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5. 내가 싸우는 이유 (1)
A 신문사 사회1부는 오늘도 전쟁터였다.
“뭐? 능력자의 사회적 책임? 야, 김유진! 너 지금 장난해? 다른 신문 안 보냐?”
부장은 그녀에게 경쟁사의 신문을 던지며 호통쳤다.
“그게……”
김유진은 말끝을 흐리며 경쟁사의 신문을 힐끔 내려다봤다.
방송국에서 있었던 일이 톱이었다. 이혜성 대 장현수의 공개 대전. 하지만 중계는 화염이 터지기 전까지만 이어졌고, 그다음엔 검은 화면만 나왔다.
- …… 정부 발표 …… 이혜성 대 장현수의 싸움 도중 변종 게이트 발생 …… 이혜성과 장현수는 즉시 대전을 중단하고 몬스터들과 전투. …… 불의의 사고 …… 장현수 전사 …….
구겨진 탓에 몇 문장만 보였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알 수 있었다.
“이런 거 말고. 자극적인 기사를 쓰란 말이야, 자극적인 거. 박 기자가 쓴 이혜성 프러포즈 같은 거 말이야.”
“하지만 그건 기사가 아니라 독자를 속이는……”
“누가 그거 몰라? 기자 정신? 말은 좋은데, 그게 밥 먹여 줘?”
잔소리, 잔소리, 잔소리.
김유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벌을 받듯 한참 동안 서 있다가 물러났다.
“하아! 먹고살기 힘들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긴 한숨을 토해냈다. 기자의 양심? 사회적 사명감? 부장은 그런 것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선배. 제가 좋은 소스 하나 드릴까? 전 요즘 유수혁 취재 때문에 정신이 없거든요.”
옆자리에 앉은 후배 기자가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걸었다. 부장의 총애를 듬뿍 받는 기자였다.
“소스?”
김유진은 억지 미소를 만들며 몸을 돌렸다.
“네. 지하 마켓 알죠? 불법으로 각종 아이템과 장비를 거래하는 곳이요. 거길 한번 파 보는 거 어때요?”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후배는 좌우를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거긴 아무나 출입할 수 없다고 들었는데?”
“다 방법이 있죠. 혹시 황석구라고 아세요?”
“이혜성이 잡은 전직 헌터?”
“네. 마침 제 정보원 중 하나가 황석구하고 안면이 있거든요. 기름칠 좀 해주면 지하 마켓에 관한 정보를 흘려주겠다고 했어요.”
후배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엄지와 중지를 비비면서 돈을 세는 시늉을 하며.
“잠입 취재인가?”
김유진은 말끝을 흐렸다. 의도는 좋지만 좀 망설여졌다.
“싫으면 말고요. 선배 말고도 그거 하겠다는 사람 많으니까요.”
후배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알았어. 할게, 해.”
그녀는 급히 후배의 어깨를 잡았다.
“지하 마켓도 종류가 많다고 들었는데. 일급 마켓은 회원제로 운영되고 말이야.”
“물론 일급은 무리죠. 자투리지만, 그래도 제법 흥미로운 기사가 나올 거예요.”
“그래? 어딘데?”
김유진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후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인사동이요. 구체적인 위치는……”
***
오후 2시, 평택 외곽.
4층짜리 건물 옥상에 H 클리닉이라는 간판이 크게 보였다. 클리닉이 건물 전체를 전세 낸 듯 다른 간판은 없었다.
“H 클리닉?”
혜성은 간판을 힐끔 쳐다보고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승용차 몇 대가 듬성듬성 서 있었다. 그는 주차를 마치고 핸드폰을 꺼냈다. 강지영이 보내준 좌표에 제대로 찾아왔다.
뒷자리를 돌아봤다. 강지영이 준 정장이 케이스에 들어 있었다.
“자가 복원 기능까지 있는 건가?”
그는 전투 직후의 상황을 떠올려봤다. 전투가 끝나고 털썩 주저앉은 뒤, 그림자형 갑옷은 본래의 정장으로 돌아왔다. 주름 하나 없는 말끔한 모습으로.
“저걸 입고 갈까?”
혜성은 망설이다가 평범한 갈색 재킷을 들었다. 대신 조수석 수납공간에서 단도와 몇 가지 도구를 챙겼다.
그런데 그가 막 차에서 내린 순간.
“크아아악!”
어디선가 거구가 나타나 그에게 달려들었다. 키는 2m 남짓. 곰처럼 생긴 자였다.
놈은 대뜸 주먹을 날렸다. 부웅, 파공음이 묵직했다.
“뭐야?”
혜성은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젖혀 피했다. 동시에 오른 주먹으로 놈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괴한은 피하지 않았다. 가볍게 콧방귀를 뀐 후, 오히려 그의 관자놀이를 향해 오른 주먹을 날렸다.
콰앙, 주먹과 주먹이 서로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둘 다 휘청거렸지만, 체격이 작은 혜성의 충격이 더 컸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혜성이 뒤로 물러서기 전, 괴한의 주먹이 재차 날아왔다. 콰직, 두개골이 깨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그는 두세 걸음 물러선 뒤 겨우 자세를 바로 했다.
세 번, 네 번. 둘은 같은 짓을 반복했다.
“뭐 이런……”
혜성은 피하려다가 이를 악물고 맞받아쳤다. 오기였다.
다섯 번째로 주먹을 교환하려는 찰나였다. 부웅, 혜성의 몸이 돌연 환한 빛무리에 둘러싸였다. 2차 각성. 놈의 주먹이 날아오는 경로가 환영으로 미리 보였다.
쾅, 놈의 주먹이 혜성의 관자놀이를 강타했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 쳤냐?”
혜성은 차가운 비웃음을 흘렸다.
“어?”
괴한이 당황하며 주춤 물러섰다.
이번엔 그가 주먹을 휘둘렀다. 괴한은 급히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소용없었다. 콰앙, 괴한은 방어 자세 그대로 나가떨어져 벽에 처박혔다.
“일어나라. 이제 시작이니까.”
혜성은 어깨를 풀며 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그러나 여기까지.
“스톱! 그 애를 죽일 셈인가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담배를 입에 문 강지영이었다.
****
“엄청난 친구분을 두셨군요. 그 상처가 하루 만에 다 낫다니.”
강지영은 물고 있던 담배를 끄고 반갑게 아는 척했다.
혜성은 그녀와 거한을 번갈아 쳐다봤다. 어떤 상황인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날 시험한 건가?’
그는 뒤늦게 무언가 깨달았다. 주먹 몇 대로 2차 각성을 끌어내다니. 지능은 좀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능력은 A급 이상이었다.
“죄송해요. 그 애가 혜성 씨의 열렬한 팬이거든요. 직접 주먹을 섞어 보고 싶다나?”
그녀는 품에서 담뱃갑 같은 케이스를 내밀었다. 혜성이 열어보니 1급 치료제가 들어 있었다.
“하아.”
혜성은 한마디 쏘아붙이려다가 한숨만 내쉬었다. 안 그래도 요즘 이메일에 쌓이는 도전장이 하루에도 수십 통이었다.
“꽤 세더군요.”
혜성은 약을 한 알 꺼내 삼키고 턱을 슬쩍 문질렀다. 파앗, 2차 각성의 서기가 급속도로 사그라들었다.
“누굽니까?”
혜성은 거한을 슬쩍 쳐다보며 물었다. 녀석은 두 손을 모은 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우상을 만난 소녀팬처럼.
“제 경호원이요.”
그녀는 거한에게 슬쩍 손짓했다.
팬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녀석은 그를 곁눈질하며 주차장 구석의 경비실로 들어갔다.
“가시죠. 피차 할 말이 많을 테니까요.”
그녀는 앞장서서 엘리베이터를 탄 뒤, 버튼들을 동시에 눌렀다가 떼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곧이어 엘리베이터가 빠른 속도로 하강했다. 층을 나타내는 디지털 숫자는 없었다.
‘뭐지? 여긴 지하 3층까지만 있는데.’
혜성이 당황하는 가운데 엘리베이터는 계속 내려갔다.
띵, 이윽고 문이 열리자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폭 2m의 복도를 중심으로 여러 방이 좌우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 뭔가 비밀 시설 같았다.
“여긴 어딥니까?”
혜성은 재킷 안쪽의 단도를 확인하며 강지영을 쳐다봤다.
NSA나 CIC 산하는 아닌 것 같았다. 제3의 조직. 게다가 이 정도의 비밀 시설이라면 규모와 자금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제가 속한 조직의 지부 중 하나예요.”
강지영은 제일 끝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병원 진료실 같은 분위기였다.
“묻고 싶은 게 많습니다.”
혜성은 마음이 급했다.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소파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알아요. 암흑의 수호자. 참 대단한 방어구죠. 좋은 아이템을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는 거죠?”
그녀는 웃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보는 사람도 절로 웃게 만드는 미소였다.
“변형 갑옷의 이름이 암흑의 수호자입니까? 아무튼 이번 일과 관련해서 의문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혜성은 얼굴이 빨개졌다.
“평범한 여배우는 아닌 것 같고. 정체가 뭐냐? 어떻게 그런 아이템을 손에 넣은 거냐? 그걸 내게 준 이유는? CP와 장현수는……”
그녀는 혜성이 하려던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맞습니다.”
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도 아는 게 많지 않아요. 일종의 대리인이니까요.”
강지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정체를 밝힐 수 없는 특수 기관이 있다. 그들과 혜성 씨는 공동의 적을 둔 상태. 그들은 혜성 씨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다만 아직은 그들이 직접 나설 단계가 아니다. 대충 이렇게만 알고 계세요.”
“특수 기관? NSA나 CIC 말고요?”
혜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혜성 씨도 눈치챘을 텐데요? 뇌전의 광견과 차성진. 그들의 행동은 NSA 내부의 변절자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죠.”
“……”
혜성은 지난 사건들을 떠올렸다.
뇌전의 광견 일당이 아이템 수송 계획을 알아낸 것, 차성진이 정부의 아이템을 빼돌린 것 등등. 내부의 누군가가 정보를 유출한 게 분명했다.
“정부 기관, 언론, 정관계, 심지어 재계까지. 적은 이미 우리 내부 깊숙이 들어와 있어요.”
혜성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도 막연히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 적들이란 아마 차성진이 말했던 블랙일 터. 그리고 강지영이 속한 기관은 보이지 않는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창설된 기관인 것 같았다.
“지금 이 말을 제게 하는 이유는 뭡니까?”
혜성은 눈을 빛내며 그녀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우리와 거래하자는 거죠. 혜성 씨는 우리의 정보가 필요하고, 우린 대신 움직여줄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거래라.”
혜성은 그녀의 말을 곰곰이 되새겼다.
남은 시간은 5개월 반 남짓. 복수를 하기 위한 돈도, 시간도, 정보도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어떤 조직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봤을 때 정부 쪽이나 그와 비슷한 위치인 것 같았다.
“좋습니다. 놈들을 잡을 수만 있다면야. 한데 놈들을 어떻게 잡을 겁니까?”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녀는 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흰 배경 위에 누군가의 뇌를 스캔한 사진이 있었다.
그녀는 리모컨으로 사진들을 넘기며 말했다.
“혜성 씨를 여기로 부른 것은 이걸 보여주기 위해서예요.”
“이게 뭡니까?”
“장현수와 CP의 뇌 전단 스캔. 그런데 둘에게서 최면의 흔적이 발견됐어요.”
강지영은 둘의 뇌에 대해 한참 동안 설명했다. 현재로서는 최면술사를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여러 정황증거로 봤을 때 술사는 혼자가 아닌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럼 어디부터 시작하면 됩니까? 장현수와 CP는 죽었고. 최면술사라면 딱히 증거도 남기지 않았을 텐데.”
혜성은 팔짱을 끼고 말끝을 흐렸다.
“차성진, 기억하시죠? 놈은 정부 연구소의 아이템을 어디에서 구입했을까요?”
강지영은 미소를 머금고 질문을 던졌다.
“지하 마켓?”
혜성은 검지로 관자놀이를 툭툭 치다가 대답했다.
“빙고. 우린 그의 차명 계좌에서 수상한 거래 내역을 확인했어요.”
그녀는 테이블 한쪽에 있던 서류를 건넸다.
“지하 마켓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혜성은 자료를 훑어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서류는 차성진의 금융 거래내역이었다.
“운이 좋았어요. 정보원 하나가 마켓에 들어가는 방법을 찾았거든요. 일단 거기부터 시작하죠.”
“거기가 어디입니까?”
강지영은 그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사동. 지금 당장 인사동으로 출발해요.”
***
강남 Y 오피스텔 32층.
“……네, 네. 알겠습니다.”
사내는 절도 있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이는 30대 초반 정도. 기괴할 정도로 마르고 창백한 자였다.
“마스터는 뭐라고 하십니까?”
소파에 앉아 있던 다른 사내가 물었다. 전화를 끊은 자와 대조적으로 비대한 거구였다.
“광고 회사 놈들이 움직였다. 이혜성은 당분간 놔두라는군.”
마른 사내는 핸드폰을 집어 던지며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쩝. 이제 재미 좀 보려는데.”
뚱뚱한 첨가 핸드폰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섭섭해할 것 없다. 다른 임무가 생겼으니까.”
“뭡니까?”
“쥐방울이라고 아나?”
“네? 그게 누굽니까?”
뚱뚱한 사내는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이 날 듯하면서도 안 났다.
“차성진이 거래한 장물아비. 놈이 우리 애들을 따돌리고 도망쳤다는군.”
“쳇, 시시하군요. 우리더러 그 쥐방울을 잡아서 처리하라는 겁니까?”
뚱뚱한 사내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래. 놈이 광고회사에 넘어가면 우리까지 꼬리를 잡힐 테니까.”
“놈은 어디에 숨어 있답니까?”
깡마른 사내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야경이 화려했다. 그는 잠깐 야경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사동 지하 마켓. 놈은 거기로 숨어든 것 같다.”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 2권]