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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순직이 힘들다-28화 (28/150)

# 028. 내가 싸우는 이유 (4)

위잉!

사이렌이 자지러지듯 울어댔다. 깜빡이는 붉은 조명, 연달아 들리는 폭발음, 사람들의 고함과 비명, 허겁지겁 달려가는 가드들까지.

활기 넘치던 지하 마켓은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했다.

“저 새끼들, 정체가 뭐야? 첩보 기관이나 암살자들 아니었어? 마켓을 뒤집어엎으려는 거야, 뭐야?”

쥐방울은 욕설을 퍼부으며 허겁지겁 귀중품을 챙겼다.

첩보 기관이나 암살자 하면 흔히 떠오르는 것들. 은밀한 잠입과 염탐, 음모, 배신, 추격전 등은 없었다.

한 팀은 관리사무소를 습격했고, 다른 한 팀은 폭발물 가게에서 다짜고짜 행패를 부렸다. A급 가드들? 그들은 먼지 나게 털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선 애초의 계획대로 놈들을 은밀히 유인하는 게 불가능했다.

“비상, 비상입니다. 지금 매니저들이 형님 찾는다고 난립니다.”

검은 점퍼를 입은 사내가 뛰어 들어와 보고했다.

“나도 알아, 새끼야!”

쥐방울은 사내를 째려보며 괜히 신경질을 부렸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금 기세로 봐선 진법도 장담 못 합니다.”

“소나기는 피하라고 했잖아. 잠깐 몸을 피한 다음에……”

쥐방울은 짐을 싸다가 돌연 멈칫했다.

“아니지. 굳이 내가 도망칠 이유가 없잖아?”

녀석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걸렸다.

“뭔가 좋은 생각이 있는 겁니까?”

“그래. 작전을 변경한다. 중간 과정은 다 생략하고, 최종 계획대로 양쪽을 직접 대면시키면 되는 거 아닌가?”

쥐방울은 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부웅, 그가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먼저 전화가 울렸다. 마켓의 책임자급 매니저였다.

“형님. 저 쥐방울입니다.”

“야, 이 미친……”

스피커 너머에서 다짜고짜 욕설이 들렸다. 순간적으로 고막이 얼얼했다.

쥐방울은 인상을 찌푸리고 핸드폰을 귀에서 떼었다. 이윽고 욕설이 잠잠해질 즈음, 그는 다시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

“잘못은 나중에 따집시다. 일단 놈들을 제거하는 게 먼저 아닙니까? …… 네, 네. 알겠습니다. …… 일단 진법의 발동은 멈춰 주십시오.”

다시 큰 욕설이 들렸다. 쥐방울은 잠깐 귀를 막았다가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닙니다. 놈들끼리 싸우게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놈들이 지쳤을 때, 진법을 발동시키는 거죠. …… 네, 그렇죠. 그러니 먼저……”

쥐방울은 뭔가를 길게 설명했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그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반대로 매니저의 욕설은 점점 잦아들었다.

“미친놈들.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똑똑히 가르쳐 줍시다.”

이윽고 쥐방울은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위복. 잘하면 일이 빨리 해결될 것 같았다.

***

불타는 금요일.

- 5시 방향!

머릿속의 목소리가 경고음을 보냈다.

눈앞에 환상이 펼쳐졌다. 가드 한 놈이 뒤에서 펀치를 날리는 장면이었다. 목표는 상대의 뒤통수. 주먹에는 녹색 돌풍이 맺혀 있었다.

혜성은 정면에 있는 가드의 턱에 오른손으로 어퍼컷을 날린 상태였다. 뒤쪽의 기습은 무시. 비틀거리는 가드의 관자놀이에 왼손으로 훅을 날렸다.

주먹에 묵직한 느낌이 왔다. 정면의 가드는 게거품을 물고 허물어졌다.

쾅, 동시에 혜성의 뒤통수에서도 강한 타격음이 들렸다.

“끄아악!”

비명이 터졌다. 혜성의 것이 아니었다. 뒤에서 공격했던 가드가 주먹을 감싸 쥐고 비명을 질렀다.

암흑의 수호자.

혜성의 검은 정장이 뒤통수를 감싸는 투구 형태로 변했다. 그것도 강철 가시가 잔뜩 돋친 형태로. 가드의 피가 가시 끝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흥!”

혜성은 몸을 빙글 돌렸다. 그의 오른발이 채찍처럼 휘어져 놈의 머리를 후려쳤다.

가드는 급히 두 팔을 교차해 방어했다. 소용없었다. 현재 혜성은 2차 각성 상태. 그의 발에 맺힌 돌풍은 가드를 멀리 날려 보냈다.

“크헉!”

쾅, 가드는 문을 뚫고 10m를 날아가 맞은편 가게에 처박혔다. 옆으로 꺾인 놈의 머리 위로 콘크리트 파편이 우르르 떨어졌다.

“후우.”

혜성은 호흡을 길게 내뱉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가게는 난장판이었다. 부서진 집기와 아이템, 피떡이 돼 쓰러진 가드 8명이 보였다.

“아이고,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주인은 팔로 머리를 감싼 채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혜성의 2차 각성을 보고 겁에 질린 탓인지 도망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상한데?”

혜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뇌전의 광견, 차성진, 장현수 등. 지금까지 대적했던 AA급들에 비하면 가드는 식은 죽 먹기였다. 문제는 진법. 보라색 구체가 보이지 않았다.

“왜 진법이 안 나오죠? 경계태세가 마비된 걸까요?”

강지영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웅의 뒤에서 나왔다. 주위는 온통 폭풍이 할퀴고 간 것 같았지만, 그녀의 옷에는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방해자는 없어진 것 같고. 우리 진지하게 대화 좀 나눠볼까?”

혜성은 주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그냥 가져가시라고요.”

주인은 무릎을 꿇고 울먹였다. 얼굴은 사색이 됐다.

“별거 아냐. 하나만 알려주면 돼.”

혜성이 막 주인의 앞에 쪼그려 앉으려는 찰나였다.

시끄럽게 울리던 사이렌이 돌연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대신 안내방송과 함께 천장에 거대한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뭐지?”

혜성을 비롯한 모두는 일제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

지하 마켓 동쪽.

“어라? 뭐지?”

“큰일이라도 터진 건가?”

김유진과 막내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사이렌, 폭발음, 고함.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래?”

“이런 일은 처음이잖아. 협회라도 들이닥친 건가?”

상인들은 급히 물건을 정리하고 셔터를 내리고 있었다. 그들도 영문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파앗, 천장에 직사각형 형태의 스크린이 펼쳐졌다. 이어서 스크린 좌측에는 평범하게 생긴 2남 1녀가, 우측에는 뚱뚱이와 홀쭉이가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누군지 아세요?”

김유진이 볼펜으로 스크린을 슬쩍 가리키며 물었다. 물론 볼펜은 가짜. 심에는 소형 렌즈가 달려 있었다.

“글쎄요. 낯선 얼굴인데. 가면이라도 쓴 건가?”

막내는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몇몇 인상이 비슷한 능력자들이 떠올랐지만, 다들 지하 마켓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었다.

잠시 후 동굴에서 메아리가 울리듯 커다란 음성이 흘러나왔다.

- 침입자들에게 알린다. 너희가 찾고 있는 자는 우리가 보호하고 있다. 지금부터 10분 후. 마켓 중앙의 광장으로 오라.

주위가 시끄러워 중간에 말이 많이 끊겼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누군가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아요.”

김유진이 다시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대박.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가드와 진법을 무시할 정도라.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강한 것 같군요.”

막내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우리도 광장으로 가 볼까요?”

“아뇨. 그보다 더 좋은 생각이 있어요.”

막내는 북쪽을 응시했다. 약 500m 전방. 거대한 시계탑이 솟아 있었다. 김유진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시계탑으로 향했다.

“가드와 경계 시스템은 침입자들에게 집중됐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이 바로 기회. 관리사무소의 중요한 자료를 터는 게 어때요?”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김유진은 잠시 고민했다.

지금이 둘도 없는 기회라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옆에는 NSA의 요원도 있었다.

“좋아요. 한번 해 봐요!”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

광장으로 이어지는 대로변.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우리 말고 다른 침입자가 있었나?”

혜성은 달리던 와중에 문득 쓴웃음이 나왔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우리와 같은 자를 찾고 있는 것 같아요. 대체 누가?”

옆에서 강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혜성이 조금 속도를 늦추긴 했지만, 그녀는 뒤처지지 않고 잘 따라왔다.

“아마 차성진의 배후나 그 동료일 겁니다. 그들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혜성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그는 차성진의 배후를 잡기 위해 쥐방울이란 장물아비가 필요한 터. 반면 블랙은 자신들과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쥐방울을 제거해야 했다.

‘쥐방울 녀석. 혹시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우리를 유인한 건가?’

이런 의심이 들었지만, 혜성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후 사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쥐방울. 다른 놈들보다 먼저 쥐방울을 확보해야 했다.

마침 주위에 널린 게 아이템을 파는 노점들이었다. 다들 황급히 짐을 싸고 있었지만, 아직 반도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혜성은 그중에서 회복과 관련된 약물들을 닥치는 대로 들고 도망쳤다.

“야, 이 새끼야! 돈은 내야지!”

뒤에서 주인의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가볍게 무시하고 약물들을 들이켰다. 파지직, 뿌연 빛이 뿜어지더니 2차 각성의 징후가 서서히 옅어졌다.

“혜성 씨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좀 신중할 필요가 있어요. 당장 지금만 해도 광장에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르죠. 그러니 잠깐 근처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자고요.”

강지영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번엔 저도 신중하게 나서겠습니다.”

혜성은 그녀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진법이 나타나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렸다.

곧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작은 분수대가 인상적인 중앙 광장이었다. 지하 마켓의 중심지. 평소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이 북적거렸지만, 지금은 회색 보도블록만 보였다.

혜성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아직 2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그들은 일단 골목 어귀로 들어갔다.

“하아, 하아.”

그들은 호흡을 가다듬고 잠시 대기했다.

혜성의 2차 각성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 뒤늦게 대검이 떠올랐지만, 아쉽게도 무기점은 전부 셔터를 내린 뒤였다.

“대체 어떤 놈들이지?”

혜성은 눈을 빛내며 광장을 주목했다.

곧 누군가가 북쪽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숫자는 열둘. 분수를 중심으로 가로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어?”

혜성은 순간 당황했다. 나타난 건 가드들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드들의 움직임이 하나하나 그의 눈동자에 새겨졌다. 어색한 움직임, 관자놀이의 핏대, 괴상한 살기.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충혈된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장현수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설마 그놈들이 나타난 건가?”

혜성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심장의 터질 듯한 박동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가드들 뒤쪽으로 향했다. 스크린에 나왔던 이인조는 보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조금 전의 약속은 취소해야겠습니다.”

그는 가드들을 노려보며 나직이 말했다.

“네? 뭘요?”

강지영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이번엔 신중하게 나서겠다는 약속 말입니다. 제가 싸워야만 하는 이유를 생각보다 빨리 찾았거든요.”

혜성은 잠깐 말을 멈췄다. 눈에 서린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혜성 씨. 이건 분명 함정일 거예요. 잠깐……”

강지영이 팔을 잡았지만, 그는 간단히 뿌리쳤다. 그녀의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나도 내일은 없다. 오늘 끝장을 보자.”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광장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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