방어구에 주목했다.
“저건 설마?”
김유진도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 분명 혜성의 시그니처 방어구였다.
“혜성이 형? 형이 거기서 왜 나와?”
막내는 멍한 표정으로 모니터 속의 혜성을 주목했다.
***
- 3시, 5시, 11시 방향.
머릿속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경고했다. 정신없었다. 가드 세 놈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그의 머리와 허리, 다리를 공격했다.
“알아!”
혜성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는 이미 좌우에서 공격해 오는 다른 놈들을 상대 중이었다. 세 놈의 공격은 방어구만 믿고 무시했다.
부웅, 갑옷이 머리와 등을 집중적으로 보호하는 형태로 변했다. 하지만 하체까지 감싸려는 찰나, 가드의 발이 먼저 그의 발목을 후려쳤다.
“크윽!”
혜성은 신음을 삼키고 비틀거렸다.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듯한 통증이었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사이에도 가드들의 공격은 사방에서 몰아쳤다.
“제길!”
혜성은 양팔을 좌우로 곧게 뻗었다.
펑, 높이 5m의 녹색 회오리가 일어났다. 가드들이 순간적으로 주춤거렸다. 그 순간, 그는 분수를 등지고 물러나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헉헉. 정말 개떼처럼 몰려오는군. 지하 마켓의 가드 전체에 최면을 걸었나?”
호흡이 거칠어졌다. 남은 체력은 평소의 약 20% 정도. 가드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돌진해서 그의 체력을 갉아먹었다.
“소모전을 벌일 생각이군.”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놈들은 최면에 빠진 상태. 최면술사로선 가드들이 럭키 펀치라도 한 대 성공시키면 남는 장사였다.
“죽어!”
가드들이 다시 앞과 옆, 위에서 몰려들었다. 가드들의 숫자는 더 많아졌다. 이미 스무 명 정도 쓰러뜨렸지만, 아직도 열 명이 넘게 남아 있었다.
콰앙, 놈들의 뒤쪽에서 거대한 지진이 일었다.
“뭐야?”
주먹을 뻗으려던 혜성, 달려들던 가드, 주위의 분수대와 기물들이 전부 흔들렸다.
강지영을 지키던 웅이 등장한 것이다. 일전에 겨뤘을 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푸른 서기가 녀석의 등 뒤에서 은은하게 후광처럼 비치고 있었다.
‘버퍼? 강지영인가?’
혜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버퍼나 디버퍼 등의 보조 술사는 각성자 중에서도 1% 남짓. 원체 희귀하기 때문에 낮은 등급도 몸값이 하늘을 찔렀다. NSA에서도 버퍼는 특수 작전에나 한 명씩 투입됐다.
토(土) 속성 능력자.
웅은 발을 크게 굴렀다. 지진이 난 듯 땅이 흔들리고 갈라졌다.
가드들은 온통 혜성에게만 정신이 쏠린 상태. 뒤에서 웅의 기습을 받자 균형을 잃고 튀어 올랐다.
그 순간, 녀석이 제자리에서 다시 발을 크게 굴렀다.
퍼퍽, 땅에서 날카로운 창들이 솟아 나와 가드들을 꿰뚫었다.
“크악!”
가드들은 혜성에게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솟아난 창을 타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즉사는 면했지만 전투 불능 상태였다.
“웅!”
웅이 그렇게 말하며 혜성을 향해 빙긋 웃었다. 좀 모자란 녀석이었다. 할 수 있는 말은 ‘웅’ 하나뿐인 것 같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믿음직해 보였다.
“씨발, 좀 일찍 나올 것이지.”
혜성은 악의 없는 욕설을 내뱉으며 엄지를 내밀다가 표정이 굳어졌다.
우측으로 20m쯤 떨어진 골목 어귀.
“이야, 역시 이혜성. 동료도 대단하군.”
요란한 박수와 함께 뚱뚱이가 등장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냉소적인 표정의 홀쭉이가 서 있었다.
***
“너희였냐?”
혜성은 놈들을 보자마자 눈이 뒤집혔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놈들에게 달려들려다가 멈칫했다.
“웅!”
웅이 그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면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히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었다.
“세상 참 좁군. 안 그래도 널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딱, 홀쭉이가 오른손을 들고 엄지와 중지를 튕겼다. 이어서 가드 십여 명이 추가로 놈들의 뒤에 나타났다.
“이 새끼가.”
다시 혜성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호흡기를 달고 있는 혜진의 얼굴이 두 놈의 모습에 겹쳐졌다.
“자자, 그렇게 흥분하지 말라고. 우린 적이 아니니까. 내 말 좀 들어보겠어? 넌 왜……”
뚱뚱이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의외로 나긋나긋하면서도 귀에 쏙 들어오는 목소리였다.
“크아아아!”
혜성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함쳤다. 놈보다 더 큰 목소리로.
놈의 말은 그의 괴성에 묻혀 사라졌다. 놈들은 최면술사. 괜히 놈들이 수작을 부릴 틈을 줘서는 안 됐다.
“오, 제법 공부 좀 했는데?”
뚱뚱이는 하던 말을 멈추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봤자지.”
이번에는 홀쭉이가 차갑게 비웃으며 오른손을 들었다.
홀쭉이와 뚱뚱이, 그리고 가드들이 주위에서 동시에 말을 내뱉었다.
- 대한민국 수호? 그런다고 국가가 널 진심으로 인정해줄 것 같아?
- 황석구 봤지? 영웅으로 칭송받던 헌터가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 너처럼 대단한 능력자가 왜 못난 이들을 위해 힘을 써야 해?
- 세상은 약육강식. 넌 세상에 군림할 자격이 있다고.
여럿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뱀들이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혜성은 당황했다. 두 놈을 중심으로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크으윽!”
괴로웠다. 그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몸부림쳤다. ‘이건 최면이다. 놈들의 말에 현혹돼선 안 된다.’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점점 의식이 몽롱해졌다.
“오, 우리에게 저항을 해? 이거 정신력이 생각 이상인데?”
뚱뚱이가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놈들의 말은 점점 크고 또렷해졌다.
“으아아!”
혜성은 머리를 감싸 쥐고 무릎을 꿇었다. 최면에 당하는 건 처음.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그때, 고통과 몸부림이 절정에 달한 순간이었다.
부웅, 검은빛과 함께 혜성의 보호구가 변했다. 귀를 삼중으로 막는 투구 형태였다. 뱀들의 속삭임은 먼 메아리처럼 옅어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크으!”
혜성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온몸은 식은땀투성이. 하지만 목소리가 사라지자, 심신이 빠르게 안정됐다.
“다중 최면을 막아낸 거야?”
홀쭉이는 말을 멈추고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뚱뚱이와 다른 가드들도 흠칫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뭐라는 거야. 이 새끼들아. 빨리……”
혜성이 놈들을 노려보며 한창 말하는 도중이었다.
부웅, 옆에서 주먹이 기습적으로 날아왔다. 묵직한 파공음과 함께. 대수영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공격이었다.
쾅, 혜성은 옆구리를 맞고 분수 안으로 날아갔다. 대리석으로 만든 분수는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고, 그 안에 담긴 물은 무지개를 만들며 사방으로 튀었다.
“설마 그 정도로 죽은 건 아니겠지?”
뚱뚱이가 조소를 머금고 비웃는 가운데, 분수 안에서는 정적이 흘렀다.
“쿨럭!”
잠시 후, 혜성은 흠뻑 젖은 몰골로 분수대를 짚고 일어섰다. 엷은 핏물이 섞인 기침을 해대며. 옆구리가 시큰한 게 갈비뼈가 부서진 것 같았다.
“뭐지?”
처음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젠장.”
혜성은 쓰게 웃으며 웅을 쳐다봤다.
충혈된 눈, 핏대가 솟은 관자놀이, 벌어진 입. 웅은 최면에 걸려 있었다.
“넌 우리의 최면을 용케 막아냈지만, 네 친구는 그게 아닌 것 같군. 녀석은 너와 겨뤄보는 걸 일생의 영광이라고 생각하거든. 크크크.”
홀쭉이는 히죽 웃으며 그를 조롱했다.
앞에는 웅, 옆과 뒤에는 가드들.
마음은 여전히 전의에 불탔지만, 혜성의 몸과 마음은 서서히 지쳐갔다.
***
관리사무소 통제실.
“저놈들인가? 혜성이 형의 동생을 망가뜨린 게?”
막내는 모니터를 주시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동시에 한편으론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의 최면에 걸린 자를 이용해 다시 최면을 건다고? 혹시 CP가 장현수에게 최면을 건 것도 이 수법이었나?’
뚱뚱이와 홀쭉이.
이름도 모르는 놈들이었지만, 높은 등급의 최면술사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최면을 거는 건 TV에서 가끔 봤지만, 최면과 함께 자신의 능력 일부도 전해주는 건 처음이었다.
예상대로 혜성은 고전하고 있었다. 곰 같은 거한에 가드들까지. 대수영과 암흑의 수호자 덕분에 치명상은 면하고 있지만,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대로는 혜성 씨가 위험해요.”
김유진이 다급하게 외쳤다.
막내는 고개를 끄덕인 뒤 모니터 아래의 설비로 다가갔다. 그 앞에는 쥐방울이 둘의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 서 있었다.
“으아아아!”
녀석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래 봐야 B급. 쿠당탕, 녀석은 그의 발길질 한 방에 구석으로 나가떨어졌다.
막내는 모니터 아래의 설비를 훑어봤다. 특수 키보드와 장치들이 복잡하게 배열돼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설비를 살피다가 쥐방울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크크크. 늦었다. 이미 진법을 발동시켰거든.”
쥐방울은 소매로 입가의 피를 훔치며 히죽 웃었다. 막내와 김유진이 모니터에 잠깐 정신이 팔린 사이, 놈이 팔을 뒤로하고 설비를 조작한 것이다.
“이 개새끼가!”
막내는 녀석에게 달려들어 턱을 걷어찼다. 쾅, 놈은 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힌 후 그대로 기절했다.
“이걸 어쩌죠?”
막내는 난감한 표정으로 모니터의 우측 하단을 주목했다. 쥐방울이 서 있던 자리였다.
손바닥만 한 수정이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수정은 진법의 에너지원. 이미 진법이 발동됐다는 뜻이었다.
“설마 그 죽음의 진법이요?”
김유진도 경악했다.
“네. 어떻게든 중지시켜야 해요.”
막내는 모니터를 힐끔거리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강제로 수정을 빼는 건 불가능. 시스템이 고도로 암호화돼 있어 해제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했다.
그는 문득 혜성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적들의 차량이 정면으로 돌진해오던 상황.
“가즈아아아!”
가속페달을 밟으며 괴성을 지르던 혜성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래. 혜성이 형은 죽음을 즐기는 또라이 기질이 있지. 형이라면 진법을 깰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이 점점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