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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순직이 힘들다-26화 (26/150)

# 026. 내가 싸우는 이유 (2)

오후 3시, 안국역 근처 커피숍.

“또 검은 정장에 흰 셔츠, 검은 넥타이. 자기가 무슨 이혜성이야?”

“야, 들리겠다.”

“들리면 어때?”

여자 둘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수군거렸다.

“젠장.”

혜성은 눈가를 붉히며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가린 게 다행이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을 확인했다. 언제나처럼 반은 자신과 관련된 뉴스였다.

- 이혜성, 패션의 아이콘 등극.

- 등산복, 롱패딩에 이은 이삼십대 남성들의 워너비. C 브랜드 정장.

- 남성 정장 C 브랜드의 행복한 비명. 매출액 500% 증가.

체사레 뭐라고 했더라? 발음도 어려운 브랜드였지만, 혜성이 장현수와의 대전에서 입은 후 판매량이 폭증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놈의 겸직금지 조항만 아니었어도 협찬으로 돈 좀 만질 수 있었을 텐데.”

혜성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주위를 돌아봤다.

이삼십대 남성 중 열에 일곱 정도는 그와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검은 정장과 흰 셔츠, 검은 넥타이. 그 덕분에 암흑의 수호자를 항상 입고 다닐 수 있었지만, 한편으론 쓴웃음이 나왔다.

딸랑, 커피숍 문이 열리고 남녀가 차례로 들어왔다. 모델처럼 늘씬한 여자와 곰처럼 우락부락한 남자. 둘 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들의 정체는 바로 강지영과 그 보디가드였다. 둘은 혜성의 앞에 나란히 앉았다.

“미안해요. 일이 좀 있어서.”

강지영이 짐짓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방금 도착했으니까.”

“이 녀석 아시죠? 박웅이라고. 제 보디가드예요. 그냥 웅이라고 부르세요.”

그녀는 왼쪽에 앉은 보디가드를 힐끔 쳐다봤다.

웅은 혜성을 수줍게 쳐다보곤 고개를 숙였다. 곰처럼 큰 사내가 이러니 혜성은 문득 소름이 돋았다.

“제가 준비는 다 끝냈어요. 가시죠.”

강지영은 주위를 둘러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웅에게 집중된 시선들이 영 거슬렸다.

***

혜성이 커피숍을 나간 직후.

“요즘엔 개나 소나 다 우리 혜성 씨 패션이라니까.”

그녀는 아메리카노를 내려놓으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근처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회사원 같았다. 목에 걸린 사원증에 김연우라는 이름이 선명했다. 동그란 얼굴형과 동그란 안경. 약간 푼수기가 있는 인상이었다.

“야, 누구 마음대로 우리 혜성 씨냐?”

김유진은 문가를 힐끔 쳐다보며 쓰게 웃었다.

모델처럼 늘씬하게 생긴 남녀가 막 문을 나가고 있었다. 뒤에서 보니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저런 짝퉁들 때문에 곤란하다니까. 우리 혜성 씨는 말이야. 자나 깨나 조국 수호만 생각하는 영웅이자……”

우리 혜성 씨. 또 시작이었다. 김연우는 침을 튀기며 혜성의 찬양에 열을 올렸다.

딸랑, 문이 열리고 젊은 사내가 들어왔다. 김연우와 전체적인 인상이 비슷했다. 그는 곧장 들어와 김유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갑자기 회의가 좀 있어서요.”

그는 유진을 향해 인사한 뒤, 김연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고, 이 인간아. 또 혜성이 형 타령이야?”

“뭐라는 거야? 이몽룡 옆에 있는 방자 같은 놈이. 아무튼 우리 혜성 씨 지금 뭐 해?”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빛냈다.

“뭐? 방자? 나 A급이야, A급!”

그는 어이없다는 듯 A급을 강조하고 말을 이었다.

“지난번 사건으로 당분간 특별 휴가 상태야. 어디서 바람이라도 쐬고 있겠지.”

“혼자? 아아,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이럴 때 내가 곁에 있어야 하는데.”

“혜성이 형 마음 아픈 건 생각하고, 동생 아픈 건 생각 안 하지? 폭탄 테러 때 내가 얼마나 다쳤는지 몰라?”

“야, 솔직히 사건은 혜성 씨가 다 해결했잖아. 넌 옆에서 거들기만 하고.”

“뭐? 향단이가 지금 뭐라는 거야?”

티격태격. 전형적인 남매였다. 이대로라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바쁘실 텐데 부탁드려서 죄송합니다.”

김유진이 화제를 돌리고 진지하게 물었다.

“저도 말씀 들었습니다. 지하 마켓에 가고 싶으시다고요?”

그제야 사내도 그녀에게 몸을 돌렸다.

“네. 죄송해요. 저 혼자서는 엄두가 안 나서요. 알고 있는 능력자도 따로 없고.”

김유진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괜찮습니다. 마침 저도 지하 마켓에서 뭐 좀 조사하고 싶었거든요.”

“네? 뭔데요? 기관에 따로 수사팀이 있지 않나요?”

김유진은 눈을 빛내며 막내를 쳐다봤다.

“차성진이라고, 폭탄 테러범 아시죠? 그놈과 관련해서……”

그는 말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김유진의 직업이 뒤늦게 떠오른 것이다.

‘요즘 기관의 분위기가 예전과 다릅니다. 차성진, 블랙, 장현수. 조사할 건 많은데 윗선에서 누군가가 조사를 뭉개는 느낌이랄까요?’

그는 이 말을 목구멍 속으로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게 있다고 대충 얼버무리며.

“아참.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죠?”

김유진이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친구 동생이라 말은 많이 들었지만, 어쨌든 처음 만난 사이였다.

“제 별명이 막내거든요. 그냥 편하게 막내라고 부르십시오.”

막내는 가볍게 웃으며 커피숍을 나섰다.

***

인사동 뒷골목.

강지영은 골목을 몇 번 돈 뒤 작은 전통찻집으로 안내했다.

“설마 진짜 얼굴로 다닐 생각은 아니겠죠?”

들어가기 전, 그녀는 백팩에서 담뱃갑처럼 생긴 케이스를 꺼내 건넸다.

“이게 뭡니까?”

혜성이 받아 열어보니 얇은 가면이 들어있었다.

“혜성 씨의 새로운 얼굴. 우리 얼굴은 언론에 너무 팔렸잖아요.”

강지영은 웃으며 마스크를 내렸다. 길을 가다가 하루에도 몇 번은 만날 것처럼 생긴 여자가 서 있었다. 웅도 마스크를 벗어 평범한 얼굴을 드러냈다.

“아, 천면(千面) 여우의 가죽.”

혜성은 가면을 이리저리 보면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하나에 일억 원. 하지만 워낙 구하기 힘들어 시장가는 몇 배나 됐다.

‘이런 걸 아무렇지 않게 주다니.’

새삼 강지영의 배후 조직에 놀랐다. 가면을 써 보니 본래 피부인 것처럼 딱 맞았다.

“잘 어울리는군요.”

그녀는 웃으며 찻집으로 들어갔다. 웅도 그를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뒤따랐다.

찻집은 평범했다. 평일 낮인 탓에 손님은 없었다. 주인은 강지영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찻집 구석의 밀실로 안내했다.

“대체 여긴 왜……”

혜성이 말하려는 찰나, 그녀는 벽에 붙은 오래된 족자를 몇 번 눌렀다. 강하게 약하게, 다시 강하게……. 암호를 입력하듯 누르자, 벽이 좌우로 갈라지고 작은 문이 나타났다.

“쉿!”

그녀는 검지를 입술에 붙이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비밀 통로인가?’

혜성은 뭔가에 홀린 것처럼 쳐다보다가, 그녀를 뒤따랐다.

천장에는 야광 구슬이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좁은 벽을 따라 세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섰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다른 세상을 걷는 것 같은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공간 계통의 스킬로 만든 건가?’

5분쯤 내려가자 복도가 끝나고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이건 뭐야?”

혜성은 몇 번이나 눈을 비볐다.

눈앞에는 커다란 철제문이 있었다. 크기는 가로, 세로 각 5m 남짓. 정면에는 빛, 어둠, 불, 물, 바람, 땅, 얼음 등 자연계 능력을 상징하는 도형이 새겨져 있었다.

문 옆에는 정장을 입은 가드 세 명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공항처럼 스캐너, 검색대, 각종 모니터 등도 보였다.

“여긴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가드 중 하나가 그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처음 보는 낯선 얼굴들. 게다가 하루에도 몇 번은 볼 것 같은 흔한 외모였다.

“회색 방울뱀 소개로 왔어요.”

강지영이 백팩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혜성이 어깨너머로 힐끔 보니 일종의 카드 같았다.

가드가 카드를 검사하는 동안, 다른 가드들은 그들의 옷과 가방을 검색했다. 핸드폰 등의 영상 기기는 전부 압수. 그 외에는 특별한 게 없었다.

“아시겠지만, 이곳의 규칙은 단 하나입니다. 절대 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규칙을 어기면 즉시 죽음의 진이 발동될 겁니다.”

가드 하나가 혜성의 몸을 뒤지며 주의를 줬다. 사신의 축복. 이름부터 괴상한 특수 진법이었다.

“명심하죠.”

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 마켓은 온갖 더러운 쓰레기 같은 능력자들이 모여드는 곳. 그런데도 나름대로의 질서를 유지하는 건 가드들과 ‘사신의 축복’이라는 진법 덕분이었다.

이윽고 모든 검사가 끝났다.

“특별히 찾으시는 물건이 있습니까? 혹은 브로커나.”

가드가 그들에게 백팩을 돌려주며 물었다.

“특수한 폭탄을 좀 구하고 싶은데요. 전에……”

혜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

10분 뒤.

통로 너머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꼭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하는 겁니까?”

“투덜대지 마라. 지난번 실패 때문에 마스터께서 화가 단단히 나셨으니까. 이번엔 실수 없이 직접 처리하라는 엄명이다.”

“쳇. 이런 건 딱 질색인데.”

이어서 두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걷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뚱뚱이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홀쭉이였다.

“여어, 수고 많으십니다. 회색 방울뱀 소개로 왔습니다.”

뚱뚱이는 웃으며 추천 카드를 내밀었다.

“또야? 오늘은 이상한 고객들이 많군.”

가드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둘을 검사했다. 이상 무.

“특별히 찾으시는 아이템이 있습니까?”

“브로커를 찾고 있는데요.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뚱뚱이는 넉살 좋게 웃으며 가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뭐……”

가드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멈췄다. 대신 홀린 것처럼 그의 눈을 쳐다봤다. 그의 두 눈은 붉게 빛나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가드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다른 가드도 홀쭉이의 눈만 멍하니 바라봤다.

최면 완료.

“그런데 이놈들. 우리한테 분명 ‘또’라고 했죠? 우리보다 먼저 회색 방울뱀을 찾아온 놈들이 있는 걸까요?”

뚱뚱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홀쭉이를 바라봤다.

“마스터가 우리 외에 다른 놈들을 더 보낼 리는 없고. 정부 놈들이 냄새를 맡은 건가?”

홀쭉이도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

“가자. 마스터는 실패를 두 번이나 용납할 분이 아니다. 쥐방울은 꼭 우리가 잡아야 한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뚱뚱이와 가드들이 빠른 걸음으로 뒤따랐다.

***

허름한 반지하 사무실.

사방에는 각종 아이템이 담긴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놈들이 미끼를 물었습니다. 회색 방울뱀의 추천카드를 들고 온 자들이 두 팀 있었다더군요.”

검은 점퍼를 입은 사내가 허겁지겁 들어와 보고했다.

“그래? 역시 계획대로군.”

그는 먹던 짜장면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소리 죽여 웃었다. 작은 키와 마른 체구, 째진 눈 때문에 쥐방울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자였다.

“이해가 안 됩니다. 왜 여기저기에 가명으로 떡밥을 뿌리신 겁니까? 이럴 때일수록 더 몸을 사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점퍼를 입은 사내가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짱깨 놈들이 이런 말을 했지. 오랑캐는 오랑캐로 잡는다. 그거하고 비슷해.”

쥐방울은 휴지로 입가를 훔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네?”

“솔직히 나를 노리는 놈들이 한둘이야?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차성진의 배후에 정보국까지. 그래서 놈들을 한곳으로 유인, 놈들끼리 싸움을 붙이는 거지.”

“아!”

그제야 점퍼를 입은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쥐방울은 겨우 B급 능력자였다. 그런 그가 지하 마켓에서 제법 인지도를 쌓고 오래 버틴 건 바로 이 잔머리 덕분이었다.

“나는 하난데 나를 노리는 놈들은 하나가 아니고. 그럼 놈들은 어떻게 할까? 크크크.”

쥐방울은 히죽 웃었다. 자기들끼리 열심히 치고받는 모습이 떠올랐다.

“차성진의 배후 대 정보국. 누가 이겨도 상관없어. 어차피 남은 놈은 사신의 축복이 알아서 처리해줄 테니까.”

“사신의 축복!”

암흑 속성을 지닌 정신계통의 진법. 그 이름처럼 절명의 진이었다. 점퍼의 사내는 그 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한기를 느꼈다.

“사신의 축복은 그야말로 죽음의 진. 죽고 싶어 안달이 난 놈이 아니고선 절대 깰 수 없지.”

쥐방울은 재차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아이고, 농담도 잘하십니다. 말이 쉽지. 세상에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놈은 절대 없다에 제 불알 두 쪽을 걸죠.”

점퍼의 사내도 킥킥 웃어댔다.

“놈들을 한곳으로 모으는 건 됐고. 이제 슬슬 다음 단계를 시작해 볼까?”

쥐방울은 웃음을 거두고 뭔가를 길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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