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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순직이 힘들다-27화 (27/150)

#027. 내가 싸우는 이유 (3)

“와. 지하에 이런 데가 다 있었나?”

혜성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지하 마켓.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수상한 사람들이 밀거래나 하는 곳이 아니었다.

높은 천장에 빛을 뿜는 아이템이 있는 것만 다를 뿐. 전체적인 느낌은 인사동 전통거리와 비슷했다.

각종 아이템을 파는 가게와 노점상 외에 식당, 주점, 카페 등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아이템 가공술은 우리나라가 제일이잖아요. 대한민국뿐만이 아니라 일본, 중국은 물론 아시아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더군요.”

강지영이 웃음기를 머금고 말했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였다. 한, 중, 일은 물론 동남아와 러시아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혜성은 신기해하며 구경하다가 한 노점 앞에서 발을 멈췄다. 수레 앞에 각종 약품 병들이 널려 있었다.

“순록의 눈물? 이거 A급 재료 아냐?”

그는 수레의 표시판을 보고 흥미를 보였다.

힐러들이 각종 영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그만 좀 다쳐라, 너 때문에 병원에 약물이 남아나질 않는다.’라고 투덜거리던 태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고, 어서 옵쇼. 한번 직접 보십쇼.”

검은 점퍼를 입은 노점상이 넉살 좋게 웃으며 손을 잡아끌었다.

혜성은 못 이기는 척 따라갔다. 강지영과 웅도 마지못해 뒤따랐다.

“얼마입니까?”

혜성은 안약처럼 생긴 작은 병 하나를 들고 물었다.

“얼마 안 해요. 하나에 천만 원인데, 특별히 오백에 모실게. 열 개 사시면 서비스로 하나 더 드리고.”

상인은 약품의 특성과 효능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뭐? 오백? 오백만 원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혜성은 약병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오백은 개뿔. 오만 원도 안 하겠는데.”

옆에서 강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약병을 만지작거리다가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이거 함량이 너무 낮아요. 별 효과가 없을 거라고요. 사기꾼 새끼.”

“네?”

혜성은 눈에 불을 켜고 상인을 노려봤다.

“아, 아이템 보는 눈이 좀 있으시군요.”

상인은 당황하다가 수레 밑에서 007가방을 주섬주섬 꺼냈다.

“이건 어떠십니까? 아주 재미있는 물건입니다.”

그는 억지로 웃으며 가방을 열었다. 새끼 손가락보다 작은 사이즈의 앰플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재미있는 물건? 재미없으면 너도 같이 재미없을 줄 알아.”

강지영은 피식 웃으며 아이템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이건 그나마 쓸만하네. 백만 원.”

“아니, 이거 원가가……”

“이 새끼가 누굴 호구로 아나? 원가 계산해서 백만 원이야. 싫으면 말고.”

강지영은 약병을 내려놓고 혜성의 손을 끌었다.

“아이고, 알았습니다. 그냥 개당 백에 드릴게요.”

“다섯 개에 서비스 하나. 알지?”

“네.”

상인은 울상을 하고 아이템을 핸드폰만 한 케이스에 담았다.

혜성은 수레 위의 약병과 가방 안의 약병을 손에 하나씩 들었다. 무게, 색깔 전부 동일. 육안으로 봤을 때는 별 차이를 못 느꼈다.

‘아이템에 대해 어떻게 저렇게 잘 알지? 역시 강지영도 숨은 능력자인가?’

혜성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거칠게 말하는 게 조금 깨긴 했지만, 아이템 감별에 아주 능숙해 보였다.

그녀는 그 외에도 이것저것 회복 아이템을 챙겼다. 무려 이천만 원어치.

“카드는 당연히 안 될 테고. 순금 받지?”

강지영은 백팩에서 얇은 순금 카드를 꺼내 계산했다. 그런 뒤 케이스를 받아 혜성에게 내밀었다.

“저 주시는 겁니까? 이 비싼 걸.”

혜성은 선뜻 못 받고 망설였다.

“괜찮아요. 지난번에 신세 진 것도 있고. 이 정도는 선물로 사줄 수 있어요.”

그녀는 반강제로 케이스를 혜성의 재킷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감사합니다.”

혜성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등을 툭 치고 지나갔다. 몸이 옆으로 기우뚱했다.

“뭐야?”

그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드 여섯에게 둘러싸인 뚱뚱이와 홀쭉이가 보였다.

“가드가 고객을 호위하네?”

“어디서 VIP라도 왔나?”

지나던 사람들은 그들을 힐끔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높은 시계탑 방향. 시계탑의 바늘은 막 오후 5시를 지나고 있었다.

“저긴 어딥니까?”

혜성은 시계탑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 여기 처음이시구나? 저긴 관리사무소예요. 여기서 물건 파는 사람은 누구나 저기에 등록해야 하거든요.”

상인은 007 가방을 도로 싸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저기에 가면 누구든 다 찾을 수 있겠네요?”

혜성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뭐, 그럴 겁니다. 하지만 괜히 근처에 얼씬하지 마세요.”

“왜요?”

“가드나 소수의 관리자만 출입할 수 있거든요. 가드의 인장 없이 들어가면 바로 진법이 발동될 거라고요.”

“흠. 진법이라.”

혜성은 팔짱을 끼고 턱을 쓰다듬었다. 상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관리사무소에 흥미가 동한 모양이었다.

“아참. 불타는 금요일이라고 알아?”

이번엔 강지영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사실 그녀가 노점을 들른 진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어? 알죠. 폭발물을 전문으로 파는 곳인데요. 왜? 불꽃놀이라도 하시게?”

“아니. 찾는 아이템이 있어서. 그런데 여기가 너무 복잡해서 어디 있는지 모르겠네.”

“아. 거긴……”

상인의 설명이 거의 끝날 무렵.

“와아, 싸움이다!”

몇몇이 함성을 지르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처음에는 한둘이었지만 숫자가 곧 많아졌다.

“싸움?”

혜성과 강지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서로를 쳐다봤다.

“여기서 싸움 난 거 못 봤죠? 한번 가 봐요. 아주 재미난 구경을 할 테니까.”

상인도 손바닥을 비비며 히죽 웃었다.

“여기는 싸움이 금지라고 안 했나?”

혜성은 잠깐 망설인 뒤, 사람들이 몰려가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좌우에 노점이 늘어선 대로변.

사내 둘이 시비가 붙었다. 낮술이라도 걸쳤는지 다들 얼굴이 발그레했다.

혜성은 둘의 주위를 둘러봤다. 깨진 술병, 부서진 탁자와 바닥에 흩어진 아이템들이 보였다. 대충 상황이 짐작됐다. 상인이 술 취한 놈에게 바가지를 씌우려다가 시비가 붙은 것 같았다.

지하 마켓에 출입할 정도면 꽤 거친 자들이었다. 처음엔 욕설만 주고받았지만, 곧 서로의 멱살을 잡고 드잡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오오, 정말 한판 하는 건가?”

“말만 하지 말고 빨리 주먹을 날려!”

구경꾼 몇 놈이 기대에 찬 얼굴로 재촉했다.

퍽, 결국 손님으로 보이던 자가 먼저 주먹을 날렸다.

“이 새끼가!”

맞은 놈도 비틀거리다가 발길질로 응수했다. 순식간에 두세 대가 반사적으로 오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차!”

둘은 곧 사색이 됐다.

고오오, 둘을 중심으로 검은 바람이 휘몰아쳤다. 마치 둘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곧 어두운 보라색 구체가 생겼다. 직경은 약 5m. 돌풍과 함께 급속도로 팽창했다.

“안 돼!”

둘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려 했다. 바람이 더욱 강해졌다.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걸어갔지만, 자석에 끌리듯 천천히 뒤로 딸려갔다.

콰쾅, 곧 폭발과 함께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혜성과 구경꾼들은 소매로 눈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어라?”

얼마 후 시야가 돌아왔을 때, 혜성은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봤다.

둘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거대한 보라색 구체가 그들이 있던 곳에 둥실 떠 있었다. 보라색 구체 안의 다른 공간, 일명 아공간에 삼켜진 것 같았다.

“저게 바로 사신의 축복인가 봐요. 분위기를 보니 암흑 속성의 진법이에요.”

강지영이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혜성도 가드에게 들었던 주의사항을 떠올렸다. 문제가 생기면 보통 가드들이 나서서 처리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가드가 없을 때는 저 진법이 자동으로 발동된다고 했다.

십분 후. 구체가 사라지고 두 사람이 허공에서 떨어졌다.

“헉!”

혜성은 비명처럼 짧게 숨을 들이켰다.

비쩍 마른 시체 두 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온몸의 수분을 모두 빨린 듯 뼈와 가죽만 앙상했다.

혜성은 둘의 얼굴을 주목했다. 눈은 크게 부릅떠져 있었고, 머리칼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진 내부에서 뭔가 끔찍한 경험을 한 것 같았다.

“정신 계통의 진법이군요. 신체적 등급도 중요하지만, 정신력이 얼마나 강한가가 더 중요할 거예요.”

다시 강지영의 속삭임이 들렸다.

‘그러고 보니 정신 계통의 능력자와 싸운 적은 없었지.’

혜성은 한참 동안 시체를 바라봤다.

최면술사. 암흑 속성의 진법.

만약 여기서 적들과 싸움이 벌어진다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

“불타는 금요일.”

혜성은 간판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폭발물 전문점에 딱 맞는 이름이었다.

“일단 여기부터 시작하죠. 명심해요. 오늘은 마켓을 둘러보고 업자들과 안면을 트는 게 목적이라는 걸.”

강지영은 재차 주의를 준 후 안으로 들어갔다. 혜성과 웅은 고개를 끄덕이고 뒤따랐다.

서른 평가량의 실내.

취급 주의라는 안내문과 각종 폭발물이 진열돼 있었다.

“이건 뭐야?”

혜성도 처음 보는 아이템이 많았다. 첨가 진열장에 상체를 가까이하고 한참 동안 설명을 읽었다.

“여기 있는 건 다 견본이나 위력이 약한 겁니다. 천천히 둘러보시고,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배불뚝이 주인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그들을 따라왔다.

“왜 이렇게 사람이 없죠?”

혜성은 가게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물었다.

“지난번에 여의도에서 폭발물로 테러가 있었잖습니까? 그것 때문에 요즘 몸을 사리는 눈치입니다.”

“그런가? 그런데 좀 실망이네요. 우린 좀 특별한 걸 찾고 있는데.”

“뭔데요?”

주인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어떤 물건이든 일주일 안에 구할 수 있다고 자랑하면서.

혜성은 주인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차성진이 여의도에서 쓴 것과 같은 물건.”

“뭐?”

주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강지영도 당황한 표정으로 혜성의 옆구리를 찔렀다.

혜성은 강지영의 시선을 모른 척했다.

동생의 복수. 남은 시간은 5개월 남짓.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이 두 개만 들어있었다.

강지영의 방법대로 하나씩 단계를 밟는다? 그랬다간 놈들을 찾는 데 몇 달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사이 놈들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칠 수도 있었다.

‘돌직구. 오직 직진뿐이다.’

혜성은 어금니를 악물고 상대를 노려봤다.

가드들의 등급은 A. 숫자가 좀 많았지만, 뇌전의 광견이나 장현수 등에 비하면 한 단계 아래였다. 문제는 정신 계통의 괴상한 진법.

‘가능할까? 아니, 가능해야 한다!’

진법은 본래 게이트의 흑마법사에게서 유래된 것이었다. 각종 환영으로 정신 데미지를 주는 원리. 그리고 정신 데미지도 데미지였다. 이론상으로는 진법 안에서도 2차 각성을 할 수 있었다.

“너 이 새끼들. 정체가 뭐냐? 왜 차성진을 찾는 거지?”

주인은 혜성을 노려보며 뒷걸음질 쳤다. 얼굴에 긴장과 경계가 가득했다.

“구할 수 있어, 없어? 그것만 대답……”

혜성의 말은 여기까지.

쾅, 문을 박차고 검은 그림자들이 뛰어 들어왔다. 숫자는 셋. 정장과 선글라스, 흰 장갑으로 대표되는 지하 마켓의 가드들이었다.

“이렇게 빨리? 혹시 우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감시가 붙었나?”

예상은 했지만, 혜성은 조금 당황했다.

“병신들. 여기가 그렇게 만만한 데로 보이냐? 네놈들 정체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좀 맞고 시작하자.”

주인은 가드들 뒤로 물러서며 태도를 바꿨다. 자신만만.

‘강지영에겐 미안하지만, 차라리 잘 됐다. 여길 다 뒤집어엎자.’

혜성은 강지영을 힐끔 돌아봤다. 그녀는 보디가드인 웅의 뒤에 서 있었다.

“너, 정체가 뭐야?”

“정부 소속이냐?”

가드들의 주먹에 녹색 돌개바람이 작게 맺혔다.

‘이번엔 바람 속성의 능력자들인가?’

혜성은 놈들의 주먹을 내려다보며 전의를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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